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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리 / 김봉수 목사
한 주간 동안 살아오면서 참 많은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살다가 이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소리들 가운데 어떤 소리가 여러분의 귀에 크게 들리던가요?
어떤 소리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남아있습니까?
아니 여러분의 귀에는 주로 어떤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더 빨리 다가오는 소리는 어떤 소리입니까?
많이 가진 자들, 곧 부자들의 흥겹게 연회를 베푸는 그 연락하는 소리가 우리의 귀에 크게 들려 올 수도 있습니다.
권모술수에 능한 자들의 그래서 이 땅에서 힘을 가진 자들의 힘 자랑하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 올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 중에 그 힘있는 자들의 소리, 가진 자들의 소리들로 인해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혹은 힘이 없는 것 때문에, 기죽고 움추린 상태에서 한 주간을 지내다가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열왕기상 1장에서 우리는 먼저 잔치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1장 초반에 다윗의 아들 중 아도니야는 요압과 아도니야와 같은 당대의 유명한 장군, 종교계의 거물들과 함께 거대한 잔치 소리가 우리 귀에 들려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양과 살찐 소와 송아지를 잡고, 이스라엘의 왕자들과 왕의 신복들이 다 모여서 잔치를 하고 있습니다. 그 잔치 소리가 어느 정도일 것인가 하는 것은 가히 상상이 됩니다.
여러분,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잔치하는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사실 우리들은 그 근처에만 가도 기가 죽습니다. 기회가 되어서 강남의 부자들이 사는 지역에서 베풀어지는 잔치 자리에 참석해 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1장에 나타나는 잔치는 한 나라의 왕자들과, 군대장관 요압 곧 요즘 말로 총사령관이 참석하고 제사장 아비아달, 총회장급 인사들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국회의원이나 국무위원 같은 신복들이 다같이 모여서 신나게 잔치를 하면서 흥겨움의 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악을 도모하는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계자로 솔로몬을 지명하셨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아랑곳없이 자기들의 소리를 높이며 악한 계획을 이루어 가는 잔치자리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삶을 살아가는 동안 이런 악인들의 잔치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진실하게 살고자하는 자에게는 늘 실패와 좌절과 어려움이 찾아오는데, 자기들이 가진 힘과 잔머리를 가지고 불의를 행하고 불법을 행하는 이들의 잔치 소리가 더 높이 들려옵니다.
아무리 나는 성실하게 정직하게 수고를 해도 들어오는 수입은 얼마 되지 않아 겨우 겨우 살아가는데, 적당히 급행료도 내가면서 탈세도 해가면서 자기 할 짓 다하고도 더 많은 수입을 가지고 큰소리치며 사는 세상을 봅니다. 콩나물 하나를 팔아도 정직하게 팔려고 하는 나에게는 남는 것도 없고, 가짜 다이아몬드를 팔아놓고도 진짜를 팔았다고 억지를 쓰는 사람들은 돈푼께나 쥐고 있는 세상을 우리가 살아갑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이고 진실이고 다 팽겨치고 적당히 타협하고 살고 싶은 생각은 없으셨습니까? 왜 하나님은 이렇게 침묵만 하고 계시는가? 하는 원망 섞인 마음이 되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혹은 여러분들 중에 그 악인들의 잔치소리를 부러워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여러분,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악인들의 잔치 소리가 바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보다 높을 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 악인들의 뻑적지근한 잔치 소리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창세기 22장을 한번 다같이 찾아볼까요?
창세기 22장에는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너무나 귀중한 자녀 이삭입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이니 얼마나 귀중한 아들입니까?
정말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아들을 칼로 목을 따고 불로 태워서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라니요?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그런데 이 겉모습만 보고 본래의 본문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김용옥 교수라는 사람이 <깡패새끼 하나님>이라고 욕을 했어요.
하나님께서 정말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받으려는 계획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것을 이미 깨달았습니다. 사실 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은 하나님의 그 독특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싶은 말씀은 그 뒷부분 20절 이하입니다.
"이 일 후에 혹이 아브라함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밀가가 그대의 동생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그 나홀의 아들들이 몇 명인가 하면, 나홀이 첩에게서 낳은 아들까지 합쳐서 12명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명령을 따라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이곳까지 순종하며 온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도 내보내라고 해서 내 보내고, 이제 이삭 하나 겨우 있는데 그 아들마저 바치라고 했던 그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나홀의 소식을 듣게 되는데 아들이 12명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나홀을 부러워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악인들의 잔치소리를 듣고 부러워하거나 낙심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가장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도 종종 악으로 달려나가지만 일이 잘 풀릴 때가 있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줍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요나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꾸 죄의 길로 내려가고 있는데도 그 길들이 아주 형통하게 열립니다. 욥바라는 항구에서는 배를 만나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욥바로 내려가자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잘 준비되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에게 이렇게 일이 잘 풀려 나가는 것을 보고, 부러워 할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악인들의 잔치 소리가 아무리 높아도 아무리 흥겹게 들려와도, 부러워하지 말고 낙심하지도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때에>라는 단어를 두 번 볼 수 있습니다. 41절과 42절에서 보게됩니다. 하나는 <먹기를 마칠 때에>이고 다른 하나는 <말을 할 때에>입니다.
여기 아도니야와 함께한 사람들이 성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은 때는 이미 솔로몬에게 기름을 붓고 <솔로몬 왕 만세>소리가 드높은 지 오래 된 후입니다.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이 들어와서 그동안의 일어난 일들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볼 때에 <솔로몬 왕 만세>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시간이 꽤 흐른 것입니다.
왕에게 기름을 붓는 것이 그렇게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서야 겨우 그들은 소리를 듣습니다.
왜 그들이 늦게서야 그 소리를 듣습니까?
그것은 자기들의 잔치 소리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잔치소리 자기들의 흥겨운 소리로 인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 일을 이제서야, 먹기를 마칠 때에야 듣게 된 것입니다.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은 기혼과 아도니야가 잔치한 소헬렛은 그 근처입니다. 어쩌면 거기가 거기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까운 곳에서 진리의 소리가 들려와도 자기 소리가 높으면 반드시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아기 예수로 초림하실 때에 예루살렘 성은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그 소동 소리에 진정으로 들어야 할 소리를 예루살렘 백성들은 못 듣고 오히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은 천사들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의 주장하는 그 외식하는 소리들이 높아서 주님의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그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는 흥분한 소리들로 인해 십자가상에서 하시는 주님의 그 일곱 마디의 진리의 소리를 그들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에도 각자 자기들의 주장하는 소리가 높아서 주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나와서 앉아 있어도 세상의 돈이 부르는 소리, 권력이 부르는 소리만 주로 듣고 있으면서 진리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도니야와 그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잔치를 하던 무리들이 잔치를 마칠 때가 온 것처럼,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들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도 때가 옵니다. 천사장의 나팔소리를 들을 때가 옵니다.
이제 우리는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그 진리의 소리를 듣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이 들어 올 때에 아도니야가 하는 말이 흥미롭습니다.
42절을 보면 <들어오라, 너는 용사라 아름다운 소식을 가져오는 도다.>
NIV에 보면 <You must be bringing Good News.>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도니야는 지금 요나단으로부터 좋은 소식, Good news, 좋은 소리를 듣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아도니야가 요나단으로부터 듣기를 기대했던 좋은 소식이란 무슨 소식일까요? 추측하기로 다윗 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아도니야가 기다리던 좋은 소식일 것입니다. 다윗이 죽으면 자기가 왕이 되려고 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큰 소리는 그의 선친 다윗 왕이 죽은 것에 대한 백성들의 통곡소리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도니야와 같은 반역자의 마음에는 아버지의 죽음의 소식이 좋은 소식, 좋은 소리입니다. 백성들의 통곡소리가 좋은 소리입니다.
이 아도니야의 말은 우리에게 좋은 소식, 좋은 소리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줍니다.
우리는 자기 욕심대로 뭔가 이루어질 때 좋은 소식 Good News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헤롯왕에게는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이 절대 Good News가 아니었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엄청난 기쁨이지만 자기 욕심이 가득한 헤롯에게 주님의 탄생 소식은 결코 좋은 소식, 좋은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두 살 아래 아기를 다 죽이도록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오늘날 재물과 권력에만 관심을 가지고 사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를 대속하시는 십자가의 죽음의 소식, 부활하시고 다시 오시는 재림의 소식이, 결코 기쁨의 소식, 좋은 소리가 아닙니다.
복음이란 영어로 Good News라고 합니다. 좋은 소식입니다. 좋은 소리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그 어떤 소리보다도 도무지 벗어날 길이 없던 나를 죄 가운데 구원하신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소식, 그 대속의 십자가의 소식이 언제나 가장 좋은 소식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49절을 보면 이 좋은 소식 그 좋은 소리를 듣고 아도니야와 함께 반역을 도모했던 무리들이 다들 일어나 도망하는 것을 봅니다. 50절을 보면 아도니야도 역시 두려워서 제단 뿔을 잡는 것을 봅니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자기의 욕심,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고 살던 자들에게 좋은 소식이 들려질 때, 하나님을 거역하고 살아가던 자들에게 좋은 소리가 들려질 때 인간에게는 두려움이 임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던 아담과 하와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하나님의 그 음성은 얼마나 따스하고 포근하게 들려왔을까요?
그러나 자기들의 욕심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소리는 더 이상 행복을 느끼게 하거나 포근하게 만드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창3:8에 보면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낯을 피하여 숨었다>고 기록합니다. 10절을 보면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서 숨었다>고 말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소리가 들려 올 것입니다. 그날에 주님의 뜻을 따라 살던 자들, 곧 내 죄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주안에서 살았던 자들은 그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는 정말 좋은 소리로 들려올 것입니다. 하지만 주를 믿지 않던 자들에게는 그 소리는 결코 좋은 소리가 아니라 두려움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솔로몬의 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아도니야가 제단 뿔을 잡고 솔로몬에게 맹세하는 소리를 하라고 주장합니다. 아도니야가 또 기대하는 좋은 소리는 솔로몬의 맹세 소리였습니다. 아도니야는 자기를 죽이지 않겠다고 하는 솔로몬의 맹세 소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때에 솔로몬이 52절에서 이런 표현을 합니다.
<저가 만일 선한 사람이 될진대 그 머리카락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려니와 저의 가운데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
여기 52절에서 선한 사람이라는 단어는 42절에서도, 또 한 번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아도니야가 사용한 단어입니다. 요나단을 보고 아도니야가 <너는 용사라>라고 했는데, 그 <용사>라는 단어가 <선한 사람>이라는 단어와 같은 '하일' 입니다. NIV에서는 <A Worthy ma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곧 인격자, 가치 있는 자, 아름다운 자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솔로몬의 말을 통해 가치 있는 자는 가치 있는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자요, 가치 있는 말을 하는 자라는 것을 보게됩니다. 늘 남의 말이나 하고 험담이나 하고 은근히 자기 자랑이나 하는 자는 결코 가치 있는 자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가치 있는 자는 정말 가치 없는 소리를 듣고 있지도 않습니다. 가치 없는 소리를 듣고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결 론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아무리 악인들의 소리가 높아도 기죽을 이유도 없고 부러워 할 이유도 없습니다. 때가 되면 가장 아름다운 소리, 가치 있는 소리가 들려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소리를 늘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기 바랍니다. 좋은 소리를 듣고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자가 아니라,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즐거워하며, 가치 있는 자가 되어 가치 있는 소리를 들을 줄 알고,가치 있는 말을 하며 가치 있는 행동을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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