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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석승우(釋僧祐)
승우의 본래 성은 유(兪)씨며, 그의 선조는 팽성(彭城)의 하비(下邳) 사람이다. 그런데 부친의 대에 건업(建業)에 거주하였다.
승우의 나이가 겨우 몇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건초사(建初寺)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고는 펄쩍 뛰면서, 도를 즐거워하여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부모가 그의 뜻을 가엽게 생각하여, 잠시 도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승범(僧範) 도인을 스승으로 섬겼다.
나이 열네 살 때 집안사람들이 비밀리에 혼인처를 구했다. 승우가 이를 알고 피해서 정림사(定林寺)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법달(法達) 법사에게 몸을 맡겼다. 법달도 계율과 덕이 정밀하고 엄숙하여 법문의 기둥이 된 이로, 승우는 스승으로 받들어 정성을 다하였다. 나이가 차서 구족계를 받자, 잡은 지조가 굳고 밝았다.
처음 사문 법영(法穎)에게서 수업하였다. 법영은 한 시대의 이름난 이로 율학(律學)의 종사였다. 이에 승우는 생각을 다하여 뚫고 구하며, 새벽에서 밤까지 게으름이 없었다. 마침내 율부에 크게 정밀하게 뛰어나, 선배들을 더욱 힘쓰게 하였다. 북제의 경릉왕(竟陵王)과 문선왕(文宣王)이 늘 초청하여, 율을 강의하게 하였다. 듣는 대중들이 항상 7,8백 명이었다.
영명(永明) 연간(483~493)에 칙명으로 오군(吳郡)에 들어갔다. 시험 삼아 오부대중을 고르고, 아울러 『십송률』 강의를 베풀어, 다시 계를 받는 법을 폈다. 여기서 얻은 보시로 정림사(定林寺)와 건초사(建初寺)를 경영하여, 여러 사찰을 수선하였다. 아울러 차별을 두지 않는 큰 모임[無遮大集]과 사신재(捨身齋) 등을 세웠다.
경장(經藏)을 조성하자, 두루마리 책들을 찾아 비교하였다. 무릇 절을 널리 열고, 진리와 말씀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그의 힘이다.
승우는 천성적으로 생각이 교묘한 데가 있었다. 능히 눈대중으로 가늠하고 마음속으로 헤아릴 수 있었다. 장인들이 와서 표준치[標準]에 근거해서 비교해 보면, 한 자 한 치도 어긋나는 것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광택사(光宅寺)와 섭산사(攝山寺)의 큰 불상과 섬현(剡縣)의 석불상 등은 모두 승우를 초청하여, 그의 의례 법칙에 기준하여 계획하였다.
금상폐하께서도 깊이 예우하였다. 모든 승려의 일에 관한 큰 의문은, 모두 칙명으로 그를 찾아가 심의하여 결정토록 하였다. 나이가 들어 노쇠하고 다리에 병이 생기자, 칙명으로 가마를 타고 내전에 들어오는 것을 윤허하였다. 여섯 후궁에게도 계를 받게 하니, 그가 조정에서 존중받음이 이와 같았다.
개선사(開善寺)의 지장(智藏)과 법음사(法音寺)의 혜곽(慧廓)도 모두 그의 소박한 덕을 숭배하여, 초청하여 스승의 예로 섬겼다. 양의 임천왕(臨川王) 소굉(蕭宏)과 남평왕(南平王) 소위(蘇偉), 의동(儀同) 진군(陳郡)의 원앙(袁昻), 영강(永康) 정공주(定公主), 귀빈(貴嬪) 정씨(丁氏) 등도 모두 그 모범적인 계율을 숭배하여, 제자로서 예를 다하였다. 무릇 도인과 속인의 제자가 1만 1천여 명이었다.
천감(天監) 17년(518) 5월 26일에 건초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4세이다. 그리하여 개선로(開善路)의 서쪽 정림사의 옛 묘지에 묻혔다. 제자 정도(正度)가 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고, 동완(東莞)의 유협(劉勰)이 비문을 지었다.
처음 승우가 경장을 모았다. 그것이 이룩되자, 사람을 시켜 그 가운데서 중요한 일들을 뽑았다. 이에 「삼장기(三藏記)」ㆍ「법원기(法苑記)」ㆍ「세계기(世界記)」ㆍ『석가보(釋迦譜)』 및 『홍명집(弘明集)』 등으로 엮었다. 모두 세상에 행한다.
【論】예의란 성실함과 믿음이 엷어진 데서 나오고,4) 계율도 그릇됨을 막으려 하는 데서부터 일어난다. 그런 까닭에 범하는 연유에 따라서 편목(篇目)을 만들었다. 쌍수(雙樹)에서 호흡이 끝날 때까지가 부처님 생존시의 일대기이다. 금하(金河)에서 그림자가 멸한 이래, 가섭이 뒤를 이어 일어나서, 계율을 잘 지킨 존자인 우바리(優波離) 비구에게 명하여, 율장을 세상에 내놓게 하였다.
이에 우바리 비구는 손에 상아(象牙) 부채를 잡고, 입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외우기를 80번 되풀이하여, 그 글이 마침내 끝났다. 이에 이를 나뭇잎에 써서 『팔십송률(八十誦律)』이라 이름하였다.
이후로 가섭ㆍ아난ㆍ말전지(末田地)ㆍ사나바사(舍那波斯)ㆍ우바굴다(優波掘多), 이 다섯 분의 아라한이 차례로 불법을 주지하였다. 우바굴다의 시대에 이르러, 아육왕(阿育王)이 파타리불다성(波吒梨弗多城)에 있었다.
지난 옛날에 부처님과 만난 인연으로, 드디어 철륜왕(鐵輪王)이 되어 세상을 다스렸다. 그러나 시기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가혹하고 포학한 정치를 하며, 경서를 불태우고 여러 득도한 사람을 해쳤다.
그 후 마음을 바꾸어 불도에 귀의하고, 전날의 잘못을 참회하여 멀리 아라한을 모아 다시 삼장을 결집하였다. 이때에는 서로 보고 들은 것에 집착하였다. 각기 스승의 설을 인용하여 의지한 근거가 같지 않아, 마침내 5부의 경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안에서 제약하는 가볍고 무거움이때때로 혹 같지 않다. 허락하고 차단하며 폐하고 건립하는 면에서도 작은 차이가 없지 않다. 이는 모두 부처님께서 지난 옛날에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알맞게 응하셨음에서 연유한다.
혹 사람에 따라, 혹 근기에 따라, 혹 시절에 따라, 혹 나라에 따라 이곳에서는 허락한다고 하시다가, 다른 지방에서는 제지하시고, 혹 이쪽 사람에게는 제약한다고 하시다가 다른 사람에게는 허락하셨다.
다섯 분의 승려가 비록 다 같이 부처님의 율을 취하였지만, 각기 한 귀퉁이만을 근거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구족계마다, 때로 가볍고 무거움이 죄목을 다룸에 있어서, 넉넉하거나 낮추거나 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이에 근거하여 수학하면 모두 득도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에, 인연의 중첩함을 꿈꾸신 일이 있었다. 이미 경과 율이 5부로 나뉠 것임을 예언하였다.
『대집경(大集經)』에서는 말한다.
“내가 죽은 뒤 남겨진 법이 나뉘어져 5부가 될 것이다. 교리 이해가 거꾸로 뒤집혀지고, 법장이 숨겨 가려진 것을 담무국다(曇無鞠多)라 하리라.”
곧 담무덕(曇無德)이 그것이다.
“외도의 책을 읽어 암기하고, 삼세를 있다고 받아들이며, 문답에 뛰어나며, 일체 중생이 모두 계를 받을 수 있다고 설하는 것을 살바야제바(薩婆若帝婆)라 하리라.”
곧 살바다(薩婆多)가 그것이다.
“나는 없다고 설하며 모든 번뇌를 얽어매는 것을 가섭비(迦葉毘)라 하고, 나는 있다고 말하면서 공(空)을 설하지 않는 것을 바차부라(婆蹉富羅)라 하며, 넓고 해박하게 두루 5부를 열람하는 것을 마하승기(摩訶僧祇)라 하리라. 선남자야, 이와 같은 5부가 비록 각기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가 여러 부처님의 법계 및 대열반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니라.”
또한 『문수사리문경(文殊師利問經)』에서는 말한다.
“내가 열반에 든 후 백 년이 되면 아마도 두 부(部)가 일어나리라. 첫 번째는 마하승기부(摩訶僧祇部)이다. 대중부(大衆部)라고도 하며,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같이 모여 율장을 내놓을 것이다. 이로부터 흩어져 퍼지면서 다시 7부가 생겨날 것이다. 두 번째는 체비리부(体毘履部)이다. 순전히 불도의 수행을 마친 승려들이 함께 모여 율법을 내놓을 것이다. 이 부로부터는 다시 흩어져 퍼지면서 다시 11부가 생겨날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 경의 게송에서 칭송한다.
18부와 그 근원이 되는 두 부는
모두 대승으로부터 나오리라.
옳지도 않지만 그르지도 않아서
나는 미래에 일어나리라 말하노라.
또한 주장하는 견해가 같지 않아, 전하는 가운데 역시 18부가 있는데, 언어 표현에서 조금 다르다. 그런 까닭에 5부를 근본으로 삼는다.
살바다부(薩婆多部)에서 4부가 생겨났고, 미사색부(彌沙塞部)에서 1부가 생겨났으며, 가섭비부(迦葉毘部)에서 2부가 생겨났다. 이것은 모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이후 2백 년 안에 생긴 것이다. 승기부(僧祇部)에서 생긴 6부는, 흐르는 물 같이 끊임없이 전한 4백 년 동안, 담무덕부(曇無德部)에게서 생겨난 율장이다.
경전 가운데 혹 다만 다섯 승려만을 말하는 것은 그 우두머리를 들어 말한 것이다. 혹 때로는 18이나 20의 율부를 말하는 것은 다른 논리를 통틀어 줄지어 말한 것이다.
불교가 동방에 전해지면서 5부의 율장도 모두 건너왔다. 처음 불야다라(弗若多羅)가 『십송률』의 범본을 외워내자, 구마라집이 이를 번역해서 한문으로 바꾸었다. 다 끝내지 못하고 불야다라가 죽었다. 그 후 담마류지(曇摩流支)가 다시 나머지를 외워내서, 구마라집이 번역하여 모두 끝냈다.
담무덕부(曇無德部)는 불타야사(佛陀耶舍)가 번역한 것으로, 곧 『사분율』이 그것이다. 마하승기부와 미사색부는 모두 법현(法顯)이 범본을 얻은 것이다.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가 『승기율』을 번역해 냈으며, 불타집(佛馱什)이 번역해 낸 미사색본은 곧 『오분율』이다.
가섭비부(迦葉毘部)에 대해서는 혹 말한다.
“이미 범본이 건너왔다. 그러나 아직 그것을 번역하지는 못하였다.”
거기에 실려 있는 선견(善見)ㆍ마득륵가(摩得勒伽)ㆍ계인연(戒因緣) 등도 역시 율에 속한 갈래이다.
이처럼 모든 율부가 다 전래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십송률』 한 본이 동쪽 중국에서는 가장 성행하였다.
예전에 비마라차(卑摩羅叉) 율사는 본래 서역 나라의 으뜸가는 종사였다. 관중 땅에 들어와 형주와 섬서로 갔다. 그곳에서 모두 『십송률』을 베풀어 유통시켰음이 송(宋)나라의 역사에 나타나 있다. 담유(曇猷)가 친히 소리와 뜻을 이어받고, 승업(僧業)이 발꿈치를 이어 넓게 교화하였다.
승거(僧璩)ㆍ도엄(道儼)ㆍ승은(僧隱)ㆍ도영(道榮) 등은 모두 담유ㆍ승업의 뒤를 그대로 이어받아, 줄지어 송나라를 장식하였다. 글에 의거하여 이해하는 정도이므로, 그렇게 깊이 있게 뚫고 연마하지는 못하였다.
그 후 지칭(智稱) 율사는 깊이 생각하기를 다하여, 펼쳐서 해석한 것마다 모두 문호를 개척하여 다시 과목(科目)을 세웠다. 북제(北齊)와 양(梁)시대에, 천명에 의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명세(命世)’라 불렸다. 그에게서 배운 무리들이 기록을 전하여, 지금까지 숭상한다.
무릇 지혜는 선정에 힘입고, 선정은 지계에 힘입는다. 그런 까닭에 계ㆍ정ㆍ혜는 불교의 교리를 크게 분류한 것이자 차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도문에 들어서면, 곧 계율로 근본을 삼고, 속가에 살면 예의를 우선으로 삼음을.
『예기(禮記)』에 이른다.
“도덕ㆍ인의는 예가 아니면 이룩되지 않으며, 교훈으로 풍속을 바로잡는 것은 예가 아니면 갖추어지지 않는다.”
경에서는 말한다.
“계는 평탄한 땅이라 하겠다. 모든 거룩함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삼세의 불도도 계에 의지하여 비로소 머문다.”
그런 까닭에 율에서 해석하는 다섯 가지 법은, 제어함을 먼저 알게 한다. 물적현상 위에 있는 모양[三相]을 풀 베듯 해야 함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다음에야 선정과 지혜의 법문을, 순서에 따라 차례로 수학하게 하였다. 그런데도 잘못에 집착하는 무리들은 서로 다른 논의들을 일으킨다.
율에 치우친 자들은 말한다.
“계율이 모든 것을 지휘하며, 논리를 따지는 것은 허무맹랑한 것이다.”
구족계의 제목이나 이름 정도만 얄팍하게 알면, 이내 말한다.
“해득함이 우바리 비구의 경지에 미친다.”
고작 물을 걸러내고 물주머니를 뒤집을 줄만 알아도 이미 일컫는다.
“행이 아라한과 나란하다. 오직 나만이 승려이고, 다른 사람은 모두 눈으로 불법을 보아 상상으로만 이른다.”
이는 자신을 찬양하고 다른 사람을 헐뜯는 것으로, 공덕을 쌓더라도 허물을 속죄할 수 없다. “스스로 높은 양하는 교만과 자기가 높다는 긍지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무릇 이러한 것을 일컫는다.
한편 논리를 따지는 데 치우친 자들은 말한다.
“율부는 하나의 치우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논리를 따지는 것은 사방에 두루 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율 따르기를 등지고, 5음(陰)과 12입(入)만을 오로지 중히 여긴다. 뜻에만 맞으면, 곧 행하여 한 번도 구애받는 일이 없다.
그들은 말한다.
“지옥도 지혜로운 사람을 불사르지 못하고, 끓는 가마솥도 반야를 삶지는 못한다.”
이것은 모두 행동을 단속하는 자루를 잃어서, 도로 자신을 상하는 것이다.“쥐를 점쳐 양(羊)이라고 한다”는 것은, 어찌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찬하노라.
소반과 사발에 마련한 경계나
안석과 지팡이에 베푼 새김글이나
만약 사람들이 힘쓰지 않으면
어떻게 이룰 수 있으리요.
누더기 옷 깁고 입으면
구족계 이로 말미암아 생겨나니
입과 생각을 다물고 지키면서
마음과 몸을 마른 고목나무처럼 하라.
기쁨과 슬픔이 거울의 양면이라면
들뜸과 근심은 병의 앞뒤라네.
주석
1 듣건대, “삶을 잘 기르는 이는 육지에서 외뿔소나 호랑이를 피하지 않고, 전쟁터에서 갑옷을 입거나 무기를 들지 않더라도, 외뿔소가 그 뿔을 박을 곳이 없고, 호랑이가 그 발톱을 찍을 곳이 없고, 무기가 그 칼날을 들이밀 곳이 없다”고 한다. 무엇 때문인가? 그 죽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노자』 50장)
2 『노자(老子)』 26장.
3 육묘법문(六妙法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수식선(數息禪)의 수(數)ㆍ수(隨)ㆍ지(止)ㆍ관(觀)ㆍ환(還)ㆍ정(淨)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이다.
4 저 예의바름이라는 것은 성실과 믿음의 얄팍한 상태이자 어지러움을 일으키는 처음이며, 미리부터 아는 것은 도의 꽃이자 어리석음의 시초이다. 이 때문에 대장부는 도타운데 머물러서 얄팍함에 뜻을 두지 않고, 열매에 머물러서 꽃에 뜻을 두지 않는다. (『노자』 38장)
『고승전』 11권(ABC, K1074 v32, p.869a01-p.880c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