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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8-21
여리고 성과 자아의 죽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을 점령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첫 번째 만난 성이 여리고 성입니다. 여리고 성은 이중 벽으로 된 아주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능력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는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성을 6일간 하루에 한 번씩 돌고 7일째 되는 날은 7번 돌라고 명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여리고를 돌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7번 돈 후에는 함성을 질렀습니다. 그러자 여리고성은 마치 모래성이 무너지듯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설교는 여리고성이 무너진 사건을 통해서 자아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이 부모에게서 태어나면 자기 부모의 것을 함께 누리게 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일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일한 사람 있나요?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공부한 사람 있나요? 먼저 누리고 일은 후에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이 많습니다. 생명, 능력, 축복, 천국 등 많은 것을 주십니다. 그 모든 것을 누리길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누리기를 원하시는 것 중에 중요한 것이 안식입니다. 안식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샤바트’로 ‘쉬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샤바트, 안식을 누리길 원하신다는 사실은 창조 사건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6일째 되는 날 가축과 짐승과 벌레들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의 하이라이트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만드신 후에 마지막에 창조하셨습니다. 시간적으로 볼 때 아마도 6일째 오후에 사람을 창조하신 것 같습니다. 사람이 창조 된 후 바로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창조 된 후에 6일을 일하고 안식일을 맞이한 것이 아닙니다. 창조 된 후에 안식일을 먼저 맞이한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여리고성이 무너진 사건을 통해서 안식을 누리는 방법을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으로 안식에 대해서 이해를 하려면 본문과 안식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안식이라는 주제로 보려면 먼저 성경 전체를 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구약은 그림자요 신약은 실재’라는 안경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안경으로 성경을 보면 성경이 이해하기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그 안경으로 보면 구약에 나오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고, 어떤 사람은 성령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믿음 생활을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이단들이 구약은 그림자고 신약은 실재라는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해서 성경 해석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이나 절기를 강조하는 이단들이 있습니다. 구약의 절기를 지키지 않으면 구원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 이단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보고 있는 자들입니다. 골 2:16,17을 보면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그림자에게 인사를 한다면 얼마나 우습습니까? 그림자는 필요 없습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도 그런 것입니다. 그림자와 실재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놋뱀이 장대 위에 달린 사건이 나오는데 요 3장에서는 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구하지 못해 죽어갈 때 반석에서 샘물이 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고전 10장에 보면 그 사건 역시 반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생수를 마시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 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서 가나안에 들어간 사건을 가지고 안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 4장에 나오는 안식은 3가지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인도에 의해서 가나안을 점령하고 가나안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믿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천국을 보여줍니다. 비록 우리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살지만 주님과 동행하면 천국에서 누릴 안식을 이 땅에서 부분적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식은 육신의 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 안에 거하는 영적인 안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죽음 후에 누리는 천국을 말합니다. 영원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천국이 완전한 천국입니다. 우리는 영원천국에서 완전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한 후에 광야 40년 생활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갔던 가나안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기업이었습니다. 수 1:2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땅은 땅의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입니다.
가나안 땅은 “구약은 그림자 신약은 실재”라는 안경으로 볼 때 믿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누릴 현세천국과 죽음 후에 들어갈 영원천국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안식을 누리며 살아갑니까? 주님 안에 거하시며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갑니까? 하나님 나라의 특징인 의와 희락과 화평이 넘치고 있습니까? 늘 마음의 괴로움 속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현세천국을 누리는 안식은 좋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눅 17:21에 보면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내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 환경이나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평안을 잃기도 하고 얻기도 합니다. 이것은 가짜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주변 환경과 주변 사람들과 상관없이 안식을 하게 됩니다. 오늘 그 비결을 함께 나누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나안에는 7족속과 31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누리려면 가나안 족속들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려면 영적인 적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을 섬멸하기 전에는 평화가 없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들의 영적인 적들을 물리치기 전에는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여리고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 주관, 내 노력으로 세상을 살고자 하는 나의 근원적인 자아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가장 먼저 만나야 했던 성이 여리고였던 것처럼 우리가 참된 안식을 누리며 현세천국을 사는데 제일 먼저 방해하는 것이 자아입니다.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자기가 무너져야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 16:24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음을 말합니다. 자기를 죽음에 넘겨주어야 참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를 죽이십시오. 자기가 살아나지 않게 하십시오. 신자들이 보통 주님을 만나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면 잠간 동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죽이고 주님으로 삽니다. 그러면서 현세천국을 누립니다. 잠시 안식을 맛봅니다. 신앙생활이 너무 행복합니다. 땅에 발을 디디고 살지만 마치 천국에서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머지않아 다시 자기가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다시 자기로 살게 됩니다. 그러면서 현세천국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안식이 사라집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아직 자아가 죽어지는 경험이 없다면 자신이 거듭난 사람인가를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죽었던 자아가 살아나지 않게 하십시오. 자아가 살아나는 것이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자아로 사는 것이 저주입니다. 수 6:26에 보면 여호수아가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고 말합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지옥입니다. 자식이 싸우기만 해도 고통스러운데 자식이 죽는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것도 2명의 자식을 잃는다면 그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를 다시 세우는 사람은 장자와 막내를 잃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왕상 16:34에 보면 여호수아의 저주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점령하고 약 500년 후 아합왕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했습니다. 그 때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습니다.
여리고를 다시 세운 히엘을 통해서 보여주는 진리가 있습니다. 히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여리고를 건축하다가 부정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서의 말씀이 실제가 되므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준 것입니다.
여리고를 건축한 히엘은 자아가 살아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고, 자신의 존귀함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엘의 맏아들의 이름은 ‘아비람’입니다. 뜻은 ‘나의 아버지는 고귀한 분이시다’라는 뜻입니다. 히엘의 영적인 아버지는 고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던 아비람이 죽었습니다. 히엘의 막내 ‘스굽’은 ‘존귀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리고를 건축하므로 존귀함이 죽었습니다. 자아가 살아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고 자기의 존귀함을 잃게 되는 일입니다.
자기가 죽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여리고 성입니다. 여리고 성은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1927년부터 7년 동안 고고학자들이 여리고를 발굴했습니다. 성벽은 2중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외벽 두께는 2m, 내벽 두께는 5m, 높이는 10m였습니다. 여리고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는 성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자아를 죽이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드리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리고가 무너지는 사건을 통해서 자기가 죽는 비결을 살펴보겠습니다.
1. 나의 자아는 이미 죽었다고 여기라.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너뜨리기 전에 이미 무너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여리고를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수 6:2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넘겨주었으니’는 과거형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여호수아의 손에 여리고를 넘겨주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는 주님 안에서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믿고 그렇게 여겨야 합니다. 성경 갈 2:20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롬 8장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육신의 생각이 사망입니까? 그건 죽은 자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서 사시는 것입니다.
롬 6:6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시제가 과거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살아있으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죽었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이 인정되어져야 내 안에 그리스도로 살 수 있는데 이걸 인정 못합니다. 이것은 마치 불신자에게 당신은 영적으로 죽었다고 하면 “무슨 소리냐 나는 이렇게 살아 있는데”라고 말하며 자신이 영적으로 죽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롬 6:11에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눈에 보기에는 내가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도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여겨야 합니다.
여긴다는 말이 헬라어로는 ‘로기조마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상업적으로는 ‘계산하다’, 법률적으로는 ‘판단하다’입니다.
위치만니가 쓴 [정상적인 그리스도의 생활]이라는 책에 보면 ‘여길지어다’를 ‘부기하다. 회계하다.’라고 해석했습니다. 회계가 뭡니까? ‘나가고 들어오는 돈을 따져서 셈함’입니다. 부기는 ‘재산의 출납·변동 따위를 밝히는 기장법’입니다.
회계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미술가가 풍경을 그립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완전히 정확하게 그릴 수는 없습니다. 역사가가 역사를 기록합니다. 절대적 정확성을 보증할 수 없습니다. 지도를 만드는 사람이 그 지도의 절대적 정확성을 보증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근사치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산수입니다. 거기에는 오류의 여지가 없습니다. 의자 하나에 의자 하나를 더하면 둘입니다. 이것은 어디를 가든지 맞는 것이다. 내가 가진 돈이 10만원입니다. 그 돈을 회계 장부에 기록하면 얼마라고 기록할까요? 99,999원이라고 합니까 아니면 100001원이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정확하게 10만원이라고 기록합니다. 여기 여긴다는 말은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죽었다면 정확하게 죽은 것입니다.
자아가 죽는 생활을 하려면 먼저 자아가 죽었음을 알아야 하고 자아가 죽었다고 여겨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은 사망입니다. 이 사실을 먼저 알고 죽은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라.
자기를 죽이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계획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성경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듣고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전략은 여호수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2절에 보니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8절 이하에 보니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 말씀하신대로 진영을 짜고 여리고를 돌았습니다.
말씀대로 여리고를 돌았더니 여리고가 말씀대로 무너졌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칼을 가지고 적들을 진멸했습니다. 여기서 칼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엡 6:17에 보면 영적 전투를 할 때 필요한 전신 갑주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리고 전쟁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으로 적을 물리친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를 죽이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 할 때 우리의 생각 우리의 감정 우리의 계획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시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시는가를 살피고 성경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경에 없는 것이라면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현세천국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자아를 침묵 시키라.
우리의 자아는 죽었으나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 여전히 자신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내가 살아서 무엇을 하려고 할 때 우리는 자아를 침묵시켜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이런 명령을 합니다.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왜 그렇게 하라고 했을까요? 백성들이 여리고를 돌면서 입을 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상해 보세요. 마른 땅을 장정만 60만 명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돈다고 생각해 봅니다.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 합치면 200만 명은 넘는 사람들입니다. 100명만 마른 땅에서 걸어도 먼지가 많이 나는데 200만 내지 300만 명이 마른 땅을 걸으니 얼마나 많은 먼지가 낫겠습니까? 그럼 분명히 불평이 나올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쓸데없는 일을 시킨다거나 이것이 적군을 무찌르는데 무슨 소용이 있느냐 도리어 적군에게 노출이 되어 전멸 당하는 것 아니냐는 등 온갖 부정적인 소리가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침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아를 침묵 시키십시오. 특히 3불(不에) 대해서 침묵하십시오. 3불이 뭡니까? 불신(不信), 불편(不便), 불쾌(不快)에 대해서 침묵하십시오.
불신,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여리고를 돌아서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작전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계산해 보면 그렇잖아요. 어떻게 그 견고한 성이 무너집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시면 무너질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이 계획을 불신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을 때 침묵해야 합니다. 불신을 입으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신을 입으로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보고할 때 10명의 정탐꾼들은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땅에 적들은 장대하고 우리는 그들 앞에 메뚜기와 같아서 그 땅을 점령할 수 없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말이 들린대로 역사를 하셨습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한 사람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믿어지지 않을 때 침묵해야 합니다.
불편, 여리고를 도는 일은 몸을 불편하게 하는 일입니다. 먼지 날리는 광야를 도는 것은 불편한 일입니다. 그것도 하루가 아니라 7일 동안 돌아야 했습니다. 보통 불편한 일이 아닙니다. 이 때 입을 열면 원망과 불평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부정적인 언어를 하나님은 절대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침묵하게 했던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불편을 못 참는 분들이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 교인의 딸이 시골에서 목회를 하는 사모님이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서 그 교회에 땅 500평을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교회가 의자를 접이식으로 바꿨습니다. 그때 그 아버지가 교회 의자가 불편하다고 교회를 옮긴 일이 있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죠. 그 분이 의자는 핑계였는지 아니면 진짜 의자가 불편해서 교회를 옮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적인 의리로라도 그러면 안 되는 것이죠. 신앙은 둘째치고 의리로라도 그러면 안 되는 것이잖아요. 불편한 것을 못 참고 입으로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바로 자아입니다.
화장실이 불편할 수 있어요. 교회가 운행하는 자동차가 불편할 수 있어요. 식당도 불편할 수 있어요. 교회가 시설 면에서도 불편할 수 있어요. 교회는 최선을 다해서 성도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겠지만 노력해도 불편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작은 교회일수록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이런 불편함을 가지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육신이 하는 일입니다. 옛 자아가 하는 일입니다.
불쾌, 7일 동안 성벽을 돌다보면 불쾌한 일도 있을 것입니다. 앞사람이 유별나게 신을 끌며 걷는다면 얼마나 먼지가 심하게 일어나겠습니까? 뒤 따라오는 사람은 불쾌하죠. 그걸 입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결국은 싸움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옛 자아는 불쾌한 것을 입으로 말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공동체의 평화가 깨지는데도 옛 자아는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침묵하게 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이다보면 불쾌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상하게 감정을 건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쾌한 것을 느끼는 것도 자아고 그것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도 자아입니다.
성도들이 자아를 죽일 때 교회는 평안합니다. 공동체는 든든해지는 것입니다. 3불을 죽입시다. 불신, 불편, 불쾌를 극복합시다.
우리의 자아는 죽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순종하며 삽시다. 그리고 자아는 침묵시키길 바랍니다.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