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작가 소노 나야꼬가 <중년 이후> 라는
전후 일본의 궁핍한 시절을 배경으로 한 수필이다.
거기에 어떤 아이가 학교에서 신발을 잃어버렸습니다.
신발을 훔쳐간 도둑 때문에 그 학교에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신발을 훔쳤으면 훔친 신발을 다른 마을에서만 신으면 들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순진해서 훔친 신발을 그냥 신고 다닙니다.
그래서 신발 수색만 해보면 금방 신발도둑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신발 검사 결과 신발을 훔진 아이를 찾게 되었습니다. 학급에서는 신발 도둑이라며 그 아이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신발을 훔치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 그리고 훔친 신발을 원주인에게 돌려 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선생님은 신발도둑이 너무 가난해서 신발이 찢어져 학교에 신고 올 신발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담임선생님은 신발을 잃어버린 아이를 불렀습니다. 아마도 이 아이는 집안 살림이 넉넉한 아이였던 모양입니다.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신발을 그 아이에게 주면 안 되겠니?
너는 부자라서 신발이 여러 컬레 있잖아?"
그래서 신발을 양보해서 신고 다닐 수 있게 했습니다.
신발을 훔치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 돌려주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정의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보다 더 큰 개념은 자비를 베풀고 사랑으로 품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이해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덮고, 품어주고,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정의보다 큰 것은 사랑입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를 붙들어야 합니다. 나의 의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의인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는 사랑과 자비를 붙들어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사랑만 붙들면 방종에 빠져들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의를 붙들면 다른 사람을 정죄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잘못된 적용을 하여 잘못된 산앙으로 흐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는 의를 붙들고, 인간관의 수평적 관계에서는 자비와 사랑을 붙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