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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보이지 않는 난민살이 - 미얀마 친족 난민은 서럽다
며칠 전에 미조람 마라디스트릭 안에 있는 3개의 미얀마 난민캠프를 방문하였다.
뉴델리에서 아이졸 까지 비행기로 3시간, 아이졸공항에서 룽레이 까지 지프로 7시간, 룽레이에서 티빠타운 까지 지프로 6시간, 티빠타운에서 티빠빌리지와 종그린까지 지프로 각각 30분~ 2시간 걸리는 여정이었다.
미조람주 전체가 산악지역이고 산들의 경사가 다 가팔라서 도로 폭이 좁고 도로가 마치 용수철처럼 산을 감고 있는데다 비포장도로가 많아서 장거리여행이 참으로 어려운 곳이었다. 차가 덜컹거리며 아찔해지는 순간마다 ‘이렇게 험지인줄 알았으면 오지 않았을 텐데.’ 하며 후회하였다. 뿐만 아니라 허리가 시큰시큰 아프고 저릴 때 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기로 다짐하였다.
그러나 여러 우여곡절 끝에 난민들을 만나게 되면 막상 그런 마음이 다 사라지고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감내하며 살고 있는 그들이 너무 가엾고 안타까워 눈물이 앞을 가렸다. 모두 다 파리 한 마리 잡지 못할 것은 순하고 선량한 얼굴들이었다. 자기 권리 주장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이 묵묵히 순종하는 겸허와 인종이 몸에 베인 한 마리의 양이고 한 마리의 소이며 벌거벗은 산 위에 근근히 서있는 기근에 시달리는 나무들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르고 자기들을 만나러 먼 길을 달려온 나에게 진정어린 감사를 하며 두 손을 모으는 그들의 마음이 진하게 내 가슴을 울렸다.
무엇보다 환영의 인사와 노래, 춤들이 너무 진지하고 경건해서 마치 거룩한 성전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난민들 전체를 대표한 지도자의 인사에 “우리가 난민이 되어 이곳에 온 지 3년이 지났지만 아무도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난민을 돕는 단체가 많다고 하여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라고 기대하였는데 지금까지 어떤 외국인 단체도 오지 않았습니다. 당신만이 외국인으로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도와주시는 유일한 분입니다. 한국교회만이 우리를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단체입니다. 우리 난민들을 대신해서 당신과 한국교회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의 인사는 외마디 비명이었고 절규였으며 불안과 절망의 신음이었다. 그의 인사는 나의 폐부를 찔렀고 긴급구호마저도 큰 이슈를 따라 움직이는 지구촌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세상에 수많은 NGO단체가 있지만 미얀마 내전은 세계 뉴스에서 핫 이슈가 되지 못하기에 팔레스틴과 우크라이나처럼 NGO단체들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한 한국 TV에서도 미얀마 내전과 난민들의 이야기가 메인 뉴스로 나온 적이 없다. 내전 초기 뉴스가 뜨긴 떴지만 그것도 잠깐이었고 사람들 기억에 남을 정도의 강력한 이슈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뉴스를 통해서 세계 소식을 접하는 우리 교우들이 미얀마 난민들을 위해 모금하는 나에게 “미얀마에 전쟁이 일어났어요? 언제 일어났어요?” 또는 “그 나라가 아직도 전쟁 중인가요?” 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난민 지도자 분들에게 미얀마 내전이 세계의 핫 이슈가 되지 못해서 세계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점과 혹시 알더라도 내전이므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처럼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 혹시 안다고 하여도 미얀마 내 종족간의 권력 투쟁으로 이해하여 무관심할 수 있는 점, 혹이 내전과 난민의 실체를 안다하더라도 미조람이 너무 오지이고 산악지역이어서 접근하기 어려운 점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전이므로 군소 NGO단체들이 참여하기 어렵다는 점 등을 말하며 세상의 무관심에 대하여 이해와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세상의 무관심에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높이 들라고 하였다. 나의 권면이 참으로 공허한 것이었지만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도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인도로서는 자국민 보호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조치이지만 난민으로서는 서러울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조람 정부와 교회는 미얀마 난민들을 같은 ‘에쓰닉 브라더'(Ethnic Brother/ 소수민족 형제)로 환대하며 자신들의 빌리지나 타운 밖, 최소한 5리에서 20리 밖에 난민캠프를 세울 수 있도록 허가를 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오두막을 지을 수 있는 건축허가와 대나무 자재 그리고 주방용품과 침구와 옷들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이 오두막을 짓고 촌락을 형성한 후, 난민캠프 둘레 빈 공터에 채소를 가꾸고 병아리를 키우려고 하자 인도 빌리지 위원회에서 제재를 가하였다. 산에서 채취하는 것도 자유롭지 않았다.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도 허용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에스닉 부라더’ 라고 해도 미얀마 난민은 인도인이 아니고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피난을 떠나올 때 가지고 온 돈과 금붙이로 쌀과 부식을 사서 연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도 지역 교회와 자선단체에서 오는 긴급구호가 줄어들며 난민생활 2년차가 되어 모든 것이 바닥이 났을 때야 비로소 인도 빌리지 위원회는 그들에게 채소를 가꾸고 닭을 키우며 강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난민들은 저마다 열심히 산자락을 일구어 씨앗을 뿌리고 병아리를 사서 키웠고 여분의 것들을 인근의 시장에 가서 팔았다. 그리하여 부족한 양식이나마 스스로 만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3년차에는 채소를 가꾸고 물고기를 잡고 닭을 키울 수는 있어도 시장에 내다 팔수 없도록 새로운 제재를 가하였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미얀마 인에 의한 인도인 살인사건이 일어나서 난민들의 외부출입이 완전히 통제되었다. 난민들은 빌리지위원회의 출입 허가 없이는 난민캠프 밖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독안의 쥐처럼 난민캠프 안에서만 살도록 허용이 되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투명 감옥(監獄)에 갇혔지만 인도 빌리지 위원회가 주는 제약을 거부할 수가 없다. 야속하고 서럽고 비참하고 구차해도 생존을 위해서 불평 없이 원망 없이 감수해야만 하는 터다.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조람 주정부의 딜렘마를 이해하였다.
영국이 식민지 통치를 하기 전에 그들은 '마라족'으로 한 소왕국의 백성이었다. 영국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통치권자는 바뀌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몸붙혀 살았다. 그런데 1948년 영국이 인도와 미얀마를 독립시키면서 '마라족'의 땅을 남북으로 금을 그어 서쪽은 인도에 동쪽은 미얀마에게 주었다. 그리하여 '마라족'은 인도인과 미얀마 인으로 나뉘었다. 하루아침에 부모는 인도인이 되고 아들과 딸은 미얀마인이 되는 희비극이 일어났다. 강대국에 의해 강제로 나뉜 그들은 '마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서로 국경선을 넘나들며 '마라족'의 끈끈한 혈연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런 전통과 역사 속에서 미조람의 주민들은 '에쓰닉 부라더'로서 난민이 된 미얀마 소수민족인 친족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인도 시골 마을의 주민보다도 난민들의 수가 두, 세배가 넘게 들어와 주민들이 도저히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이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미조람 주민들의 '에쓰닉 부라더'에 대한 호의와 관심, 동정심이 사라지고 나눔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미조람 주정부가 '에쓰닉 부라더'인 미얀마 난민들에게 베풀어준 호의와 혜택은 참으로 큰 것이다. 비록 일시적이지만 안정된 주거지역을 허락하고 난민집단캠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난민들에게 생존의 터를 마련해주었으나 난민들의 상행위를 금한 것은 주정부도 자국민 보호차원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정부는 자국민의 생계와 민원을 우선시하기에 난민들에게 채취와 수렵을 허용하고 여분의 채소와 닭을 인도인들의 시장에 와서 판매하는 것을 허락을 하였다가도 민원이 발생할 경우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취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난민 지도자들은 그런 중에도 고마운 것은 미조람 주정부가 도로공사와 다리공사 등의 토목 공사에 난민들을 일일 노동자로 써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이 한 달에 열흘이나 보름 정도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비록 하루 노임이 한국 돈으로 2,000원에 불과하지만 그나마도 일이 없어 놀 때가 많아 불안하고 우울하다고 하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제삼자인 나는 양쪽의 입장이 절로 이해가 되었다. 어느 쪽도 옳다 그르다, 잘 한다 못한다고 말할 수가 없어 서로 사랑하며 도우며 양쪽이 다 잘되도록 기도하며 속히 미얀마 내전이 끝나길 빌었다.
그리고
망설임 끝에 나의 최대의 관심사인 내전이 언제 끝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모두들 어두운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며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그 중의 몇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어느 한 쪽이 다 죽어야 전쟁이 끝난다.’고 하였다. 카오스의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 내렸다.
미조람 남동쪽으로 피난 나온 대부분의 난민들은 미얀마 북서쪽에 위치한 친주에서 피난을 온 친(CHIN) 족이며 미조람 주에 사는 ‘마라족’과 ‘에쓰닉 부라더’이다. 친족의 인구는 100만 여명이며 대부분이 크리스천이다. 이들은 친주(CHIN STATE) 안에 살기 때문에 친족이라고 불리지만 그들은 53개의 소수민족으로 나뉘어져 있다. 친족은 미얀마 독립 이후에 영국의 식민지 통치에 부역했다는 죄목과 함께 소수민족으로서 박해와 교육, 의료, 교통, 개발 등 모든 분야에서 차별을 받았다. 이들은 1988년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참여하였으며 2021년 2월 1일 쿠데타를 일으킨 민 아웅 훌라잉의 군부 독재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친주에는 미얀마의 민주화와 소수민족의 지위와 권리 회복을 위해 시민군으로서 정부군과 싸우는 프리덤 파이터들과 로칼 프리덤 파이터(로칼 자위군)들이 대략 주 인구의 1% 정도이다. 현재 친주에는 자생적으로 형성된 21개의 프리덤 파이터(로칼 자위군) 그룹이 있으며 그들은 친주 내에 작은 왕국처럼 각자 영역을 정하고 경쟁적으로 자신들의 자위군과 전투비용 확보를 하고 있다. 그리하여 친주는 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주 인구의 거의 절반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방글라데시, 인도 미조람, 인도 마니푸르, 인도 나갈랜드 그리고 밀림과 양곤으로 도망을 쳤다고 한다.
2021년 쿠데타가 일어나고 내전이 시작되었을 당시 친주 내의 프리덤 파이터(로칼 자위군)들은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일치단결하였다. 당시에 그들에게는 무기가 거의 없었지만 군부군의 공격이나 전투도 치열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를 거듭하면서 미얀마 민주화를 원하는 해외 NGO단체들의 지원, 해외 동포들의 지원으로 친주 내의 프리덤 파이터(로칼 자위군)들이 집단으로 중무장을 하며 게릴라전을 탈피하여 앞장서서 정부군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미얀마 국민통합정부의 활동으로 시민군의 전투역량이 크게 강화되어 시민 방위군(통합정부의 군인)이 여기저기서 군 정부군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위기의식에 빠진 미얀마 정부군이 친주 프리덤 파이터(로칼 자위군)들의 진지에 융단 폭격을 가하여 타운과 마을들이 쑥대밭이 되어 더 많은 난민들이 살 길을 찾아 인도 미조람주로 떠났다. 이렇게 나라를 떠나 난민이 된 사람들이 현재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없지만 절반을 넘어 섰다고 한다. 또한 비록 나라를 떠나지 않았지만 밀림으로 떠났거나, 정부군의 발길이 미치기 어려운 인도와 미얀마 국경지대에서 미얀마 쪽에 난민캠프를 만들거나, 우선 전투를 피해서 전투가 없는 지역으로 이동한 국내 난민들이 최근에 많이 발생하였으며 그들도 국외 난민들과 마찬가지로 식량문제에 직면하였다고 한다.
난민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첫째 그룹은 군부독재를 반대하며 그들에게 저항하기 위하여 그들이 들어오기 전에 피난을 나온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난민들이 이에 해당된다. 그들은 군부독재와 정부군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고 그들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를 품고 있다.
둘째 그룹은 장기화 되고 있는 정부군과 시민군 및 로칼 자위군들의 전쟁을 반대한다. 시민군과 로칼 자위군이 정부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면 정부군은 즉각 병력을 증강하여 전투가 일어났던 지역을 융단폭격으로 숲과 마을, 건물들을 초토화시켰다. 그러면 시민 방위군의 반격이 시작되는 전투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에 지친 사람들, 그 동안 피난을 떠나지 않고 집과 마을을 지키며 농사를 지었던 사람들이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전쟁의 공포에 떠밀려 난민이 되었다. 이들은 늦게야 난민캠프에 들어온 후발주자로서 정부군과 시민군의 전쟁이 멈출 줄 모르고 맹목으로 치닫는 것을 두려워한다.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난민들은 시민군 또는 로칼 자위군이 자기 마을들을 수복하면 곧 바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후자에 속한 난민들은 밀고 당기는 전투가 어느 한 쪽이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티빠 D캠프에서 어느 난민의 집을 방문하였다. 초중고생들로 보이는 아이들이 다섯 명이 있었다. 한 아이에게 부모님에 대해 묻자 부모님이 함께 피난을 나왔다가 다시 마을로 돌아가서 할머니랑 함께 지낸다고 하였다. 돌아간 이유는 긴급구호로 받는 식량이 부족하여 농사를 지어 보충하려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농사철이 끝나면 양식을 가지고 돌아올 것이라고 하였다.
인도로 넘어 와서 총칼로 생명의 위협은 받지 않지만 양식이 부족하여 영양실조와 굶주림의 위협을 당하게 되자 부모님들이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녀들을 난민캠프에 남겨두고 농사를 지으러 불안한 가슴을 싸매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부모님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밟혔다.
난민 지도자들에 의하면 많은 같은 마을, 같은 가족, 같은 교회에서도 절반의 사람들이 피난을 나오지 않고 고향에 잔류하였다고 하였다. 공무원들, 학교 교사들, 고령자들, 농사 짓기를 중단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가문의 대표들, 가족 중에서 집을 지키려는 한두 명의 사람들, 죽어도 피난을 떠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죽어도 자기 집에서 죽기를 원하는 노약자들, 고향과 교회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남았다. 그들은 피난을 떠나지 않았지만 자기 집에서 마을에서 정부군에게도 로칼 자위군에도 들키지 않으려고 겨우 숨만 쉬고 지낸다고 하였다.
인도 친척집에서 지내고 있는 어떤 청년이 랄렌피교회의 교우들 5천 명 중에 2천 명 정도만 피난을 나왔다고 하였다. 담임 목회자인 자신의 부친이 교회와 교우들을 지키고자 피난 나오지 않았는데 정부군과 로칼 자위군 사이에서 엄정 중립을 지키며 군부독재와 민주주의 등에 대하여 일체 함구하고 있다고 하였다. 지난 11월 이래로 정부군의 공습과 자위군의 반격 속에서 목숨이 아슬아슬하였다고 하였다.
다른 난민캠프에서 공무원과 학교 교사였던 분들을 만났는데 그 분들은 공무원직, 교사직을 포기하고 왔다고 하였다. 만약에 정부군이 이겨 전쟁이 끝나서 고향으로 돌아가더라도 그들은 공무원이나 학교 교사로 복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공무 이탈 죄로 벌을 받게 돌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에 시민군이 이기면 공무원직, 교사직에 복귀될 수 있으나 앞날을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난민 지도자는 자신이 속한 정당에서 반독재, 반정부활동을 하였으므로 현 정부에서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자기가 속한 정당의 대표가 통합정부에서 장관직을 맡게 되자 그의 임직을 반대하여 탈당하였다. 그의 탈당 사실을 모르는 자위군들 중 그가 소속한 당 대표의 장관직 임직에 분노한 사람들이 그가 대표의 배후라고 생각하여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는 자기가 속한 당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국민의 평화와 안전과 복지를 위하여 독재정부와 통합정부 사이에서 전쟁을 중재하며 피스 메이커 역할을 감당하기를 바랐다고 하였다. 그는 독재정부를 몰아내고 민주주의 정권을 세우려는 통합정부가 구성됨으로 말미암아 미얀마는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무한 전쟁의 시대에 돌입하였다고 비통해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통합정부의 승리와 난민들의 귀향을 기원하였다.
난민지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염려하는 것은 국민징병제도였다.
신년축제인 ‘띵얀’이 끝난 이후 4월 중순경에 23세 ~ 35세 남성의 징집이 시작된다고 하였다. 현재 많은 청년들이 징집을 피해 인도와 방글라데시, 태국과 싱가포르 등으로 도망치는 길을 택하고 있으나 어떤 청년들은 해외로 떠나는 대신 시민군과 로칼 자위군에 합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종교인, 결혼한 여성, 장애인, 복무 부적합자, 군 복무 면제 받은 자가 아니면 나라를 완전히 떠나 국적을 바꾸지 않는 이상, 징집 대상자가 징집을 거부할 경우에는 3~5년 형과 벌금형을 받게 되어 징집을 피하기는 쉽지 않다.
난민캠프의 많은 청년들이 그 나이에 해당되므로 정부의 소집에 응하지 않을 경우 그들은 자동으로 범법자가 된다. 통합정부가 승리할 경우에 그들의 범법은 저항으로 취급되며 칭송과 인정을 받을 것이나 현재 그 법을 입안한 군 정부가 승리할 경우 고향으로 돌아가면 범법자로서 곧 바로 감옥에 가야 되며 많은 불이익과 차별과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들은 이쪽과 저쪽에 끼여서 샌드위치가 되어 있으며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징병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저항군이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난민의 무력감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다.
지도자들이 국민징병제도 때문에 절망하는 것은 독재정권의 속내를 가늠하기 때문이다.
군부, 독재정권이 국민징병제도를 실시하는 것은 내전을 치루기 위해서 인바 이는 저항군과 화해하거나,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군부독재를 포기하거나, 민주주의를 위한 개혁, 소수민족과의 대화와 균형 발전을 위한 그 어떤 협상도 하지 않겠다는 군부의 단호한 의지의 선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군부의 강경한 태도에 대응하는 통합정부와 시민군, 로칼 자위군의 자세와 태도 또한 서릿발처럼 차갑고 단호할 것이며 그리하여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고 전쟁을 계속 진행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
난민지도자들은 군부가 징집 군인들을 시민군, 로칼 자위군과 전투에 투입해서 최근 전투에서 패배한 설욕을 풀며 소수부족민들의 작은 부대들을 대상으로 인해전술을 쓸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어느 한 쪽이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군부의 중심 세력인 버미족이 군부의 패망을 버미족의 권력 상실로 이해하게 되면 다수의 버미족들이 소수부족들이 완전히 항복할 때까지 결코 전쟁이 끝내지 않을 것이라는 거였다. 통합정부는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 생명을 부지할 수 없게 되므로 승리를 위해서 죽을 때까지 치열하게 싸울 것이어서 전쟁을 마냥 질질 끌며 게릴라전 등으로 장기화시킬 거라는 거다. 전쟁의 장기화 속에서 산천과 농업은 피폐해지고 가족과 마을들은 풍비박산이 나며 전쟁과 폭동, 폭력, 테러가 일상화되어 삶이 그대로 지옥이라는
것이었다.
이렇듯 끝나지 않는 전쟁에서 보통 사람들만 고난을 당한다. 군인과 군속으로 전쟁에 동원되며, 세금으로 전쟁자금을 내며, 전쟁으로 가정과 친인척이 해체된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듯이 전쟁은 보통 사람들의 안전과 생명, 평화와 행복을 삼킨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권력욕과 피에 굶주린 사람들을 영웅으로 만들며 생명을 우롱한다.
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난민으로 살아 온 그들의 서러움과 불안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들의 불안과 슬픔에 감염되어 마치 나 자신이 10월 유신의 상황에 있는 것처럼 절망과 저항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이래저래 비참하고 고통스런 난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주님! 당신은 난민들의 고통을 아십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출어 주옵소서. 주님! 저로하여금 난민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까지 굶주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저와 우리 교우들을 써주시옵소서.”라고 독백하는 것 외에는.
2024년 3월 13일 수 축시에 쓰고
3월 25일 묘시에 다시 정리해서 올리다.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