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길을 묻는다
허 열 웅
삶은 길 위의 순례이다. 지난 5월 충북에 있는 괴산호의 둘레를 돌게 되어 있는 산막이 길을 걸었다. 이 길은 물도 보고 산도 같이 느낄 수 있는 수륙양용水陸兩用의 길이다. 넓은 호수를 옆에 두고 걷다보니 산의 기운과 물의 기운을 양쪽에서 동시에 받아 균형을 잡아주어서인지 발걸음이 더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길은 음기도 받고 양기도 받는 셈이다. 이런 곳에서의 사색은 결국 생각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고 그 균형은 이런 길을 걷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원래 괴산호수 일대는 조선시대 노론 명문가들의 야외정원이었던 구곡문화九曲文化의 중심지였다. 산의 모양도 문필봉文筆峰이라 풍수지리학 적으로 인물이 많이 나올 산세라고 한다.
“그대는 길을 아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야, 저 강과 언덕 사이에 있다네.” 1780년 여름, 생애 처음으로 압록강을 건너면서 연암 박지원이 던진 말이다. 길이란 쉼 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무언가 생성되는 것, 그것이 곧 길이다. 떠남과 머무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끊임없는 갈림길에서 선택을 하여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우리네 삶이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떠나면서 인생을 돌아본다.
요즈음 사람들이 많이 걷는 길을 따라가 본다. 제주도의 올레길은 대부부분 바닷가를 끼고 길이 나있다. 가슴이 탁 트이는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걷다보면 정신적 스트레스가 해소가 된다. 그래서 우울증이 있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멀리 지리산이나 서울의 남산 둘레와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은 가족이나 연인에게 좋다. 숲속 길은 치유와 명상의 공간으로 성큼 다가온다. 숲이 주는 청량감과 싱그러움, 맑은 공기, 공기 속 비타민 피톤치드를 마음껏 마시다보면 심신의 안정을 찾고 일상의 고단함을 털어낼 수 있다. 도성을 둘러싼 길 따라 걷노라면 성벽 바위틈에서 새어나오는 역사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한 조각의 깨어진 기왓장에서도 조상의 흔적과 솜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길 위에서 길을 묻는다면’ 로버트 프로스트 시인처럼 가보지 못해 후회하는 길일 수도 있다. 누군가가 걸어 들어간 어렴풋한 흔적만 남아있는 오솔길이 있는가 하면 제주도 올레길 따라 너도나도 방방곡곡 새로 만든 길도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 하던 역사의 말발굽소리 요란하던 검은 돌 깔린 길도 있고, 오직 고속으로 300 km 까지 달릴 수 있는 독일의 아우토반도 있다. 최근엔 시리아를 비롯한 나라들의 내전으로 인해 난민이 숨어서 걸어온 험난하고 고달픈 피난길도 있다.
집시가 부르던 노래의 여운이 남아있는 유랑流浪의 길도 있고, 미당의 시가 흐르는 질마재 고갯길도 있다. ‘카미노(좋은 길)’라 불리는 프랑스의 생장피드포르부터 스페인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장장 800 km의 멀고 먼 순례자의 길도 있다. 피 끓는 학생들과 민초들이 민주화를 이룬 대학로 길과 광화문 길도 있다. 초등학교 시절 코스모스 한 송이 꺾어 좋아하던 소녀에게 수줍음을 함께 건네주던 염소가 매어있던 시골길도 있다.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보기위해 넘나들던 새재, 박달재도, 달빛 아래 메밀꽃이 흐드러진 언덕을 넘던 소장수 허생원의 옛 길도, 이성계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정복의 길을 가다가 회군하여 왕이 된 병사의 길 등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세상엔 본디 막다른 길이 없기에 없는 길도 만들어 가는 사람도 있다.
‘길에서 길을 잃는다면’ 깨달음의 길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나라로 수행 길을 가던 원효가 묘 마당에서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득도하여 돌아온 길도 있다. 영국의 수도사 월리암이 연쇄살인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절벽 위에 있는 수도원을 향해 가는 눈 덮인 길도 있다. 엊그제 길을 나선 것 같은데 뒤 돌아보니 아득하기만 하다. 일찍 출발했다고 생각했는데 앞서 가는 사람도 많고, 끄트머리인 줄 알았는데 뒤에도 줄줄이 따라오는 이는 더욱 많다. 가는 길이 어디쯤인가 잘 몰라 머뭇거렸는데 이제는 알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시인처럼 올라갈 때 보이지 않던 나무나 꽃들이 내려올 때 너무 아름답게 보이는 길이다. 섭섭했던 사람들보다 고마운 사람을 더 많이 만나는 길이다. 가족과 친구와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하는 길이기도하다. 어떤 일을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공자님의 종심從心의 길도 있다.
‘神만이 알 수 있는 길도 있다.’ 인간의 원죄를 한 몸에 지니고 간 십자가의 골고다 언덕길이 있다. 물처럼 흘러가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유한한 생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영원하고 무한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의 길도 있다. 죽음이란 인간이 걷던 길이 끝났다는 의미이고 육체와 혼이 분리되는 길이다. 지난 세월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깜박 졸다 깬 것 같은 순간이었는데 평균수명이라는 종착역이 얼마 남지 않았다.
머지않아 인생이라는 열쇠를 받았다가 반납하러 가는 길은 신이 베푼 마지막 선물일 것 같다. 죽음 앞에선 독했던 사람들이 유순해지고, 거만해 보이던 사람이 겸손해지고, 요지부동 불통의 사람들이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길이다. 그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서툴고 어리석어 후회와 아쉬움만 가득한 길이었다. “본디 땅위에는 길이 없다. 누군가 다니면 길이 된다.” 는 루쉰魯迅의 말처럼 오늘도 내가 가는 곳이 곧 길이 될 것이다. 뒤돌아보니 살았던 날들이 모여 길이 된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알았다. 그 길에서 또 길을 물어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