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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행과 포교하는 사부대중 >
평범한 시민 유정주,
국회로 가다
취재 | 전현자 (미주현대불교 한국주재기자)
유정주 의원
장소: 삼청동
유정주 의원: 감사합니다.
기자: 의원님께서 머털도사님이시라구요?
의원: 제가 머털도사는 아니지만, 머털도사 이모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기자: 이모가 뭡니까?
의원: 머털도사 원작 만화책은 따로 있고요. 이두호 선생님쎄서 원작자니 머털도사의 아버지겠고 저는 이모정도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이후에 90년도 말에 저희 아버지께서 바로 그 머털도사라는 만화 원작으로 애니메이션을 3부작 시리즈로 제작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한 20년 간 설날과 추석 때 특집 방송으로 방영 하면서 사람들 기억에 굉장히 깊숙이 남아 있는 한국 애니메이션 중에 하나가 되었지요. 그리고 제가 다시 머털도사를 2012년에 26부작 시리즈 애니메이션으로 EBS와 공동제작했고 방영되었습니다. 긴 인연이었지요. 올해도 EBS에서 재방송으로 8년 만에 또다시 방송 했습니다, 인연의 길이와 제작하면서 겪은 경험들을 보면 머털도사는 아니지만 머털이와 아주 가까운 머털이의 이모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좋은 이모였는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기자: 그러시다면, 저는 아버님의 머털 도사를 먼저 알았습니다. 제 아이들이 초등학교때 테이프를 사놓고서 몇 번 봤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하도 많이 봐서. 너무 재밌어서요. 그런데 그걸 아버님께서 하셨다고요?
의원: 네, 아버지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1세대라고 할 수 있어요. 저처럼 제작을 하셨고요. 아버지 시대에는 방송국이 자본과 원천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그것을 만드는 그야말로 프로덕션 역할을 했었는데 MBC라는 방송국에서 머털도사를 만들어보자 해서 같이 기획을 해서 저희 아버지가 프로덕션부터 총제작을 하셨던 작품이죠. 방송국에도 감독과 프로듀서가 있었고요. 이원화된 구조였어요.
내용이 재밌는 건 아무래도 원작인 이두호 선생님의 만화책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애니메이션으로 오면서 캐릭터 디자인이 많이 바뀌긴 했어요. 얼굴 모양새나 이런 것들이. 그래서 많은 분들이 기억하는 머털도사는 그때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머털도사일거예요. 원작 만화하고는 조금 캐릭터가 달라졌습니다.
기자: 저는 원작 만화가 있는 줄도 모를 정도로 머털 도사하면 그 애니메이션에서 수염이 길게 자란 할아버지, 휭 날기도하고...
의원: 제자가 아니고 머털도사의 스승님입니다^^
기자: 아 그런가요.
의원: 주인공이 머털이고, 머털도사를 키우는 분이 스승님 누덕도사입니다.
기자: 아, 그렇습니까. 누덕 도사가 지팡이로 휭 날아서 저 산 꼭대기에 가는....
의원: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다 해서 누덕 도사입니다. 삶에 욕심도 없고 그저 누더기 옷 하나를 걸치고 누덕봉에서 작은 오두막에 살고 있지요.
기자: 머털 도사! 너무나 재밌게 봤습니다. 하도 좋아서 신작도 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앞에 계신 작가님께서 신작을 하셨다고요.
의원: 저는 작가는 아니고 제작자입니다.
기자: 아, 제작자요. 뭐가 다른 겁니까?
의원: 제작이란 파트가 있어요. 제작자가 있고, 감독이 있고, 글을 쓰는 작가가 있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저는 업체의 대표로서 그걸 기획하고 이 작품을 만들자 라는 것을 시작하고 끝까지 완성해내는 역할을 해요. 제작하기 위해서는 투자도 필요하고. 방송이 되어야 사람들한테 소개 되는 거잖아요. 처음부터 끝까지를 책임지는 역할을 프로듀서 역할을 하는게 제작자고요. 감독은 말 그대로 재밌게 만들어내는 사람. 이번 기생충으로 상을 탄 봉준호 감독처럼 크레에이터 역할을 해내는 사람이지요. 작가 역시도 글을 쓰고 스토리를 완성해내는 사람이니 크리에이터로 분류되고요. 제작자는 기획과, 투자유치를 한다는 점에서 창작과 관리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이예요. 제작사를 경영하는 경영인이기도 하고요.
기자: 그럼, 무엇을 하신 거예요?
의원: 저는 제작. 프로듀서. 이 작품을 만들자, 라고 결단을 내리고 원작자와의 계약, 작품의 기획, 파트너와 조인, 거기에 대한 투자를 받고 그리고 제작 진행이 잘 이향되는를 보고 감독을 선택하고 작가를 선택하고 이런 전체적인 플랜을 짜는 역할을 합니다.
제작자는 어떻게 보면 집안의 엄마 같은 살림을 하기도 하고 아버지같이 돈을 벌어오기도 하지요 ^^
기자: 네. 새로운 것에서의 캐릭터의 모습이나 내용도 조금 변하게 된 것은 제작자님 책임이에요?
의원: 그건 기획 단계에서 모든 스텝들과 연구 단계를 거쳐 결정됩니다.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는 미술 작업처럼 홀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에요. 여러 명이 모여서 기획을 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브레인스토밍을 하거든요. 거기에는 방송국도 있고 저희 같은 제작사도 있고 감독도 있고 작가도 있고 또 저 같은 프로듀서, 제작자도 있고. 함께 모여서 회의를 하죠. 공동 작업이라고 보시면 쉬우실 거예요. 즉, 기획하고 있는 작품의 타겟층, 방송되는 플랫폼사의 특징, 등 모두를 고려해서 디자인과 콘셉트를 결정합니다. 또한 제작비가 하이버젯인가 로우버젯인가에 따라서도 캐릭터 및 세계관(배경과 콘셉디자인) 등을 단순화할 것인가등을 결정하지요. 예전 머털도사는 3부작이었지요. 그것을 26부작으로 리메이크했을때는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가장 먼저 체크합니다. 나무의 가지들이 많잖아요? 그 중 어느 가지를 쫓아갈 것인가 찾아내는것이지요. 즉, 이야기를 확장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원작을 기본으로 하되, 새로운 이야기로 살을 붙여 나가는 겁니다. 그러한 여러 의견을 들어서 결정을 하게 되는 거죠. 제가 제작자이기 때문에 큰 역할을 하긴 합니다. 그런데 EBS라는 플랫폼의 특성이 어린이, 아이들 위한 프로그램을 많이 했고, 아직 한국은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예요. 그래서 초기 기획보다 타겟층이 어려진 경우이기도 합니다.
기자: 신작에서는 캐릭터가 세련되어졌다 느꼈는데요.
의원: 아무래도 2000년도를 넘어서서 2012년이니까요.
기자: 저는 아버님께서 하신 옛것이 더 좋았던 것은 호랑이가 나올듯하고 초가집이랑 깊은 산속의 풍경등이 영향을 주었습니다.
의원: 그런 의견이 많았고 저도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기획을 하는 동시에 제작을 하면서 방송을 했던 작품이에요. 즉, 아주 바쁘게 돌아간 제작 현장이었지요. 거의 생방송 식으로. 그리고 제게는 제작자로써 책임이 주어진 첫 장편 작품이어서 많이 서툴렀던 부분이 있었어요. 그 때도 저희 아버지께서 감독으로 들어오셔서 많은 역할을 하시고 도움도 주시고 저랑 많이 싸우기도 하고.^^ 의견일치가 안돼서. 그랬던 현실적인 부분이 많이 작용을 했죠. 다시 만든다면 이렇게 만들고 싶다 해서 사실 극장용을 진행을 했었는데요, 그때는 오히려 훨씬 더 세련되어졌었어요.
기자: 아 그랬군요.
의원: 요괴 마을과 인간의 세상과 또 고전적인 풍경에 SF를 더한 대작의 느낌으로 기획이 되었는데 그게 한중 합작으로 진행이 되다가 기획 단계에서 사드배치 이슈로 인해서 한중간의 무역이 멈췄었잖아요. 그러면서 애니매이션 합작 역시도 불발됐었어요.
기자: 아, 그래서 못 봤군요. 저는 텔레베젼이나 영화를 거의 본적이 없지만 머털도사가 영화로 나왔다면 봤을텐데, 크게 아쉽네요.
감독: 그렇죠. 그때 사업하면서 가장 큰 위기를 겪었던 시기였기도했고 그 당시부터 제가 국회나 문화쪽 관련기관들을 찾아다니면서 저희 민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국가적인 이슈에서 일어난 것을 재난에 준하는 상황으로 인식하고 개선과 방법을 찾아달라고 호소 했었습니다. 그때 처음 긴급 구조나 긴급 지원이 될 수 있는 시스템이 전무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많이 놀랐습니다. 그래서 1년 정도 국회를 쫓아다니면서 이로써 피해 본 기업들이 많이 있다 라는 것을 알리는 역할을 했었고요. 처음에는 저 살자고 시작했다가 시스템이 안돼있다는 직접 체감한 후 어떤 사명감 내지는 업계를 위한 처우개선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아이러니한 것이 그 힘든 고비를 넘기자 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주변에서 알게 되면서 애니메이션 산업 협회라는 곳의 회장을 맡게 되고 또 그 연결 고리로 해서 시민 사회 선배들로부터 추천을 받고 이번에 더불어 시민당의 비례 대표로까지 연결이 되어온 것 같아요. 인생은 정말 한 치 앞을 알 수 없지요. 절망의 시기를 건너면 그 끝에 또 다른 길이 있기도 하고 정말 좋은 기회다 싶어 들떠 있다 보면 그것이 독이 되기도 하지요.
언제나 한결같은 중심이 중요하다는 생각 많이 합니다.
국회의정 활동중인 유정주 의원
기자: 겸손하시며, 삶의 통찰 또한 대단하십니다.
의원: 저는 아직 당선인이에요.^^
기자: 여러 일을 겪으시면서 누가? 왜? 어떻게? 등등의 문제와 그 해결방안을 찾으셨기에 오늘의 국회의원 당선인이 되신 것이라 믿어집니다.
의원: 그 당시에는 여기까지 오게 될 줄 몰랐죠. 지나고 보니. 선생님 말씀처럼 이런 게 연이 되어서 내 인생에서 또 다른 역할이 새롭게 주어졌구나 라는 생각을 해봐요. 필연적으로요. 그 시기를 겪어내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몫을 해야한다라고. 제게 왔던 운명 같은 거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어려웠던 시기가.
기자: 우리는 흔히 문화는 배 불러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배 고프면서도 문화 예술을 지켜오신 분들이 계셨기에 위장을 채우는 것 못지 않게 심장을 채워야 한다면 우리 의원님께서 국회에 들어가신 것이 저에게는 아주 자랑스럽고 기대됩니다. 어떤 일을 하시고 싶으신지요?
의원: 가장 기뻐해주시는 분들이 저를 오랫동안 지켜 본 주변의 문화계 동료 선배님, 스승님들이예요. 요즘 사실 성찰할 것이 많아요. 어떻게 해야 할까. 제가 시작한 계기가 더불어 시민당이었잖아요. 제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던 거는 시민이었어요.
제가 오랜 시간 존경해 온 분들이 시민의 힘을 늘 강조하셨고요. 또 그 시민의 삶을 아는 사람이 정치인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리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정치를 바라봐야 한다 라는 건데 사실 국회의원으로 오랜 시간 사신분들에게 그것이 쉽지만은 않을거예요.
사람은 자기 우물 밖을 깊이 알기에는 사실 한계가 많은 존재지요^^ 그러나 정치를 오래 한분들이 갖고 있는 정무감각과 입법과 정책을 관철시키는 힘은 아주 중요해요. 저는 아직 그와 같은 공부가 부족하지요. 국회의원을 오래 했던 분들에 비해서요, 그러나 저는 직접 문화예술계의 한 시민으로서 다리를 건너왔던 사람이지요. 물론 다양한 문화계가 존재하고 제가 그 모든 분야를 체험했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다만 제가 하고 싶은 일은 서로 다른 문화예술콘텐츠 업계라도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들이 분명히 있어요.
처우 개선 같은 것. 저를 작가님이라고 불러주셔서 감사하지만 저는 크리에이터는 아니에요. 창작자는 아니지만, 창작자가 없이는 아시다시피 예술품이 만들어질 수 없고 그것은 예술뿐 아니라 컨텐츠도 마찬가지죠.
창작자의 처우 개선 없이는 그들이 사라져버리게 되요. 먹고 사는 게 먼저인 게 맞아요.
문화가 있기 위해서는 그들이 먹고 살 수 있어야 하거든요. 물론 크게 성공한 예술인들도 분명히 있지요. 한류라는 말은 이미 전 세계가 알고 열광하는 성공적인 우리의 원천이고요. 저한테 선생님께서 전에 문자를 보내주신 것처럼 “아직 햇볕을 단 한번도 받지 못한 체 흙 속에 묻혀 있는 곳까지 빛을 비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라는 글 기억하세요? 제가 그 말을 정말 새겨서 갖고 있습니다. 일기장에 적어 놓았습니다. 그렇듯이 아직 빛을 한 끗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특히 정치인이라면 약자를 중심에 두어야해요. 단발성이 아닌 꾸준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또한 되풀이되는 갑을관계의 불공정은 풀어야할 가장 중요한 숙제입니다. 어디서부터 발생하는 것인가의 본질적인 문제, 어떤 것으로 인해 개선 되지 않는 것인가? 손댈 수 없는 카르텔이 존재하는 거은 아닌가? 모두 살펴봐야 합니다. 그 이후에 이것을 정책화하고 입법화하는 것을 제 임기 동안하나라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기자: 훌륭한 희망이 꼭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의원: 덧붙이면 그러한 개선은 예전부터 움직이고 있어요. 사회가 침묵만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를 다루는 기관들도 있습니다. 다만, 실제적 문제는 작동하고 있는가입니다. 또 하나는 먹고만 살 수 있게 하는것이 예술을 위한 일인가? 생각하면 이 역시 시대착오적이지요. 자신이 만든, 탄생시킨 원저작물과 지식재산권으로 예술인들도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예술인은 가난해도 괜찮다’라는 말은 더 이상 듣고싶지 않습니다. 그런 사고는 이 사회의 다른 산업에서는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왜 예술인들에게만 그 시대착오적인 잣대가 적용되야하는것이지요?
지식 재산권은 만든 사람의 저작권인데, 그것이 요즘은 대기업의 플랫폼으로 많이 치우쳐져 있죠. 개인에게 돌아가지 않고요. 자기가 역할을 했으면 그만큼의 권리와 책임도 있는데, 권리를 받을 수 있는 구조가 상생의 시스템입니다. 개인도 제작사도 플랫폼업체처럼 부자가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자: 아름다운 모습의 의원님께서 마음도 평등사상에 맞추어 강한 의지를 보여주시는 아름다움이 있으시군요. 명상수업에 오셨었는데 불자님이시지요?
의원: 어머님께서는 확실한 불자이십니다.
어머니 가장 친한 분이 스님이 되셨고. 제가 어릴 때 이모라고 불렀던 분께서 강화도의 조계종 소속 절에 계세요. 어릴 때 엄마따라 절에 가면 종교적인것보다는 친근하게 자주 드나들 수 있는 편안한 곳이었죠 이모네집 가듯이요
기자: 영세를 받으셨다면서요? 그건 또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셨습니까?
의원: 고등학교 때죠. 궁금한 게 아주 많았을 때였던 것 같아요. 이런 말을 해도 될까요? 서점에 가서 손금책도 봤고요. 프리다 칼로에 빠져서 그 책을 계속 읽기도 하고. 예술에 빠져 있기도 하고. 그리고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생각도 했었고요.
그러던 와중에 가장 친한 친구가 천주교였어요. 같이 성당을 한 번 갔는데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느낌이. 그래서 몇 번 같이 따라다니다가 종교를 가져볼까? 그때까지는 제가 불교다, 천주교다, 기독교다 이런 개념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열심히 공부를 해서 세례를 받았는데 제가 모태 신앙인도 아닌데다 부모님께서는 불교를 믿으시니 환귀본처랄까요? 불교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삶에 대한 숙고를 하다보니 스스로 절에 다니게 되었고. 마음이 무거울때나, 고민이 깊을 때는 길상사에 자주 갔어요. 다른 절들도 발길이 닿으면 갔고요. 그러면서 다시 불교로 왔고, 최근에 봉은사에서 수계를 받게 되었어요.
기자: 수계 받으셨다는 말씀을 듣고 참으로 기뻤습니다. 불명이 여여진이라고요.
의원: 네. 그동안 운전을 하다보면 어느새 절에 다다를 때가 많았고 부처님 전에 앉아서 삼배를 올리거나 108배를 할 때도 있었고, 혼자 가만히 고요히 앉아 있다 오기도 했고요 그랬던 제가 드디어 불자가되었습니다.
성당에 다닐때는 무언가를 이루어 주십사 기도했다면, 절에서는 먼저 제 마음이 이렇습니다 털어놓는 고요한 순간들이었습니다. 때로, 원하는 마음에 갈등이나 괴로움이 생기면 그 원함이 바른 것인지 성찰하게되고 그 성찰이 잘못된 것이라면 내려놓을 힘을 갖게되기를, 잘된 일이라면 어려워도 밀고 나갈 힘을 갖게되기를 했으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름 따르고 있었으니 계를 받는 것은 당연을 넘어 가피입니다.
기자: 예술인이신데 요즘 하시려는 작품이 있으시면...
의원: 의외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는 영화를 전공했어요. 더 정확히는 영상 영화요. 거기에는 애니메이션도 포괄되지만 영화를 더 좋아했어요. 그 이유로 다큐멘터리를 제작 했었고요. 제가 사업하기 전에는 한 10년 정도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그 전에는 아버지께서 자신의 회사를 운영했을때라서 아버지가 만드시는 애니메이션의 기획을 하기도 했어요,
그 작품은 MBC에서 방영 했던 작품입니다. 다큐멘터리 재작은 작년에 ‘연해주에 남겨진 별들’ 이라는 SBS 8.15 특집극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습니다. 모든 것을 던지고 연해주에서 고생했던 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기자: 고려인들 말입니까?
의원: 네, 맞아요. 2부작으로 ‘나는 고려인이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셨던 최재영 선생님에 대해서 다루는 것을 1부로 해서 다큐멘터리 제작을 했습니다. 현재도 제작하고 있는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제가 곧 회사를 사임을 해서, 끝까지 참여를 못할 것 같습니다. 현재 편집 중입니다. 세월호에 관한 다큐멘터리구요. 세월호가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그 동안 만들어졌던 다큐멘터리와는 다르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진도’라는 곳에 대한 이야기와 연결된 소재입니다. 만약 그 불행하고 참담한 사건이, 진도가 아니 곳에서 일어났다면이라는 생각으로 기획되었어요. 만들면서 조사하고 지질학자들, 연구인들, 학자들을 만나면서 알게 된 것이 ‘진도’는 죽음에 대한 무척 독특한 시선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 무속신앙도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고요. 한순간에 슬픔의 섬이 되어버린 진도가 그 죽음을 배척하지 않고 자기네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를 쫓아가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우리가 애통한 죽음 앞에 하나의 인간으로써 적어도 보여야할 일말의 태도, 예의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영작으로 올해 첫 번째로 개봉하는 작품인데 아시다시피 지금 코로나 때문에 전주 영화제가 한 달 미루어졌어요. 그 찬라에 제가 갑작스럽게 비례 대표가 되고 당선인이 되면서 아마 개봉할 때쯤에는 제가 제작자로서는 물러나 있는 시점이 되지 않을까싶습니다.
유정주 의원과 아버지 유성웅 감독
기자: 아, 그런 작업을 마무리하고 계시군요. 어떤 계기로 아버님, 그리고 따님까지 애니메이션을 하시게 되었는지요?
의원: 먼저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에 대해 말씀 드리면,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가 좀 슬퍼요. 어떻게 보면 일본이 애니메이션 강국이죠. 그런데 60년대에 한국도 일본과 같은 시기에 최초의 애니메이션을 시작했어요.
한국에는 신동원 선생님, 신동우 선생님 두 분. 형제분이 계셨는대 두 분이서 ‘홍길동 전’이라는 최초의 한국 애니메이션을 만드셨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자료들만 봐도 굉장히 세련되고 잘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가 아카이빙이라고 할까요? 보존에 대한 중요성이 전무했지요. 따라서 온전히 남아있지는 않아요. 고귀한 보석인데 말이지요. 정말 중요한 자산이 되었을 텐데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때부터 저희 아버는 1세대로, ‘홍길동전’에 스텝으로 들어가셨었고요. 그때 스텝으로 있었던 분들이 프로덕션을 차려서 나온 회사가 있었어요.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대원’ 저희 아버지는 신원프로덕션이셨고. 또 하나는 세영이라고 있었고요. 그 밖에 한 두 개 회사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좋은 회사들이 있었는데 창작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어요. 다시 돌아가서 첫 번째 애니메이션 창작이 탄생을 한 이후에 한국은 품질로 보아도 일본보다도 앞 선 작품을 만들어 냈어요. 그것이 바로 ‘홍길동전’입니다. 그러나 일본과 우리나라의 차이가 그 시점부터 벌어지게 됩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국가적으로 굉장한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육성이 전혀 되지 않았고 오히려 평가절하되었어요. 기억 나실지 모르겠지만 만화가 유해하다고하여 불태우던 시절이었어요. 애니메이션도 만화와 마찬가지로 유해하다는 낙인이 있었지요. 그러면서 창작 애니메이션은 없어지고, 일본애니메이션을 수주받기 시작했죠. 일본에서 기획한 것을 우리나라로 보내주면 우리나라에서 프로덕션, 즉 그림은 다 그려서 다시 일본으로 보내는 거예요. 지식재산은 일본에 있고 한국은 공장 역할을 한것이지요. 저희가 어렸을 때 보고 자랐던 많은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사실은 한국에서 그림이 그려진 애니메이션이었어요. 또 그 반대로 우리는 한국 애니메이션이라고 보고 자랐던 것들이 알고 보니 나중에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는 것을 알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기억도 있죠.
그 시절부터 아버지는 계속 애니메이션을 하셨고요. 그리고 88올림픽을 기점으로 해서 잠시 창작의 붐이 일어났어요. 그때 하신 작품이 ‘떠돌이 까치 3편’ ‘머털도사’ ‘아리수변 꿈나무’ ‘쿵턱쿵 이야기 주머니’ 등등 많이 하셨습니다. 물론 일본과 미국 애니메이션을 받아 프로덕션만 하는 일도 계속하셨고요.
그리고 다시 창작이 주춤했죠. 그러다가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뽀로로’ 말 그대로 대박이 난 애니메이션이 나오면서 창작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만, 유아용(미취약아동)에 국한되었고 아동용으로까지도 넘어오지 못했어요. 다양한 타겟층으로의 저변 확대는 여전히 한국 애니메이션이 넘어야할 과제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지금도 아동과 가족용 애니메이션은 일본 애니메이션과 미국 애니메이션으로 점철되어 있어요.
애니메이션이 아이들을 위해서 굉장히 좋은 컨텐츠이고 분야이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창작자 입장에서는 다양한 것들을 구현해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장이예요. 성인을 위한 애니메이션도 있을 수 있고. 영화만큼 굉장히 많은 소재, 웹툰처럼. 다양하게 구현될 수 있지요. 애니메이션 산업으로 뛰어들게 되는 구심점이 되지요. 거기서부터 인력 양성도 이루어지는 것이고요.
이런 부분들에 있어서도 좀 개선이 저는 필요하다고 봐요. 사람들의 생각과 의식의 변화, 산업을 키우는 자본들이 좀 더 용기와 실험을 해봐야 하지요. 한국에 애니메이션 시장이 없다고 말하는데 아닙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나 일본 애니메이션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천만 관객을 돌파하잖아요. 인터넷, 디지털 그리고 뉴플랫폼에서 소비되는 애니메이션도 엄청납니다. 그런데 정작 제작자들은 가난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자: 불공정함이 있다면 바꾸시리라 믿습니다.
의원: 네. 우선 정확히 어느 지점에 문제점이 있는지 알아봐야 해요.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이 쟤 큰 일 내겠네, 이럴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 부분을 숙제로 안고 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부터 애니메이션보다 영화를 더 좋아하게 된 계기도 환경에 있어요. 아버지가 애니메이션 제작을 하면서 몇 번의 위기를 넘기는 것도 보았고, 제작일로 밤샘작업에 출장도 잦았으니 괜히 밉기도 했지요. 애니메이션이. ^^
영화는 그에 비해 편안하고 즐기는 마음으로 푹 빠져 볼 수 있었고요.
말하다보니 이래저래 많은 영향을 받았네요. 아버지로부터....
이번에 비례 대표로 간 것도 마찬가지로 제게 주어진 일에서 할 일을 찾을 것입니다.
기자: 불교적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의원: 충분히 가능하겠습니다. 그리고 불교뿐 아니라 한국에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가능하겠지요.
원소스-멀티-(유즈)라고 말하는데, 하나를 만들면 그걸 게임으로도 가고, 책으로도 연결이 되고 캐릭터로도 만들어지고 이것을 부가산업가치라고도 불러요. 그게 지금 가상현실이라고 VR, AR 기술들이 나오고 디지털 시대로의 가속화도 이루어지고 있어요. 비대면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문화를 관람하는 시대가 당장 지금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VR, AR 같은 기술 자체가 컨텐츠인 줄 알아요. 그건 기술이에요. 거기에 애니메이션의 이야기를 담는다든지, 스토리를 접복한다던지, 다른 예술과 문화콘텐츠와 접목 시켰을때 비로서 콘텐츠가 되는 겁니다. 우리의 지식 재산이 되는 거죠.
기자: 아, 애니메이션 보면서 명상을 하는 것도 가능하겠네요.
의원: 그렇죠. 머털 도사랑 만나서 누덕 도사님한테 혼도 나고 그럴 수 있는 거에요.
기자: 기대됩니다. 부처님을 그리고 제자들을 애니메이션으로 그것도 3D로 명상을 하면서.....
의원: 그때서야 바로 VR, AR도 기술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차별화된 예술 작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식재산의원회에 민간 위원으로 일할 때 제가 가장 강조했던 부분이기도해요, 시스템이라는 건 어느 다리의 한 부분이 끊겨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이어져 있어야 되는 거죠. 그러한 중간 중간에 끊어진 다리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도 제 역할이라고 저는 보고 있어요.
기자: 그러하신 당신은 누구입니까.
의원: 저요? 그 질문할 줄 알았는데 비워두고 왔습니다.
인터뷰 날짜: 5월 2일,
장소: 삼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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