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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서양 미술사에서는 트로이 전쟁을 집중적으로 다루겠습니다.)
*트로이 전쟁
아트레우스 가문의 전설
아트레우스 가문은 미케네의 지배자 가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아가멤논이다.
미케네는 그리스 역사에서 크레타 문명과 그리스 문명(아테나가 중심이 되어 활동하던 시기)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기원전 1600-1200 년 간으로 본다. 도리아인, 이오니아 인이 들어오면서 미케네 문명이 문너졌다고 본다.
아트레우스 가문은 신화상으로 거인시대에서 연유한다. 제우스 혈통도 조금은 섞였다고 한다.
후손들인 아트레우스와 튀에스포스 형제는 배다른 동생 크뤼시포스를 죽이고, 국외로 추방당한다. 미케네 시민은 두 형제 중에 아트레우스를 선택하여 왕위를 주었다.l(신화적 이야기는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이로서 아트레우스는 미케네의 왕가를 형성했다.
아트레우스 가문의 피비린내 나는 신화는 미케네 왕 아가멤논과 동생이며, 스파르타의 왕인 메넬라오스에 이르러 트로이 전쟁으로 이어진다.
(1) 아가멤논의 출정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에게는 왕비 헬레네가 아주 아름다웠다. 스파르타에 사신으로 온 트로이 왕자 파리스는 왕비에게 한 눈에 반했다.
마침 잔치에서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가 서로 미모를 다투었다. 심판을 파리스에게 맡겼다. 아프로디테는 자신을 가장 아름다운 미인으로 선정해주면 헬레네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아프로디테는 헬레네를 파리스에 주었다. 파리스는 헬레네를 데리고 트로이로 돌아갔다. (어떤 이야기는 눈이 맞아 함께 갔다 하고, 어떤 이야기는 납치라고도 한다.)
이에 격노한 아트레우스 가문에서는 트로이 정벌을 계획하고, 아가멤논을 총사령관으로 삼았다.
<이피게네이아>
원정날 바람이 불지 않아 배를 뛰울 수 없었다. 얼마 전에 아가멤논은 자신의 활솜씨가 아르테미스보다 낫다고 사냥의 여신을 모욕한 일이 있었다. 이에 아르테미스 바람을 잠재워 버렸다. 신탁에서 자기의 딸을 바치라고 하여, 자기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제의로 바치기로 했다.
제단에서 희생되려는 순간 아르테미스가 나타나서 그를 구해, 자신의 신전에 여사제로 일하도록 했다는 전설이 있다.
<아가멤논의 살해>
10년 간의 트로이 원정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왔을 때, 왕비는 10년이 너무 지루하여 시동생과 바람을 피웠다. 아가멤논이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를 데리고 오자. 화가 치밀어 아가멤논을 살해하고, 시동생을 왕위에 앉혔다.
현장을 목격하고 도망간 자신에는 아들 오레스테스와 딸 엘렉트라가 있다. 자매는 나중에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 원수를 갚는 과정에 어머니마저 죽이게 된다. (아들은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미쳐버렸다고 한다.)
오르테스, 이피게네이아, 엘렉트라의 뒷 이야기도 전개 되지만 다음으로 미루겠다.
4) 트로이 전쟁
* 일리아드 공부를 하기 전에, 트로이 유적의 발굴 이야기를 잠시 알고 갑시다.
트로이 유적지를 발굴한 슐레이만은 고고학자가 아니다. 독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슐레이만은 어릴 때 할머니의 품에 안겨 일리아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그때의 사람들은 모두 트로이는 신화-전설 속의 도시라고 생각했지만 어린 슐레이만은 실제의 이야기라고 믿었다.
그가 자라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리고는 트로이의 도시가 있었던 곳을 찾아 나셨다. 그때 사람들이 트로이의 옛 터라고 믿었던 곳보다 훨씬 북쪽이 일리아드에 묘사한 트로이의 풍경과 유사하다고 믿고 발굴을 했다. 놀랍게도 그 곳에서 트로이 유적지를 발굴했다.
슐레이만은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고고학자였으므로, 발굴로 인하여 오히려 훼손시킨 부분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한 소년의 순진한 믿음이 만들어낸 쾌거라고 말한다.
1998년에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의 배경
기원 전 850년 경에 전설적인 장님 시인 호메로스(호머)는 장편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썼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구전으로 전해오다가 문자화 된 것은 6세기 경이라고 한다.
일리아스는 10년 동안 지속한 트로이 전쟁에서 영웅들의 활약을 그렸고, 오딧세우스는 주인공 오딧세우스가 전쟁이 끝나고 귀향하는 길의 10년 간의 모험담을 그렸다.
일리아스는 모든 사건이 분노에서 시작한다. 오딧세우스는 여러 모티브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낭만적으로 전개된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일리아스는 비극적이다. 일리아스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에 분노한다면, 오딧세이는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괴로워 한다.
작자로 전해오는 호머에 대하여서도 많은 의문점이 있다. 실존 인물인지 허구 인물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가 썼는지 아니면 여러 사람의 작품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야기에서 큰 틀을 잡아 놓고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주장은 받아들인다.
일리아스는 기원 전 3000년 경에 메소포타미아 우룩을 다스린 길가메시 이야기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으로 인간적인 한계를 지각한 길가메시가 영원한 생명을 찾으려 광야를 헤메는 인간적인 고뇌를 노래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몇 개의 에피소드로 나뉘어져 있다.
만남과 우정, 죽음, 모험을 지니고 있다. 길가메시는 세상 끝으로 여행하고, 길과 험난한 여행 끝에 귀환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이 부분은 오딧세이와 닮은 점이기도 하다.
그리스 문학이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 서사시는 호머 이전에도 오래 전부터 전해져 왔다. 호머가 신화를 문학으로 바꾸었다고 볼 수 있다.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는 전 세기에 걸쳐서 서양 문학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일리아드는 15693행, 29권으로 되어 있고, 오딧세이는 12110행, 24권으로 되어 있다.
* 일리아드를 읽기 전에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는 인간 영웅이 주인공들이고, 신들이 배후에 역할을 함으로, 인간과 신이 어울린 대서사시이다. 그리스 대 문학서이다.
영웅이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신은 아예 죽음이란 것이 없다. 그래서 신은 인간의 죽음을 가지고 굴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는 굴복시킬 방법이 없다. 영웅이 탄생한다.
일리아드가 다루는 주제는 분노, 질투심, 그리고 명예이다. 도덕적인 문제는 없다. 불행이나, 죽음도 숙명일 뿐이다. 인간에 닥치는 일이 운명이라면 인간은 순순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일리아드에 나오는 많은 죽음이 도덕과 연관되지 않는다. 그냥 운명으로 순응한다.
헬레네가 파리스에게 납치되었으나. 성 관계도 가지고, 그런 헬레네를 남편인 멜라네스는 나무란다든지 비나하는 대목은 나오지 않는다. 헬레네도 자기 남편에게 미안해 하지 않는다.
일리아드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아킬레스의 행동은 순전히 분노와 질투이고, 그리고 명예이다.
그리스 신은 초월적이고, 비인간적인 신이 아니다. 불멸이고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은 분명하지만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신들 자신도 운명에 복종해야 한다. 그리스 인이 생각한 신은 ‘불멸의 존재’이었지, 사후 세계와는 연결되지 않았다.(이집트는 사후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 이승과 저승의 세계를 만들어서 완전히 단절시킨 것은 초기 그리스도 교 이후에 나타난다. 저승은 천국의 축복과 지옥의 저주로 나눈 것은 그리스도교 초기 사제들이었다. 그러나 일리아드에서는 이승과 저승은 연결되어 있으며, ‘다만 이승의 생명력이 결여된 창백하고, 덧없고, 무의미함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 그리스인들의 현실 세계는 그들의 관념세계(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종속되어 있었다. 현실 세계는 변화를 하면서 운동하는 것이 아니고, 관념세계가 주장하는 고정된 형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즉 현실세계는 변화가 아니고 존재였다.
* 일리아드는 문학작품이다. 문학작품에서 문학성이라고 할 때는 줄거리와 의미와 표현에서 찾는다. 일리아드는 줄거리보다는 의미가, 의미보다는 표현을 훨씬 더 비중 있게 다룬 작품이다.
일리아드도 이야기가 있다. 아가멤논과 아킬레스의 갈등 등, 이야기 요소가 있지만, 기승전결 등의 형식은 보이지 않는다.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는 뜻이다.
고전시대의 문학적 가치는 예술을 통한 목적의 달성에 둔다.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서 도덕이나 교육을 한다. 공동체 단결을 강조한다. 그리스인에게 일리아드는 그러한 목적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일리아드에서는 영웅들의 각자 행동을 독자들이 판단하게만 할 뿐이다 왜냐면 영웅들의 행동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리아드가 갖춘 윤리적 요소는 제한되고 숙명적인 자신의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도 운명에 맞서서 분투하는 모습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거나 바꾸는 것은 아니다. 운명은 신의 소관이기 때문이다. 신이 정한대로 진행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운명이 끝이 나타날 때까지 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헥토르도, 아킬레스도, 죽음을 맞는 많은 영웅들도 모두 그렇다.
자신이 죽인 헥토르에게 아킬레스는 독백한다.
“거기 누워 잠들어라. 내게도 제우스신과 다른 신들이 죽음을 보낸다면 언제라도 운명을 받아들이겠노라.”
일리아드는 이러한 내용으로 전개되면서 그리스인들에게 ‘인간은 분수와 겸허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운명의 마지막까지 인간다움의 실현을 위해서 분투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야기의 전개에 의한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존재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일리아드에는 아직까지 이야기의 구성에 기승전결 따위의 형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후대의 그리스 비극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2) 일리아드(트로이 전쟁)
(1) 원인 - 테티스와 펠레우스 결혼식
펠리온 산에서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프티아의 왕 페레우스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축하객으르 많은 신들을 초대했다. 테티스가 낳는 아이는 재능이 아버지를 능가한다는 신탁을 받고 있었다. 모든 신들이 축복했다.
그러나 결혼식장에 초대하지 않은 불화와 질투의 신인 에리스가 황금 사과 한 개를 나타났다.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 가져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자리에는 서로 미모를 자랑하는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도 참석하였다. 신들은 이 사과를 줄 여신을 고르기를 주저했다. 서로 안면도 있고, 이리 저리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2) 원인 - 파리스의 심판
신들은 심판이 어렵자 인간으로서 트로이 왕자인 파리스에게 심판을 맏겼다. 세 여신은 자신을 뽑아 달라면서 자기의 권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약속했다. 아테나는 전쟁에서 승리를, 헤라는 아시아 전역의 통치권을, 아프로디테는 파리스 아름다운 여인과 행복한 삶을 약속했다. 아름다운 여인에 혹한 파리스는 사과를 아프로디테에게 주었다. 아프로디테는 약속대로 스파르타의 왕비 헤레네가 파리스와 함께 트로이로 떠나가도록 했다.(눈이 맞아서, 또는 납치 라는 두가지 설이 있다.)
(3) 원정 - 준비
아내가 파리스와 트로이로 떠났다는 사실을 안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는 형인 미케네의 통치자 아가멤논을 찾아갔다. 그들은 트로이 원정을 결정했다. 우선 오딧세이를 사절로 트로이에 파견했으나 협상은 실패하고 돌아왔다.
그리스 군은 원정을 결정했다. 많은 전사들이 참여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킬레스이다.
아킬레스는 인간 펠레우스와 여신 테티스의 아들이다. 반은 신이고, 반은 인간의 몸이다. 인간의 몸이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에 어머니는 신들을 찾아다니며 영생을 얻기를 바랐다. 아킬레스를 지옥을 흐르는 스틱스 강물에 담그라고 했다. 발목을 잡고 강물에 담궜다. 그러나 손에 잡힌 발목에는 스틱스 강물이 닿지 않아서, 아킬레스에게는 하나의 약점이 되었다.
트로이 원정을 결정하지 그리스 전역에서 전사들이 모여 들었다. 아가멤논을 왕 중 왕으로 뽑고 총사령관이 되었다.
(4) 출정
출정하는 날, 바람이 불지 않아 배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가멤논의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아르테미스 신전에 희생제물로 바친 이야기는 앞에서 했다.
(생략)
(5) 트로이
그리스 군은 별 어려움 없이 트로이에 도착하여 성 앞 넓은 벌판에 진을 쳤다. 10만 대군이었다. 이에 맞선 트로이는 약 1만 명의 병사라고 한다. 그러나 트로이도 동맹군을 합치면 약 5만이라고 했다.
그리스 군이 처들어 왔을 때의 트로이 왕은 늙은 프리아모스 였고, 아들 헥토르가 용감한 지휘자 역할을 맡고 있었다. 전쟁은 9년이나 더 끌었고, 헥토르는 용감하게 방어하고, 싸웠다.
(6) 전쟁
그리스 군은 트로이를 포위하고 공격하면서 전쟁은 10년 째로 접어 들었다. (일리아드는 마지막 1년을 집중적으로 노래한다.)
이때 두 명의 여자 포로를 잡아와서 아가멤논과 아킬레스의 시중을 들게 했다. 둘은 여자 때문에 사이가 멀어져 버렸다. 아킬레스는 전투에도 나가지 않았다. 화가 난 친구가 아킬레스의 갑옷을 빌려 입고 전투에 나가서 헥토르에게 죽음을 당한다. 아킬레스는 분노하여 다시 무장하고 친구의 죽음을 복수하러 전장에 나갔다.
전쟁은 치열했고, 신들도 트로이 편과 그리스 편으로 나뉘었다. 그리스를 돕는 신은 아프로디테에게 패한 헤라, 아테나를 비롯하여 포세이돈, 헤파이토스, 헤르메스 등이고, 트로이를 지원하는 신은 아프로디체, 아레스(아프로디테 연인이다.), 아폴론, 아르테미스 등이었다. 제우스는 신들은 전쟁에 개입하지 말라고 했으나 말이 먹혀들지 않았다.
아킬레스와 헥토르는 성을 세 바퀴나 도는 쫓고, 쫓기면서 사력을 다해서 싸웠다. 헥토르는 아킬레스가 던진 창을 맞고 쓰러졌다. 아킬레스는 죽은 헥토르를 수레에 메달고 성을 돌았고, 그 장면을 바라보는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는 가슴은 찢어질 듯 했다. 협상을 벌려서 헥토르의 시신을 찾아왔다.(신들이 아킬레스의 잔인한 행동을 비난했다 한다.)
(7) 성의 함락
트로이는 아마존 여전사의 도우러 왔으나 여왕이 아킬레스에게 죽었다.(아마존 왕국은 일반적으로 이민족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아킬레스도 화살을 발목에 맞고 죽는다. 아이아스와 오딧세우스가 아킬레스 시신을 찾아왔다. 둘은 아킬레스의 갑옷과 무기를 서로 갖으려고 다투었으나 오딧세우스가 갖게 된다. 아이아스는 다툰 것이 부끄러워 자살한다.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파리스도 화살을 맞고 죽었다.
오딧세우스는 크다란 목마를 만들어서 병사들이 성안으로 침투하게 했다.
아포론의 사제 라오콘이 목마를 성에 들이면 트로이가 멸망한다는 예언을 했다. 그는 신의 영역인 인간이 예언했다는 죄목으로 신에게 벌을 받아 죽는다.
목마에 숨어서 성 안으로 들어온 그리스 군이 성문을 열어서 트로이는 함락되었다.
8) 전쟁은 끝나고, 전쟁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
고대인들은 청동기 문명의 끝인 미케네 문명 무렵(BC1275-1190)에 트로이 전쟁이 실제로 있었다고 믿었다. 독일 고고학자 슐레이만은 일리아드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발굴 작업을 했다. 이후로 계속하여 오늘까지도 발굴 작업은 이어졌다. 1984년에는 현대적인 기기로 발굴하면서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트로이가 있던 지역으로 추정하는 언덕에서 고대 유물이 발견된 것은 사실이지만 트로이 전쟁과 연계시킬 결정적인 유물을 발견되지 않았다. 전쟁의 원인으로도, 통행의 요지에 자리 잡은 트로이가 배의 통행세를 거두었다. 무역으로 먹고 살던 그리스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편다.
한편으로 힛타이트 제국이 트로이를 지배하면서 두 세력의 충돌지점인 트로이에서 미케네와 전쟁은 필연적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전쟁의 여부를 떠나서 일리아드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400년 세월이 걸렸다. 그 동안에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표현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서양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신화, 더욱이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일리아드에서 역사 읽기>
일리아드의 배경이 된 트로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는 일리아드에 잘 묘사되어 있다. 트로이의 철부지 왕자가 스파르타의 미녀 왕비를 납치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학적 사건은 분명하지만 역사적으로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그래서 일리아드가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들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일리아드 라고도 하고, 트로이 전쟁이라고 하는 이유는?
둘 다 도시의 이름이다. 서로 다르게 부르는 것은 다른 민족이기 때문이다. 아가멤논과 아킬레스로 알려진 원정군은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인 이다. 그렇다면 트로이는?
트로이는 터키 지역의 유목민이 뿌리인 히타이트 족이라고 한다. 히타이트 족은 세계 최초로 철기를 사용하여 한 시기를 풍미한 세력이다. 당시에 이집트는 람세스 2세의 지도로 최강의 국가였다. 그러나 아직 청동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철기를 사용하는 힛타이트 세려과 청동기를 사용하는 이집트의 람세스 2세 맞붙은 젼쟁이 ‘카데시 전투(BC1274)이다. 이집트 기록으로는 자기들이 이겼다고 하나. 사실은 패배에 가까운 무승부라고 본다.
이때의 그리스는 크레타 섬과 에게해. 미케네 문명의 스파르타 등지의 도시 국가로서, 아직 힘이 미약하여 트로이와 전쟁을 할 실력이 되지 못했다. (호머는 이들을 아직 그리스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카이아 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는 지리상으로 이집트 문명을 받아들인 이집트 세력권에 속했다. 람세스 2세와 힛타이트가 전쟁을 하였듯이, 트로이 전쟁을 힛타이트 세력권과 이집트 세력권의 충돌로 보기도 한다.
이 시기에 조금 앞서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가 크레타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친 신화가 있다.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있지만, 크레타(미노스 문명)의 입장에서 자기 나라 괴물을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려 물리친다는 것은 그리스 세력의 주도권이 크레타에서 그리스 본토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철기 문명권이고, 다다넬로스 해협의 주도권까지 가진 트로이와 한 판 승부를 벌려야 하는 그리스로서는 무척 두려워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전쟁을 시작할 무렵을 묘사한 일리아드에는 두려워하는 그리스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끝났고, 에게해의 해상 지배권은 그리스에게로 넘어 갔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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