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1년간 가동을 멈춘 러시아 상트페테부르크 현지 공장이 카자흐스탄 기업에 매각될 것이라는 현지 언론의 보도가 나오자, 지난 10일 “결정된 바가 없다”고 공시했다. 현대차는 이날 공시를 통해 “시장 환경 변화에 따라 다양한 시나리오가 있을 수 있지만, 현 시점에서는 정해진 것이 없다”고 밝혔다.
현대차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사진출처:현대차 홈페이지
현대차의 상트 공장 유지 여부는 이제 한-러 양국에서 '뜨거운 감자'가 된 느낌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미국과 유럽, 일본의 세계적인 자동차 브랜드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러시아를 떠나갔지만, 현대차는 시장의 환경 변화를 기대하면서 지난해 10월 생산 시설을 '봉인'(러시아 현지 표현으로는 '보존'·консервация)하고, 올해 들어서는 인력 구조조정을 통해 손실 규모를 줄여왔다. 지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으로, 러시아 자동차 시장이 크게 출렁거릴 때 썼던 그 영업 전략이다.
다행히 현대차의 '버티기 전략'은 성공했고, 2020년에는 연산 10만대 규모의 GM 러시아 공장까지 인수해 제 2의 도약을 꿈꿨다. 전쟁이 터지기 전인 2021년 기준으로 현대차와 기아(차)의 러시아 판매량은 모두 38만대 규모로, 수입차 중에선 1위를 달릴 정도로 입지를 탄탄하게 굳혔다.
하지만 전쟁의 끝이 보이지 않으면서 한-러 양국에서 '버티는 게 최고의 전략이냐'는 의문이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현대차 공장이 가동을 멈추면서 계열사 현대모비스의 러시아 모듈·부품 공장을 비롯, 현지에 진출한 부품 협력사들의 생산시설도 1년 가까이 문을 닫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시(市)와 러시아 통상산업부 측도 공장 문을 마냥 닫아놓고 있는 현대차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현대차 상트 공장의 미래에 대한 현지 언론의 보도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 당국의 공장 가동 재개 압박으로 해석된다.
현대차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모습/사진출처:현대차 홈페이지
현대차 상트 공장의 매각설이 나온 것은 지난달 27일이다. 타스 통신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키릴 솔로베이치크 상트페테르부르크시 산업정책, 혁신 및 통상위원회 위원장은 "시 당국이 현대차 공장 매각을 위해 카자흐스탄과 협상 중"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구체적 협상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나흘 후인 3일 드미트리 체르네이코 상트페테르부르크시 인구, 노동및 고용위원회 위원장은 "현대차의 구조조정이 마무리됐다"고 발표했다. 현대차는 올해들어 한달여에 걸쳐 2천여명에 이르는 근로자에 대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어 7일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재 3개 외국 자동차 공장이 올해안에 재가동 혹은 이전될 수 있다는 '로시스카야 가제타'(RGRU)의 보도가 나왔다. 이 신문에 따르면 일본 닛산의 상트 공장은 중국 측 파트너의 협력을 얻어 러시아 브랜드 '라다' 자동차를 생산하는 아프토바즈로 넘어갔다. 라다 자동차의 생산이 가시권에 들어선 셈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당국:생산 중단한 페테르부르크 자동차 공장 3곳, 연내에 재가동할 수도/로시스카야 가제타(RG) 웹페이지 캡처
연산 10만대 규모의 일본 도요타 자동차의 상트 공장은 현대차와 마찬가지로 '보존'(консервация) 절차와 구조조정을 끝냈다. 그러나 솔로베이치크 시 산업정책, 혁신 및 통상 위원회 위원장은 "도요타 공장이 소유한 미사용 부지를 상트페테르부르크시로 이전해 산업단지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대차 공장의 매각설보다는 말의 수위가 낮다고 할 수 있다. 다만, RGRU는 도요타 공장의 재가동이 늦어지고, 생산시설의 확장은 물 건너가는 듯하다고 진단했다.
현대차의 미래에 대해서는 RGRU가 의문표를 달았다. 현지 자동차 전문가 데니스 가브릴로프는 RGRU측에 "현대차 공장은 아직 대기 상태"라며 "한국 자동차 브랜드는 유럽이나 다른 아시아(일본) 브랜드처럼 러시아 시장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근 지역에 형성된 대규모 부품 공장 단지도 끝까지 버틸 수밖에 없는 이유의 하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시는 전쟁 전에 철수한 미국의 GM 자동차 공장은 현대차로 넘겼고, 포드 자동차 공장은 주방가구 회사에 매각했다. 도요타나 현대차가 철수할 경우, 비슷한 길을 걸을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그 이전 과정에 소요되는 비용을 감안하면, 상트페테르부르크시 당국은 어떻게든 공장을 유지하고, 재가동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닛산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현대차가 당장 손해를 본다고 해서 철수할 경우, 그동안 닦아놓은 러시아 시장을 포기해야 한다. 또 전쟁이 끝난 뒤, 러시아로 다시 진출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지출이 발생할 수도 있다. 러시아 정부에 의해 비우호국가로 지정된 우리나라 기업들은 자산을 매각할 경우, 반값이하로 팔아야 하고, 매각 대금의 10%를 세금 명목으로 러시아 정부에 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차 상트 공장과 GM공장 등을 소유한 러시아 법인의 총 자산은 지난해 3분기 기준 2조4,984억원에 이른다. 현대차가 러시아 법인을 정리한다면, 앉아서 1조원이 넘는 돈을 허공에 날리는 셈이다. 현대차 입장에선 매각하는 것보다 기다리는 게 더 좋은 선택일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으니, 현대차의 고민은 깊어질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