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북로 달려본 적 있어? 강변북로? 응 강변북로... 일요일 5시58분, 일부러 2분 일찍 마치고 나왔건만 ㅇ은 없다. 신호를 넣는다. 신호음이 길어진다. 바람이 몹시 분다. 플라타너스 나뭇잎 수런거리는 소리에 신호음이 묻혀버린다.
6시 13분 다시 전화를 한다. 신호음이 몇 번이나 울렸을까, ㅇ이 전화를 받는다. 어 미안해 이제 해운대 도착했다, 내가 5분 뒤에 다시 전화할게, 9분 뒤에 전화가 온다. 내가 그리로 갈까? 아니면 서면에 나가 있을래? 그럼 서로 비슷하게 도착할 것 같은데...
ㅇ이 약속시간에 맞춰서 나오리라고 기대하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어떤 친구가 ㅇ에게는 약속시간을 1시간 앞당겨서 말해주자고까지 했다. 그래도 ㅇ은 30분쯤 늦었다. 손전화가 없던 시절, 나는 발끝만 내려다보며 몇 번이나 ㅇ을 기다렸던가. 그러나 보수동 골목 초입에 서서 ㅇ을 기다린 것이 그 마지막이었다. ㅇ은 그날 책방골목 구석구석까지 안 뒤진 곳이 없다고 했다. 자주 가는 단골책방은 물론이고 골목초입에서부터 가게 하나하나까지 일일이 다 들어가 봤다고 했다. 그때 나는 어디를 그리도 헤매 다녔던가. 어머니가 부산 내려와서 맨 처음 둥지를 틀었다는, 헐린 지 오래되어 이름만 아련한 영남극장이 있었다는, 보수천 복개도로 위를 걷고 있었다. 다리가 아파서 주저앉을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김민기 ‘친구’의 후렴구에 기타반주를 넣던 ㅇ의 가늘고 긴 하얀 손가락을 기억 속에서 천천히 지워냈다.
영광도서이다. 상설 가판대며 출입문 근처에 사람들이 많다. 서너 명이 줄을 선 카운터를 지나 곧바로 계단을 오른다. 따분한 듯 하품을 하고 있는 여직원에게 절판된 책의 재고상태를 확인한다. 그러나 오늘은 한 권도 건질 수 없다. 4층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엘리베이터는 5층에 있다. 다시 계단을 오른다. 세 명의 안내 직원들이 모두 다 손님과 얘기 중이다. 안면이 있는 남직원에게 부탁한다. 키가 작은 남직원은 맨 위에 꽂혀있는 책을 뽑기 위해 나무상자를 딛고 올라선다. 내용을 훑어보니 마음이 일지 않는다. 나무상자를 딛고 올라서서도 손이 닿지 않아 안간힘을 쓰는데 손전화의 진동이 느껴진다. 좁은 나무상자 위에서 기우뚱하고 중심이 흔들린다. 전화기를 떨어뜨리기 직전 ㅇ의 목소리가 울린다. 어디야? 난 영광도서 바로 앞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ㅇ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서점 안으로 들어가서 휘둘러본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는데 발목이 시큰거린다. 넘어지면서 발목을 약간 삐끗했나보다. 다시 진동이 느껴진다. 야, 넌 어째 바로 앞에 두고도 못 찾냐? 그러나 내 눈엔 ㅇ이 보이지 않는다. ㅇ이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다. 바로 앞 승용차에서 ㅇ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나는 아직도,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저쪽 끝에서 느릿느릿 걸어오는 ㅇ을 기다린 것일까. 그래서 나는 운전석에 앉아 있는 ㅇ이 언제나 낯설다.
뭐 먹을래? 맛있는 거 먹자 왜 또 입맛 없어? 이 근처에 밀면 유명한 집 있지 않아? ㅇ은 모처럼인데 비싼 거 먹지 겨우 밀면이냐며 퉁박을 준다. 나는 그냥 매콤한 게 먹고 싶어서 그렇다며 얼버무린다. 밀면 위에 고명으로 얹혀있는 수육을 ㅇ에게 건넨다. 왜 이거 못 먹어? ㅇ은 함께 밀면을 먹을 때마다 똑같이 묻곤 한다. 내가 다대기 양념을 젓가락으로 하나하나 덜어낼 때까지 가위를 들고 기다려준 ㅇ이 면을 잘라 준다. 한 번 더? ㅇ은 가위질 시늉을 하며 묻는다. 동그랗게 말아진 면이 네 등분으로 잘라진다. 됐어 너 먹어, ㅇ은 손사래를 친다. 절반 이상을 덜어준다. 한여름에 먹어야 제 맛인데, ㅇ은 배가 고팠는지 후루룩 면발을 입으로 끌어넣는다. 국물이 달큼하고 진한 생강 맛이 난다. 그리고 짜다. ㅇ의 속도와 맞추려 했지만 할 수 없이 먼저 젓가락을 놓는다. ㅇ은 그릇을 들고 국물을 마신다. 짤 텐데... 입을 닦고 혀끝으로 이를 훑는다. 왼쪽 송곳니와 어금니 근처에 이물질이 느껴진다. 빼내서 씹으니 알싸한 생강이다.
커피? ㅇ은 자판기 앞에 서서 묻는다. 고개를 젓는다. ㅇ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끄러미 쳐다본다. 아마도 내가 커피를 마다한 적은 없기 때문이리라. 바람이 휘돌아 친다. ㅇ은 반팔 남방 차림이다. ㅇ이 차문을 연다. 춥다 차 안에 들어가 있어, ㅇ은 음악을 틀어주고 다시 자판기 쪽으로 간다. 백미러에 비친 ㅇ은 바람을 등지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
강변도로 달릴까? ㅇ이 네비게이션에 ‘강변’이라고 친다. 강변횟집, 강변주유소, 강변슈퍼... ㅇ이 헤벌쭉 웃는다. 아 을숙도, ㅇ은 ‘을숙도’라고 친다. 이리로 나가면 큰길이 나올까? ㅇ은 또 내게 길을 묻는다. 아 참 넌 길 잘 모르지 에라 이리로 가보자, 역시나 큰길은 나오지 않는다. 다시 그 자리로 돌아 나와 겨우 큰 길로 들어선다. 고가도로를 타고 달린다. 또 밤샘 했어? 어젠 도대체 몇 시간이나 잔거야? 너 벼도 잠을 자야 풍년이 들지 라는 광고 기억나? 하물며 벼도 잠을 자야 낟알이 여무는데 사람이 그리 잠을 안자서 되겠냐? 나는 잠자코 듣고만 있다. 저 말은 언젠가 내가 ㅇ에게 해준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얘기를 ㄱ시인에게서 들었다. ㅇ은 다그친 것이 미안했는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강물 보이면 깨워줄게 눈 좀 붙여, 한다. 의자에 깊숙이 기대 눈을 감는다. Long good-byes make me so sad... 그랜드 피아노와 어쿠스틱 기타 선율에 캐멀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ㅇ이 어깨를 흔든다. 차가 멈춰 있다. 바로 앞에 검은 강물이 출렁이고 있다. 김환기 그림 같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ㅇ이 바로 알아챈다. 그래 밤하늘 별을 보며 그리운 한 사람 한 사람이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찍어나간 점들 말이야, 강물에 불빛이 흔들린다. 불빛에 강물이 흔들린다. 차 안이 따뜻하다. 니가 추운 거 같아서 켰어 좀 괜찮아?
영화 쪽 사람들 이젠 잘 못 만나지? 응 아니 그래도 가끔씩은 보지 뭐. 니 영화 찍을 때 에피소드 있었다며? 태종대 등대 씬 말이야. 으응, ㅇ은 내 쪽을 돌아보며 씨익 웃는다. ㅇ은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촬영 공부를 하겠다며 훌쩍 떠났다. 간간이 들어올 때마다 친구들은 저마다 시간을 맞춰 ㅇ과 만났다. 그러나 내가 ㅇ과 단둘이 만난 것은 이민을 가기 전 날과 귀국한 다음 날이었다. 그러니까 ㅇ은 떠나기 전 마지막과 돌아와서 처음으로 만난 친구가 바로 나이다.
떠나기 전 마지막 만난 날, ㅇ과 나는 돼지국밥을 먹으러 갔다. 서면 뒷골목으로 들어가자 ㅇ이 성큼 어느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ㅇ은 부추김치와 새우젓갈, 다대기를 잔뜩 넣은 돼지국밥을 땀을 뻘뻘 흘리며 먹었다. 절반쯤 먹다가 ㅇ이 물었다. 너 이거 못 먹냐? ㅇ은 잠깐 난처한 얼굴이 되더니 다시 국밥을 먹기 시작했다.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내 것까지 들고 가더니 또 절반쯤 먹었다. 돌아와서 처음 만난 날, ㅇ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ㅇ은 지하도 계단을 내려가며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멀미가 난다고 했다. ㅇ은 내가 보낸 가을편지를 받고서 답장으로 봄편지를 보냈던 간극만큼이나 이국생활을 벗어나는데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요즘도 영화 혼자서 보니? ㅇ이 묻는다. 나는 ㅇ과 함께 영화를 본 적은 없다. 그러나 각자 따로 본 영화 얘기를 하곤 했다. ㅇ은 항상 카메라의 시선에 대해 얘기했다. 어느 감독 이름을 대자 그 감독 파출소 씬 조명이 특이하지 않았어? 한다. 스콜세지의 ‘쿤둔’을 이야기할 때도 ㅇ은 미장센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검은 강물이 뒤로 밀려난다. 푸른 형광 빛을 띤 다리가 멀리 보인다. 강변북로 달려본 적 있어? 강변북로? 응 강변북로... 강변북로는 왜? 응 그냥, 나는 얼마 전에 읽은 누군가의 글을 떠올린다. 강변북로 드라이브 코스로 좋아? 응 좋지, 혼자 달렸어? 뭐 아마 그럴 거야, ㅇ은 강물 쪽을 흘끔거리며 운전을 한다. 여긴 저 다리밖에 없잖아, 한강엔 다리가 많아서 좋지, 참 우리 집에서 선유도도 보였어.
ㅇ은 올 2월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대학 때부터 서울에서 하숙을 했고 이민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도 서울에 있었으며 결혼식은 고향에서 치렀지만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ㅇ이 고향에 내려온 것은 언제나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어김없이 친구들에게서 모이자는 연락을 받았다.
ㅇ과 나는 강변도로를 달린다. 차 안은 아늑하다. 나는 자꾸 졸린다. 스르르 눈이 감긴다. ㅇ이 창문을 연다. 강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린다. 머리카락이 강물처럼 너울댄다. 나는 꿈결처럼 강변북로를 달리고 있다.
바람을 많이 맞아 목이 칼칼하다. 또 한 차례 고뿔을 심하게 앓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