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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순의 인문학이야기_ 월간사람과산 2013년 07월호
칠봉산, 유림계의 거두 김창숙의 마음속에 간직한 산
칠봉七峰山(517m)은 가야산에 기대어 있으면서 성주읍을 감싸고 있다. 무주와 성주를 가로지르는 백두대간의 대덕산(1,291m)에서 지맥이 동쪽으로 뻗어 나오다가 수도산(1,317m)에서 다시 분기하는데, 북으로 분기한 능선은 염속봉산에서 칠봉산으로 이어지면서 낙동강과 만난다. 일곱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칠봉산은, 유림계의 독립투사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선생의 생가를 품고 있다. 심산은 김창숙 선생의 호이다. 김창숙선생이 마음에 품은 산, 즉 심산은 칠봉산이다. 평생 심산에 기대어 살았던 심산선생의 칠봉산을 찾아가 본다.
글 사진 | 김규순 (서울동인학회 원장 www.locationart.co.kr)
칠봉산에서 내려다 본 칠봉리 사진 좌측의 마을이 칠봉마을이다. 칠봉산 일곱개 봉우리가 칠봉마을을 크게 둘러싸고 있는데 우측에서 용맥이 내려와 산의 정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아주고 있다. 작지만 옹골찬 마을의 모습이다. 산을 등지지 않고 바라보고 있는 마을의 배치가 인상적이다.
성주에서 생산되는 성주참외는 전국의 62%를 차지하는 독과점 농산물이다. 성주들판에 보이는 비닐하우스는 모두 참외밭이다. 1월부터 8월까지 참외를 생산한다.
심산의 고향은
김창숙선생은 일제강점기에는 독립투사, 해방 후에는 교육자와 반독재 투쟁을 일삼았으며 유림계를 통합하고 이끌었던 유학자였다. 아버지 김호림은 봉화군 해저리 출신인데, 성주의 김우옹 종가에 양자로 온다. 의성김씨 19대 칠봉 김희삼(삼척부사)에게 우홍·우굉·우용·우옹 4형제가 있었다. 김우옹(1540-1603)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안동부사, 부제학을 지냈지만 정여립사건에 연루되어 회령으로 귀양을 갔으나 임진왜란으로 사면되고 병조참판을 역임했다. 김창숙은 족보상으로 김우옹의 13세손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김우굉의 후손이다. 심산은 성주에서 태어나서 김우옹과 동일한 학문적 계통을 접하게 되어 사상적으로는 김우옹의 영향을 받게 된다. 부친이 태어난 봉화 해저리의 응봉산의 정기를 바탕으로 성주 칠봉산 월명봉의 정기를 더하였으니 매와 같은 강인함과 달빛처럼 은은하면서 세상을 비추는 포용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심산 김창숙 생가 칠봉산이 내려다보는 그곳에 군더더기 없이 단아한 한옥이다. 마치 심산 선생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가옥도 사람을 닮는 것이다. 뒤에 보이는 주봉도 여유로운 자태를 지니고 있다. 일제는 심산선생이 고문으로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여 앉은뱅이가 되자 석방조치를 내렸는데 그 후 줄곧 계신 곳이 생가이다. 반독재투쟁을 할 때에도 이곳에서 서울을 오르내렸다. 사진의 사랑채가 심산선생께서 기거하신 공간이다.
심산 김창숙선생
심산 김창숙선생 동상 성균관대학교정에 있는 심산선생 동상. 성균관대학교의 영원한 총장으로 젊은이들의 가슴에 살아 있다. 그는 성균인에게 주는 글에서 “우리나라 청년 학도의 기백이 없음을 한탄한다. 제군들이 만약 청년다운 정열과 순진성을 가졌다면 절연(截然)히 정사(正邪)를 판단하여 사(邪)를 물리치고 정의를 바로 잡으려는 기개와 용기가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했다.
청천서당 동강 깅우옹 옹의 위폐를 모신 서원(건립 1729)이었으나, 대원군 서원철폐령에 철거되었다. 심산의 부친께서 종택의 사랑채를 고쳐 청천서당으로 중건하였다. 심산은 애국계몽운동을 위해 성명학교 건물로 활용하였는데, 일제에게 압류당하였다.
파리장서와 1차 유림단 사건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한양으로 올라가서 을사오적의 처단과 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왕권의 미약함을 감지한 그는 이때부터 위민(爲民)적 유교사상을 견지하게 된다.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망하자 깊은 좌절에 빠져 그는 3년 동안 방황을 하였는데, 모친의 질책으로 정신을 차려 독서와 학문에 정진하던 중 3ㆍ1운동을 맞이한다. 김창숙은 3ㆍ1독립선언문의 민족대표에 유림이 한명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통탄하였다.
“우리 한국은 유교의 나라, 진실로 나라가 망한 원인을 궁구한다면 바로 이 유교가 먼저 망하자 나라도 따라 망한 것이다. 지금 광복운동을 인도 하는 데에 오직 세 교파가 주장하고 소위 유교는 한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 세상에 유교를 꾸짖는 자는 ‘쓸데없는 유사, 썩은 유사는 더불어 일하기가 부족하다’ 할 것이다. 우리들이 이런 나쁜 명목을 덮어썼으니 무엇이 이보다 더 부끄럽겠는가?”
이에 김창숙은 유림계를 단결시켜 한민족 독립을 위해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긴 것이 <파리장서>이다. 김창숙이 선도적인 역할을 하여 영남과 충청의 유림 137명이 연서하여 대한민국 독립의 정당성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사건이다. 김창숙이 파리장서를 휴대하고 상하이로 떠난 후에 사건의 전모가 일제에게 발각이 되어 유림들이 고초를 겪게 된 것을 1차 유림단 사건이라 한다.
독립운동기지건설 모금운동과 2차 유림단 의거
1925년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국내 유림조직을 격려한 후에 1926년 3월 상하이로 돌아온다, 김창숙이 떠난 직후 1926년 4월에 독립자금모금의 전말이 일경에 의해 발각되어 체포된 유림이 600여명에 이르는데 이것이 2차 유림단 의거이다. 김창숙과 유림단은 김구와 의기투합하여 국내에서 모금한 독립자금으로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투척사건(1926.12.26)을 주도하였으며 국내독립운동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대한의 유림은 지도층으로써 조선 멸망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대한독립을 위해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사건이다.
심산선생 생가에서 만난 손응교(90) 둘째며느리 손응교가 시아버지를 이야기할 때에는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힘이 들어갔다. 자신은 다리를 쓰지 못하는 시아버지의 손발이 되어 한평생 살아왔으며, 가슴속에 편지를 숨기고 독립운동가에게 전달하는 전령역할도 했다. 손응교는 ‘김구선생께서 귀국할 때 중국에서 죽은 남편의 유골을 가져왔다’고 독립투사의 며느리답게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심산 김창숙의 비타협 저항정신
김창숙은 상하이에서 안창호, 김구, 박은식, 이동녕, 이시영, 신채호, 신규식 등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능동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에 참여 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승만이 미국대통령에게 대한민국의 위임통치를 요청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김창숙·신채를 비롯한 54명은 이승만을 탄핵하였다. 김창숙은 1919년 초에 쑨원과 단독회담을 가졌으며 그의 도움으로 한국독립운동후원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활약을 눈의 가시처럼 생각하던 일제는 1927년6월14일 상하이 공제병원에 입원 중이던 김창숙을 체포하여 국내로 압송하였다. 그는 재판정에서 변호인을 거부한 일화는 유명하다.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한다. 일본 법률가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대의에 모순되는 일이다.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결코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하여 살기를 구하지 않는다.”라고 단호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 당시 일제의 혹독한 고문으로 다리를 쓰지 못하여 앉은뱅이 노인이라는 뜻의 ‘벽옹(躄翁)’이라는 호를 갖기도 한다.
칠봉산 사진에서 두 사람 바로 뒤의 산이 칠봉산이고 좌측의 희미하게 높은 산이 가야산이다. 가야산이 칠봉산에 기운을 북돋아주는 형상이다. 칠봉산의 정기가 가야산에 못지않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일곱 개의 봉우리는 심산선생께서 일곱 번의 난국을 극복하는 불굴의 의지를 표명한다.
성균관대학교 설립 그리고 초대총장
광복이 되자 1945년11월20일에 성균관 명륜당에서 천여명의 유림이 모여 전국유림대회를 갖고 중앙집행위원회를 조직하여 김창숙을 위원장으로 추대한다. 유도회 총본부장이 된 김창숙은 친일황도유림을 숙청하고 민족고유문화의 근간인 유학정신을 향상시키기 위해 성균관대학(1946)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미 군정청에 의한 국립서울대학교설립으로 유구한 정통을 가진 정통국립대학의 명맥이 단절되고 말았다. 1953년 종합대학으로 인가를 받아 초대총장에 취임하였는데, 이는 그가 독립운동으로 국내유림을 단결시키며, 유림계의 중심에 서서 우리나라 유학 교육기관을 설립한 것은 실천하는 유학자였기 때문이다.
유도교도원 입학식 1949년3월8일 심산 김창숙과 함께 사진 중앙에 백범 김구, 위당 정인보 등 대한민국 국보급 인사들이 참석하여 성균관대학의 위상을 나타내주고 있다. 심산선생은 해방 후 수많은 파당이 난립하자 어느 당에도 가담하지 않고 민주주의 구현을 위한 한 길을 걸어간다. 그래서 전국의 유림들이 존경과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 중에도 독립운동의 동지 백범과 호흡을 같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제공>
51주기 심산추모제전 심산 김창숙묘에서 제51주기 심산추모제전이 2013년 5월10일(금) 오전11시에 거행되었다. 묘지는 2012년 문화재청에 의해 문화재로 등록됨. 박근혜 대통령의 조화가 옆에 서 있다.
반독재투쟁과 불굴의 정신
그의 불굴의 정신은 반독재투쟁으로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 신탁통치반대투쟁을 전개하며 신탁을 찬성하였던 공산당세력을 매국반역행위라고 경고문을 신문에 공개적으로 발표하였다. 민주주의를 위한 반독재투쟁에서는 부산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 호헌구국선언대회(1952)를 개최하여 옥고를 겪었다. 자유당의 사사오입개헌으로 이승만대통령이 3선에 성공하자, 부정선거를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요구하며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한 이승만 정부가 김구선생의 묘를 파내려고 획책함에 ‘효창공원 칠열사묘이장 반대추쟁’을 주도하여 그 부당함을 널리 알려 이장을 저지하였다.
심산의 거칠 것 없는 반독재투쟁에 자유당은 정치적인 압박을 가하여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을 사임(1956)하게하였고,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1958년 야당과 언론을 탄압할 목적으로 자유당 단독으로 ‘신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켜 장기집권을 획책하였는데, 이에 분개한 김창숙은 성주에서 손자의 등에 업혀 상경하여 반독재민권쟁취구국운동을 위한 전국민총궐기연합체 구성을 제창하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장남 환기(건국훈장애국장)는 국내로 잠입했다가 잡혀 일제의 고문으로 죽고(1927), 1943년 중경임시정부로 밀파한 차남 찬기(건국훈장애국장)는 해방직후 중국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개인적으로 참담함을 겪으면서도 대한민국 독립이라는 대의와 반독재투쟁을 위해 추호의 흔들림 없이 일생을 살아온 그는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한 지 두 달 만에 위대한 일생을 마감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초기부터 이승만의 독재와 투쟁한 심산은 1960년 4월19일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어느 파당에 속하거나 이익에 구애됨이 없이 자신의 명철한 철학에 근거하여 경계 없는 반독재투쟁을 전개하여 유림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낸 선비였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심산생가에서 칠봉산을 바라보며 그의 불굴의 의지를 가늠해본다. 사람들아, 매일 아침 바라보던 칠봉산을 마음에 담아 산과 같이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았던 심산 의 고매한 뜻을 기리며 칠봉산 능선을 걸어보는 것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다. [qsoon]
심산기념문화센터 반포동 사평대로변 서초소방서 뒤에 있다. 강당과 강의실 및 독서실을 구비하고 있으며 각종 문화강좌도 열린다. 현대식 건물로 깔끔하지만, 건물의 향이나 현관 위치, 건물의 구조는 심산 김창숙의 정신을 담기에는 미숙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이 정도 공간이라도 확보한 것에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칠봉산 칠봉마을에서 바라본 칠봉산의 주봉이다. 일곱 개의 봉우리는 심산선생께서 일곱 번의 난국을 극복하는 불굴의 의지를 표명한다.
첫댓글 성균관대학 설립자이며 유도회를 만드신 심산 김창숙선생님에 대한 글 고맙습니다. 후세인들이 충분히 존경할 만한 인품을 지니셨으며 귀감이 되실 분입니다. 심산선생 같이 훌륭하신 지도자가 그리운 세태라 더욱 반갑고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