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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가 연극의 대본을 읽어 보겠습니다. 어떤 작품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 응석을 받아 주셨어요. 하지만 우리 집은 놀이터에 지나지 않아요. 저는 친정 집에서 아버지의 인형 딸이었던 것처럼, 당신에게 시집 와서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아이들이 제 인형이 되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제가 상대를 해서 놀아주면 기뻐하듯이, 당신이 저와 놀아 주면 기뻐했던 것예요. 여보, 이게 우리의 결혼 생활이었던 거예요.”
예, 노르웨의 작가 헨릭 인센의 [인형의 집]입니다. 주인공 노라는 남편을 위해 또 그 전에는 아버지를 위해 인형처럼 살았습니다. 남편이 죽을 병에 걸려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서 남편 친구에게 아버지의 명의를 도용해서 돈을 빌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여자는 남편이나 아버지의 보증없이는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릴 수 없었습니다.
남편은 병에서 나았지만 아내가 아버지의 명의를 도용한 것에 대해 분노하면서 ‘애를 키울 자격이 없으며, 우리 사이는 명목상의 부부일 뿐이다’라고 아내 사라를 몰아 세웁니다. 사건은 남편의 사과로 마무리 되지만 아내 사라는 이 사건으로 크게 깨닫습니다. ‘자신은 남편에게 귀여운 인형에 불과했다’라고 ….. 그리고는 집을 떠납니다.
이 작품은 여성의 자기 발견과 사회적인 해방, 개인과 사회적 인습 사이의 갈등과 자각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여성 해방, 여성 권익,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때면 꼭 등장하고 화제가 되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여러 버전으로 개작되어서 세계 각국에서 연극으로 인기리에 발표되고 있습니다.
과연 집을 나간 노라는 어떻게 됐을까요? 노라를 비난한 남성들은 이래저래 험한 꼴만 당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 또 어떤 작품은 작가로 대성공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또 어떤 작품은 성공해서 돌아왔는데, 남편은 술주정뱅이가 되고, 아들은 깡패가 되어 있는 … 딸은 자살하고 …..뭐 그런 식으로 후속편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인형의 집에 나오는 노라는 인형이 아닌 한 인간으로, 자아를 찾아 떠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 가운데도 ‘집을 떠나가는 탕자’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익숙한 내용, 오랜 교회생활을 하신 분들은 수없이 많이도 들었을 탕자 비유의 설교입니다. 오늘도 다시 반복해서 ‘탕자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아들이 둘인 어떤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자기들의 농장에서 일해 왔습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다가와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내가 당신이 죽기까지는 기다릴 수 없으니 유산을 물러 달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작은 아들은 아버지 유산의 1/3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신 21:17). 그러나 미리 자기 몫을 받을 때에는 그보다 적은 2/9 정도를 받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가 진짜 돌아가시면 더 이상 유산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 아들은 자기 몫을 받았습니다. 그 후 그는 “재물을 다 정리를 했습니다.” 이제 그는 자기 소유를 처분하여 어디든지 자유롭게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동쪽에 있는 바벨론, 북쪽에 있는 소아시아, 서쪽에 있는 그리스와 이태리, 혹은 남쪽의 이집트와 아프리카 등 어디든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가 손짓했습니다. 정말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았습니다. 드디어 아들은 아버지 집을 떠나기로 결행했습니다. 먼 나라에 이주해 갔습니다.
탕자는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마음을 붙이지를 못했습니다. 자신이 머무는 자리, 삶의 터전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집 바깥의 세상에 정신이 빠져 있었습니다. 언제나 떠날 궁리, 아버지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만을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처럼 농사를 지으면서 소처럼 일이나 하며 한평생, 내 젊음을 섞일 수 없다고 …. 나는 이 따위 일을 하다가 내 청춘을 허비할 수 없다고 ….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데 , 내 뜻을 펼쳐 보이리라.”
어떻게 보면 정말 진취적이고, 야망이 있는 젊은이입니다. 정말 두 눈이 반짝이는 생명력이 넘쳐나 보입니다.
반면에,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이들은 꿈을 꾸지 않는다고 합니다. 꿈을 꾸면 오히려 비참해진다는 것입니다. 오르지 못할 꿈을 꾸어 봐야 자기만 힘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되는대로 그럭저럭 … 아르바이트나 하면서 결혼도, 직장도, 출산도, 내 집 마련의 꿈도 포기하고, 하루 하루 만족하면서 살겠다고 합니다.
꿈을 꾸지 못하게 하는 사회 , 꿈을 꾸지 않는 젊은이들은 참으로 비극적입니다. 그렇지만 탕자는 너무나도 많은 꿈을 꾸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면 ….. 이것도 저것도, 눈치 보지 않고 나는 즐기며 자유하리라. 상상의 나래는 그를 아버지의 집을 떠나게 했습니다. 하지만 탕자의 꿈은 지나친 야망으로 그를 낭떠러지로 몰아가게 했습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게 했습니다. 인생 폭망의 길로 달려갔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주의 제자들과 베드로가 주님의 복음을 전할 때에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해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자녀가 장래일을 말하고, 늙은이는 꿈을 꾸고, 젊은이는 이상(환상)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젊은 청년들은 미래를 말하고 미래를 준비합니다. 늙은이 조차도 꿈을 꾸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언제요? 바로 주의 영이 임할 때입니다. 주의 은혜의 때에 그러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임하여 성령 충만한 자가 되면 환경에 메이고, 현실에 발목 잡히고, 주변을 탓하며 자포자기하지 않습니다. 젊은이는 현실의 제약 가운데서도 내일을 꿈꾸며 미래를 준비합니다. 인생 다 산 늙은이도 그저 주저 앉아서 죽을 날만 헤아리며 신세 한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주시는 꿈을 안고 기도하고 격려하고 든든한 후원자로 꿈을 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지금 현실의 암담함에 발목 잡히기 보다는 내가 선 자리, 내가 머무는 자리,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머문 이 자리에서 주께서 주시는 꿈을 꾸게 하소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 자리를 채우게 하소서. 꿈을 꾸며 준비케 하소서.’
이렇게 살게 될 때에 세상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주의 영으로 꿈을 꾸며 사는 자가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둘째 아들(탕자)는 세상의 야망에 사로잡혀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을 다 정리해서는 아버지의 그늘이 비치지 않는 신세계로 떠났습니다. ‘아 이제 자유다. 이 자유를 만끽하리라’ 그는 흥청망청, 새롭게 이주한 곳에서 마음대로 허랑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오늘도 먹고 마시고 취하고 ….. 내일도 먹고 마시고 취하고 ….. 그의 날들은 신나고 재미가 천국과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많아 보였던 아버지께로 받은 유산도 오래 동안 방탕한 생활을 지탱해 주지를 했습니다. 몽땅 탕진해 버렸습니다.
때마침 사방에 기근이 들어서 물가는 폭등하고, 입에 풀칠하기 위해 일자리를 구해도 일자리가 없었습니다. 호구지책으로 찾아낸 일자리가 돼지를 키우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자리는 유대인으로서는 가장 비참한 자리에 떨어진 것입니다.
어릴 적부터 줄곧 돼지는 부정한 짐승으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돼지를 치면서 안식일도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선조의 경건한 신앙으로부터 완전 단절된 삶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기근이 심해지자 허기에 지친 그를 돌아보아주는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돼지가 먹는 사료인 쥐엄 열매로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으며 나중에는 이 마저도 먹을 수 없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둘째 아들(탕자)는 이러한 결말을 예측하지를 못했습니다. 오직 현실, 오늘에만 안주하면서 흥청망청했습니다. 내일을 내다보지 못하고 하루살이처럼 살아간 것입니다.
오늘, 믿음이 좋다고 하는,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대책없이 살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내일 일은 나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하면서 살아갑니다. 사실은 이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고 사실은 무책임하게 사는 것입니다.
100세 시대가 도래했는데, 은퇴 후에도 3,40년을 버티고 살아야 하는데, 젊을 때에, 돈이 들어올 때에 절약하고 준비하는 것은 불신앙이 아니라 지혜로움입니다. 규모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지나치게 ‘내일 내일 ‘하면서 오늘을 혹사하고, 오늘의 삶을 희생해 버리는 것도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을 감사하면서 행복한 하루, 지금을 결코 무시하지 않습니다.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무시하는 것도, 오늘을 위해서 내일을 망각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며칠 전에 항암 치료를 받고 있는 누님과 통화하면서 누님이 말했습니다. “동휘야, 내가 났겠나?”라고 물었습니다. 그 간절한 마음을 헤아려, 누님을 위로해야 하는데, 제가 그때에 집착한 것은 지나친 희망을 주는 것도 거짓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했던 말이 “누나, 누구나 죽어. 나도 죽어. 그리고 누나도 죽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누님이 하는 말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왔으니 한 번 가는 것이 이치지”라고 목소리가 딱 가라앉아서는 말했습니다.
저는 후회했습니다. 위로를 받고자 동생에게 했던 말을 좀 더 신중히 듣고, 듣고 싶은 말로 위로를 해주어서야 했는데 하는 자책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 누구나에게는 죽음이 곧 다가 온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이 오늘을 살고 있다고, 오늘이 내일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끝에 내일이 옵니다. 그리고 내일에는 끝이 있습니다. 그 끝은 죽음이요, 죽음 이후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을 살되 끝이 있고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하나님 앞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일을 준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내 영혼아 편안히 먹고 쉬자”라고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맞이한 것은 비참이었습니다. 죽음과 같은 낭떠러지였습니다. 그래도 참 다행스러운 것은 기근 가운데 그가 비로서 떠나온 아버지 집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이렇게 말하기로 작정하고,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 어떠했을까요? 아버지 고향 집을 돌아간다는 즐겁고 기쁜 걸음이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탕자의 고향길은 금의환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떨어진 의복에 신발도 싣지 못한 거지 중의 상거지가 되어 고향으로 걸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났던 아들의 귀향에는 아들에게는 주저함과 아쉬움 그리고 두려움 등등이 얼마나 교차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명절이 되어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부모님이 살아 계셔도, 기다리는 부모형제가 있어도, 돌아가지를 주저합니다. 이 모양 이 꼴로 어떻게 하는 자책감과 패배의식이 무섭게 억누릅니다. 고향 사람들의 눈빛, 고향 친구의 성공 등등 열등감이 주저 앉게 합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지금까지 실패했지만 이 번 한 번만 잘되면 모든 판을 뒤집을 수 있다는 허망한 기대감과 아쉬움이 죄악의 구렁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탕자는 이 모든 것보다 더 자신을 사로잡고 생각했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고향 집을 지키고 계신 아버지였습니다. 자신을 발목 잡고 억누르는 주저함과 열등감과 세상의 열망보다도 아버지를 떠올리며 아버지의 용서함을 기대하고 믿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내가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내가 어떤 마음으로 낙망하고 있더라도 우리에게 하늘 아버지가 계심을 기억하십시다. 어떤 세상의 족쇄보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권능이 크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주저하며 쭈빗거리며 걸어오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의 모습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버지는 측은히 여겨, 달려가서 그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종에게 명하여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가 입히게 하고, 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 그 발에 구두를 신긴 다음 살찐 송아지를 잡아 성대한 잔치를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하고 기뻐하셨습니다.
이 예화는 실화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창작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세상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사실이며, 주변에서 이런 방탕한 자식을 찾아보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잃어버린 비유가 나옵니다. 잃어버린 양과 은전 비유, 그리고 아들 비유입니다. 세 가지 비유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한날 한시에 같은 청중들에게 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그리고 죄인과 세리들이 모인 자리에서 하셨습니다.
서로 비슷한 세 가지 비유이지만 차이점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는 방법이 각각 다릅니다. 길을 잃은 양을 목자가 찾아나섭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은전도 마찬가지로 여인이 등불을 들고 바닥을 빗으로 쓸며 밤새 찾습니다. 그러나 집을 나간 방탕한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는 결코 찾아나서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방탕한 아들이 찾아오기를 집에서 기다립니다.
이것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양에 대한 목자의 사랑이나 은전에 대한 여인의 사랑보다 적었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아버지는 들려는 입소문에 따라 방탕한 아들의 멱살을 잡고 억지로 끌고 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언제든지 다시 떠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멀리서 방탕한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아들의 마음에 아버지의 생각이 떠오를 때를 절실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본인이 스스로 고난 가운데서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의지적 결단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필요하기에 아버지는 참고 인내하면서 기다렸던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보다도 크고 놀라운 사랑으로, 세상의 모든 것보다 크신 권능으로 나를 용서하시고 안아주실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다리십니다. 안아 주십니다. 함께 동행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