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1) 연재를 시작하며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선교사가 본 100년 전 조선의 모습
-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소멸되고 있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를 글과 그림·사진과 영상으로 담아 유럽에 소개했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선교 박물관에 비치된 베버 총아빠스 사진. 창틀 앞에 놓인 그의 사진이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선교 문화적 시선을 묵시적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독일 선교사의 시선으로 바라본 조선
한자어 ‘사진(寫眞)’을 우리말 그대로 옮기면 ‘진실된 것을 베끼다’라는 뜻이다. 곧 인물이나 사물의 형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는 풀이다. 영어로는 ‘Photography’라고 한다. 이는 헬라어 ‘φωτοs(포토스, 빛)’와 ‘ζραφη(그라페, 그림)’의 합성어로 우리말로 ‘빛으로 그린 그림’ 또는 ‘빛으로 그림 그리기’로 풀이된다.
하지만 사진은 낱말 뜻처럼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필름이나 파일에 담는 것은 아니다. 사진가의 시선으로 본 피사체만이 그 프레임 안에 담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진은 결코 피사체를 객관적으로 찍는 것이 아니라 사진가의 주관적인 감정이입이 된 피사체만을 담는다고 하겠다.
앞으로 연재할 사진들은 한 세기 전, 곧 1920년대에서 1930년대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선교사들이 그들의 시선으로 조선을 바라본 사진들이다. 그들의 시선은 단순하다. ‘복음 선포’와 ‘선교지 문화에 대한 개방성’이다. 이들이 조선 땅 구석구석을 돌며 우리 민족의 생활 풍속을 사진으로 담은 까닭은 복음을 전하는 이와 복음을 수용하는 이가 서로 많은 영향을 받기에 상대 문화에 대한 존중과 개방성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사진들은 조선으로 파견되는 선교사들의 훌륭한 교육자료였다. 선교사들은 조선으로 오기 전부터 사진과 영상을 통해 우리 문화를 누리고, 우리 심성에 맞게 하느님을 선포하기 위해 불교와 민간 무속신앙을 이해하고, 한국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심성을 배양했다.
이는 선교 베네딕도회인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의 특별한 정신이기도 하다. 선교 베네딕도회가 이러한 전통을 쌓아가게 하는 토대와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이가 바로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 총아빠스다. 그는 선교지 토착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더 깊이 이해하려는 지적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이는 선입견 없는 관용의 마음이 그대로 표현된 관심이었다. 그래서 그는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 조선을 방문한다.
- 선교 베네딕도회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는 복음 선포와 문화의 개방성을 토대로 한국의 생활 풍속을 사진에 담았다. 노르베르트 베버, ‘초례청’, 유리원판, 1911.
베버 총아빠스, 여행기 · 기록 영화도 제작
제1차 한국 방문은 1911년 2월 21일부터 6월 25일까지 약 4개월 동안이었다. 그는 서울 일대와 경기도·충청도·평안도의 명소 및 파리외방전교회 선교 지역을 방문했다. 이 여행에서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 문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일제에 의해 소중한 문화가 소멸하고 있는 현실을 목격했다. 이를 너무나 안타깝게 여긴 그는 한국의 역사와 사회·문화와 종교, 선교 역사를 독일과 유럽 사회에 전달하기 위해 1915년 여행기 「고요한 아침의 나라」(Im Lande der Morgenstille)를 출간했다. 468쪽에 달하는 이 책에는 글과 함께 300여 장의 사진과 직접 그린 수채화와 스케치·지도 등을 담았다. 여행 중에 적은 일기를 바탕으로 저술된 이 책은 1910년대 중반 한국 문화를 유럽에 자세하고 깊이 있게 알렸다는 점뿐만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높은 민속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독일 뮌헨대학교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베버 총아빠스의 제2차 한국 방문 기간은 1925년 5월 14일부터 9월 27일까지였다. 1911년 제1차 방문 때 이미 일제에 의해 한국 문화가 말살되고 있음을 목격했던 그는 영상 카메라를 들고 방한해 기록 영화를 찍었다. 이 영화 제작은 베버의 한국 문화 보존 업적 가운데 가장 높게 평가된다. 이때 촬영한 필름으로 제작한 영화가 ‘한국의 결혼식(Eine koreanische Hochzeit)’과 ‘고요한 아침의 나라(Im Lande der Morgenstille)’이다.
‘한국의 결혼식’은 1920년대의 서민 결혼식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선교 박물관 수장고에는 당시 신랑·신부와 하객들이 입었던 혼례 예복들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이 영화의 촬영 장소는 함경남도 안변군 소재 내평성당이다. 베버 총아빠스는 본당 주임 카누토 다베르나스 신부의 도움으로 갓 결혼한 신혼부부에게 후한 사례비를 주고 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당시 결혼식 모습을 필름에 담았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당시 서울 일원과 농업·수공업·춤·농악·미신·혼인·장례·불교·금강산 풍경 등 한국 문화 전반에 걸친 주제들과 선교사들의 활동을 담은 종합편이다. 특히 서민의 일상을 서사적으로 표현했다. 짚신 삼기·베틀 짜기·옹기 굽기 등 수공업 분야의 손놀림을 정교하게 촬영한 이 영화는 독일 문화인류학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이 영화는 1920년대의 조선 풍속이 수록된 최초의 35㎜ 무성 기록영화라는 데 그 의의가 크다. 1927년 6월 3일 뮌헨 인류학박물관에서 이 영화가 최초로 상영됐고 언론의 좋은 평을 받았다. 이 영화는 1927년부터 1930년까지 독일 남부 100여 개 마을과 바이에른 주·헤센 주·라인란트-팔츠 주 인문계 고등학교,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상영됐다.
- 허리를 숙여 카메라에 유리건판을 갈아 끼우는 베버 총아빠스. 원산대목구 소신학교 신학생들의 야외 수업을 촬영하기 위한 준비 장면으로, 그 모습을 안셀로 로머 신부가 바라보고 있다. 필름(음화), 1925.
사라져가는 한국 향해 ‘대한 만세’ 작별인사
아울러 베버 총아빠스는 1925년 6월 2~12일 카누토 다베르나스 신부 및 헨켈씨 부부와 함께 금강산을 유람한 후 1927년 독일에서 「한국의 금강산에서」(In den Diamantbergen Koreas)를 출간했다. 이 책에 그 유명한 ‘겸재화첩’ 속 금강산 그림 세 점이 흑백으로 실려 있다.
베버 총아빠스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마지막 장 조선을 떠나던 날의 이야기에 ‘대한 만세(Taihan manse)’라는 제목을 달았다. “우리는 사라져가는 이 나라를 향해 애써 ‘대한 만세’라고 작별인사를 보낸다. 한 국가로서 이 민족은 몰락하고 있다. 마음이 따뜻한 이 민족에게 파도 너머로 작별 인사를 보낸다. 나의 심정은 착잡하다. 마치 한 민족을 무덤에 묻고 돌아오는 장례 행렬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그는 또 영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다음과 같이 자막을 달았다. “1911년 내가 그리도 빨리 사랑에 빠졌던 한국과 이별할 때 작별의 아픈 마음으로 대한 만세를 불렀다.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넘게 지났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한국과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함께 가져오게 되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조한건 신부)와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이사장 김정희)은 2021년부터 2022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사진을 조사 연구해 1874점의 사진을 고화질 파일로 담아왔다. 두 기관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번 연재를 시작한다.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2) 전통 혼례식 (상)
사모관대 혼례복 입은 신랑, 흰말 타고 말없이 신부집으로 초행
- 노르베르트 베버, ‘신랑의 초행’, 1925년 함경남도 내평,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25년 갓 결혼한 신혼부부 혼례식 연출
선교 베네딕도회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해 우리의 전통 혼례를 촬영했다. 그는 먼저 1911년 5월 21일 안중근(토마스) 의사 일가가 살고 있던 황해도 청계동성당을 방문해 그 집안의 혼례식에 초대받아 촬영했다. 그리고 1925년 함경남도 안변군 내평성당을 방문해 갓 결혼한 신혼부부에게 사례비를 주고 혼례식을 연출했다.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의 전통 혼례식을 볼 수 있어 매우 들떴다. 그는 혼례식에 가면 손가락은 젓가락질을 익히기에 여념이 없을 것이고, 연필은 피곤하도록 바삐 움직일 것이며, 카메라에 담아야 할 흥미진진한 일들이 풍성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우리의 전통 혼례는 의혼·납채·연길·납폐·초행·전안·교배·합근·신방·신행·현구고례·묘현·근친 순으로 절차가 복잡했다. 혼례의 첫 절차인 의혼(議婚)은 말 그대로 중매자가 신부 집으로 찾아가 혼담을 나누는 과정이다. 중매자는 신부 집안의 의중과 조건을 알아 신랑 집에 알린다. 의혼 과정에선 혼인 당사자의 나이, 동성동본 여부, 집안 사정과 가풍, 지병 등을 주로 확인했다. 양가가 혼담 내용에 만족하면 청혼서와 사주단자·허혼서를 주고받는다. 이를 납채(納采)라 한다. 그리고 길일을 택하는 연길단자(涓吉單子)도 전한다.
이렇게 혼약이 이뤄지면 신랑 쪽 함진아비가 신부 집안으로 혼수와 혼서지(婚書紙)를 전하며 “함 팝니다”라며 납폐(納幣)를 한다. 이어 신랑은 혼례복을 입고 함진아비와 함께 신부집으로 초행(初行) 걸음을 한다. 신부집에 들어간 신랑은 맨 먼저 신부 부모에게 기러기를 드리는 전안례(奠雁禮)를 한다. 이를 위해 신부집에서는 미리 대문 안 적당한 곳에 전안청(奠雁廳)을 차려놓는다. 멍석을 깔고 두른 병풍 앞에 작은 상을 놓고 상 위에 붉은 보자기를 덮어놓는다. 신랑은 기러기를 전안상에 놓고 큰 절을 두 번 한다. 신부 어머니는 신랑이 절하는 사이에 기러기를 치마로 받아들고 신부가 있는 안방에 던진다. 이때 기러기가 누우면 첫 딸을, 일어서면 첫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이어 신랑과 신부가 선 채 서로 맞절을 하고(交拜, 교배), 술잔을 주고받으며 혼인 서약(合巹, 합근)을 하며 혼례를 마친다. 혼례를 마친 신랑과 신부는 신방(新房)을 차려 첫날밤을 치른 후 앞으로 한평생을 살아갈 시댁으로 길을 나선다.(新行, 신행) 시집에 간 신부는 처음 뵙는 시부모께 폐백을 드리고(見舅姑禮, 현구고례), 3일간 시댁 사당에 가서 묘현례(廟見禮)를 한다. 묘현을 마친 신부는 시부모의 허락을 받아 친정 부모를 뵈러 간다.(覲親, 근친)
- 노르베르트 베버, ‘묵주를 든 신부와 신부 들러리’, 1925년, 황해도 청계동,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묵주를 든 신부와 신부 들러리’ 이색적
조선 「경국대전」은 혼인 적령기를 남자는 15세, 여자는 14세로 정하고, 의혼은 13세에 한다고 규정했다. 베버 총아빠스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신부가 어릴수록 혼인 지참금이 낮아진다며 13세 처녀는 평균 150원, 19세는 300원 정도를 요구한다고 적어 놓았다. 그는 신자들도 이교적 요소만 없다면 민족 고유의 풍습을 고수한다며, 신자끼리 혼인할 때는 점쟁이가 낄 여지가 별로 없고 외형적 의례로 그치지 않고 교회의 축복도 받고 싶어한다고 밝혔다.
사진 ‘신랑의 초행’은 1925년 내평성당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신랑의 초행길에는 신랑집을 대표하는 혼주와 친척들, 함진아비, 마부와 가마꾼, 하인 등이 동행했다. “오늘은 신랑이 주인이다. 아무도 그가 가는 길을 막아서면 안 된다. 관리들도 옆으로 비켜서서 신랑 일행이 지나가도록 길을 열어 주어여 한다. 바야흐로 젊은 남자가 세상으로 나가는 첫걸음인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444쪽)
- 노르베르트 베버, ‘치장하는 신부와 구경꾼’, 1925년, 황해도 청계동,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사모관대를 한 혼례복을 입은 신랑이 흰말을 타고 신부집에 도착했다. 초행길에 오른 신랑이 말을 하면 복이 달아난다고 해 신부집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신랑의 초행’ 사진에 담긴 주인공도 입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묵주를 든 신부와 신부 들러리’ 역시 좀처럼 보기 드문 사진이다. 신부로 추정되는 왼쪽 여성은 쪽머리를 하고 가슴을 웃도는 짧은 삼회장저고리에 흰색 허리말기가 달린 치마를 둘렀다. 들러리로 소개된 오른쪽 여성은 일본 메이지 시대 말기에 유행했던 히사시가미(ひさしがみ) 머리 모양을 하고 쓰개용 장옷을 입었으며 앞부리와 뒤꿈치에 구름무늬를 새긴 운혜(雲鞋)를 신고 있다. 1930년대에 쓰개치마와 장옷은 폐기됐으나 1950년대까지 남쪽 지방에서는 서민 혼례복으로 사용됐다. 장옷을 입은 여인은 들러리라고 소개되고 있지만 아마도 신부의 어머니가 아닐까 한다.
‘신부 치장’은 툇마루에서 치장하고 예복을 차려입는 신부의 모습을 담았다. 어린 신부가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히고 옅은 미소를 짓고 있다. 신부 곁에 몰려든 어린 소녀들과 여인들이 곱게 단장하는 신부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며 “예쁘다”고 한마디씩 거든다.
- 노르베르트 베버, ‘전안례’, 1925년, 황해도 청계동,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부부간 신뢰 상징하는 기러기 놓고 큰절
드디어 혼례가 시작됐다. 마당에 멍석이 깔리고 전안례를 위한 전안청이 차려졌다. ‘전안례’ 사진 속 흰 도포를 입고 중절모를 쓴 이가 예식 절차를 적은 홀기를 읽는 노인이다. 신랑이 전안상 위에 기러기를 놓고 큰절을 하고 있다. 병풍 너머로 노인들과 장정들이 짓궂게 웃고 있고, 그 양옆에선 어린아이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기러기는 부부간의 신뢰를 상징한다. 진짜 기러기를 못 구했을 때는 나무로 만든 가짜 기러기를 쓰기도 한다. ⋯하객들은 온갖 우스갯소리로 어떻게든 신랑 신부를 웃기려 드는데, 짐짓 그들은 진지한 얼굴로 점잔만 빼고 있다. ⋯사람들은 신랑 신부를 웃겨 보겠다고 신랑 다리 사이에 작대기를 끼워 넣는 등 별 얄궂은 짓을 다 한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445~447쪽)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4) 전통 상장례 (상)
거친 삼베로 만든 상복 입은 상주, 짚자리 위에서 문상객과 맞절
- <사진1> 노르베르트 베버, ‘상주’, 유리건판, 1911년 황해도 청계리,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주자가례」 관혼상제 규범에 따라 상장례
‘상장례(喪葬禮)’라는 말이 쓰인 것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다. 정확히 이 용어가 처음 언급된 것은 세종 10년 1428년이었다.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은 사대부에서 백성까지 「주자가례」(朱子家禮)의 관혼상제 규범에 따라 일상의 의례를 치렀다. 이 때문에 고려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성행했던 불교식 화장은 점차 사라지고 매장이 일반화됐다. 이후 일제는 조선의 관혼상제례를 인위적으로 바꾸려 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취체(단속) 규칙’을 공포해 일제의 장묘법제를 시행, 화장장과 공동묘지가 등장했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황해도 청계동과 함경남도 내평, 만주 땅 용정·팔도구 등지에서 한국의 전통 상장례 예식을 촬영했다.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한 그는 아플 때는 무당이, 임종 때는 미신이, 묏자리를 볼 때는 나침반을 든 지관이 제 몫을 한다고 소개했다.
죽음이 임박한 자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면 임종을 지켜보던 이들이 고인의 몸을 깨끗이 씻기고 안치실로 옮긴 다음 망자가 생전에 입던 저고리를 들고 북쪽을 향해 혼백을 소리쳐 부른다. 상주들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상복으로 갈아입고 곡을 하며 3일 동안 곡기를 끊는다. 그리고 관을 짜고 친척들에게 부고를 알린다. 여기까지 절차를 ‘초종의(初終儀)’라고 한다.
“환자가 죽음을 맞이하는 동안 식솔들은 환자의 넋이 저승길에 먹을 음식을 준비한다. 넋이 떠나는 순간을 위해 밥 한 사발과 물 한 사발을 미리 마련해 두는 것이다. 임종이 시작되면 임종자를 반대 방향으로 눕혀 평소에 발을 두던 곳에 머리를 두게 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더는 세상과 소통할 일도 없으리라. 발밑에는 쌀을 두는 데 쓰는 네모 통을 놓아 발을 수직으로 올려 둔다. 그 사이 임종자의 가장 가까운 식솔, 상제(喪制)는 수의를 챙긴다. 임종자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무당은 그의 이름을 세 번 부른다. ‘아무개가 이제 정말 죽었구나.’ 이때는 다들 침묵을 지켜야 하며 절대 곡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무당이 망인을 세 번째 부르면, 상제는 옷을 지붕 위로 던져 망인의 넋이 편히 떠나시게 한다. 또한, 쌀을 지붕 위로 던지며 이렇게 빈다. ‘살아생전 거친 밥만 드셨지요. 이 밥이 끝 밥이니 드시고 가시오.’ 지붕 위로 물을 뿌리면서도 그리 말한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22쪽)
- <사진2> 노르베르트 베버, ‘염하는 사람들’, 유리건판, 1925년 함경남도 내평,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11년 황해도 청계리에서 상주 모습 담아
베버 총아빠스는 고인을 애도하며 곡하는 장면을 인상 깊게 봤다. 곡(哭)은 고인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후 바로 행해진다. 곡에도 애통함을 드러내는 단계가 있다. 사실 곡은 슬픔이 북받쳐 오르면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감정 표현이지만 흐느껴선 안 된다. 「예기」 ‘잡기하(雜記下)’에 “증신(曾申)이 ‘부모의 상에 애곡할 때 일정한 소리가 있습니까?’ 물으니, 증자(曾子)는 ‘길에서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잃고 울 때 일정한 소리가 있더냐?”라고 되물었다. 그런데도 상장례 예법상으로는 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곡의 횟수가 규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곡도 ‘무시곡(無時哭)’ ‘신혼곡(晨昏哭)’ ‘조석곡(朝夕哭)’ ‘삭망곡(朔望哭)’ ‘반곡(反哭)’으로 나뉘었다. 무시곡은 임종 직후부터 빈소를 차리기 전까지 남녀가 가슴을 치며 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하는 곡이다. 신혼곡은 시묘살이를 하거나 묘소에 올라 아침저녁으로 절하며 하는 곡이고, 조석곡은 상중에 고인에게 아침저녁으로 술과 과일 등을 올리며 하는 곡, 삭망곡은 상중에 고인에게 다달이 초하루와 보름날 술과 과일·포 등을 올리며 하는 곡이다. 반곡은 장사를 지낸 뒤 혼백 혹은 신주를 모시고 집으로 천천히 돌아오면서 하는 곡이다.
“남녀 모두가 머리를 풀면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얼굴과 목을 가린다. 다들 흐느끼고 오열하고 통곡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이다. 특히 여인들은 애절한 목소리로 ‘아이고’를 길게 끌며 반복한다.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안고 망인에게 묻는다. ‘왜 가시었소? 한 세상 잘살아 놓고, 우리가 뭘 어쨌기에 그리 떠나시는 거요?’ 친족 가운데 상속권이 있는 사람만 곡을 함께할 수 있다. 곡하지 않고 멀찍이 서 있는 사람은 상속인이 아니다. 호곡이 허용된 사람은 그 사실만으로도 상속권을 인정받는 셈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23쪽)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황해도 청계리에서 상주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사진1> 30~40대 장년인 그는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다. 눈은 깊은 슬픔에 잠겨 초점을 잃은 채 카메라를 피하고 있다. 거친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새끼줄을 동여맸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양발을 가지런히 모은 단정한 모습에서 기품이 배어난다. 베버 총아빠스는 부친상을 당한 상주는 2년, 모친상을 당한 상주는 1년간 상복을 입는다고 설명한다.
염습(殮襲)은 고인의 시신을 씻기고 수의를 입혀 염포로 싸고 입관하는 절차다. 일반적으로 3일에 걸쳐 진행된다. 고인을 깨끗이 씻기고 수의로 갈아입히는 습은 고인이 운명한 날에 한다. 습을 마치면 고인 입에 구슬과 씻은 쌀을 물리는 반함(飯含)을 한 후에 홑이불을 덮고 영위(靈位)를 올려놓는 영좌(靈座)를 설치한다. 다음날 고인을 베로 싸서 묶어 관에 넣을 수 있도록 염을 한다.
- <사진3> 노르베르트 베버, ‘발인 전 문상’, 유리건판, 1911년 황해도 청계리,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25년 함경남도 내평에서 염하는 장면 촬영
베버 총아빠스는 1925년 함경남도 내평성당 마당에서 염하는 장면을 촬영했다.<사진2> 습을 마친 고인은 탁 트인 마당에 깔린 멍석 위에 놓여있다. 염포에 싸이고 있는 고인을 상주들과 친지들이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세로매로 고인의 발을 묶는 것으로 보아 염이 막 시작된 듯하다. 염포는 고인의 발, 머리, 왼쪽, 오른쪽 순서로 싼다. 수많은 사람이 이 광경을 지켜보는데 모두 남자다.
“망인의 저승길에 먹을 쌀 몇 톨을 입에 물릴 때면 ‘100섬, 200섬’이라고 소리친다. 먼먼 저승길 가실 때에 몇 톨일지언정 100섬인 양 여기시고 넉넉히 드시라는 뜻이다. 가시다가 혹여 가시에 찔리실까 봐 머리와 손발은 검은 명주로 감싸드린다. 장정 둘이 망인의 머리와 온몸에 삼줄을 두르고 힘껏 잡아당겨 묶는다. 이렇게 12번을 묶은 뒤 관에 모셔 눕히고 관 뚜껑을 닫은 다음 대나무 못을 박는다. 염습은 유족의 몫이다. 친지나 타인이 있을 자리가 아니다. 무당은 예외다. 승려도 안 된다. 승려는 한국의 전통 장례식과 아무 관계도 없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24쪽)
조문(弔問)은 상주를 위로하고 고인의 명복을 비는 의식이다. 문상(問喪)이라고도 한다. 요즘은 서양 예법에 따라 검은 옷을 입고 조문하는 이들이 많은데 원래 우리 예법은 흰옷을 입고 조문하도록 가르친다.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황해도 청계리에서 발인 전 조문 장면을 촬영했다.<사진3> 흰 두루마기를 입은 두 조문객이 짚신을 벗고 멍석 위에서 상주에게 큰절하며 조문한다. 상주는 짚자리 위에서 문상객과 맞절을 하고 있다. 상주 뒤편에는 상투를 튼 노인들과 단발을 한 청년이 지켜보고 있다. 발인 직전인지 상여 옆에 상여꾼들이 자리하고 있다.
“상복을 온전히 갖추어 입은 상제가 집 앞 짚자리 위에 서 있으면 조문객들은 한 사람씩 다가와 상제 앞에 부복하며 이마가 땅에 닿도록 큰절을 한다. ‘어른께서 이리 가시니 하늘이 무너집니다’라거나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등으로 운을 떼면, 상제는 ‘예, 이루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응답한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327~328쪽)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