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에서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몽골 전통주택인 “게르”에서 숙박하는 것이다. 보통 4인이 한 게르에 숙박한다. “엘승타슬라”의 mini 사막인 “Bayan Gobi(풍부한 사막이라는 뜻)”에서의 밤은 무척 추웠다. 기온도 차겁고 바람도 쌩쌩 불었다. 이 곳에서 camp fire도 하고 몽골의 유명한 밤하늘의 수 많은 별들로 구성된 은하수도 보았다. 몽골 국립공원인 Terelji에서는 게르 안에 화장실과 샤워 시설이 있는 초현대식 게르에서도 하룻밤 잤다. 몽골도 자꾸만 현대문명의 편리함으로 이끌려 간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수도인 울란바타르에서 동쪽으로 차로 약 50분 가면 갈 수 있는 곳에 43m의 거대한 “칭기스 한”의 기마 동상이 몽골 제국 성립 800주년을 기념하여 2016년 건립되었다. 동상은 기마동상으로서는 세계 최대의 크기이며 스테인레스강 250톤으로 몽골 제국 36명의 왕의 숫자대로 36개의 기둥 위에 제작되었다. 동상은 “칭기스 한”이 태어난 Onon강 유역인 Khentii(헨티) 방향인 동쪽을 응시하며 황금 채칙을 들고 있다. 동상을 건립한 위치는 옛날 “칭기스 한”이 채칙을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나중에 그 황금 채칙을 발굴한 장소에다가 건립하였다고 한다.
몽골 국립박물관을 방문하여 몽골의 역사를 가이드 Uljii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몽골의 종교는 라마교이다. 몽골인의 53%가 라마교를 믿는다. 그리고 전통 신앙인 샤머니즘이 그 뒤를 잇는다. 라마교는 누루하치의 후금(추후 1636년 大淸國으로 개명)이 우리나라 조선을 침략한 1636년 병자호란보다 2년 앞선 1634년에 몽골을 정복한 후, 모든 몽골 남자들은 라마교 승려가 되도록 강요하고, 명을 따르지 않는 남자들은 각종 고문으로 회유하거나 죽였다. 당연히 라마교 승려는 결혼을 하지 않아서 자손이 없다. 그리하여 몽골족이 더 이상 인구가 늘지 않고 자연적으로 인구가 감소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몽골이 1921년 소비에트 소련의 지원으로 독립될 때까지 287년 동안 淸의 지배를 받아왔다. “칭기스 한” 같은 지도자가 있어서 세계를 정복하고 호령했던 몽골도 국력이 약화되고 분열되어서 남의 나라에 거의 3백 년 동안 지배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말해 준다. 독립 이후에도 원래 몽골 땅이였던 영토의 반은 청이 몽골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지금의 중국 “내몽고 자치구”가 옛날 몽골의 땅이다. 우리나라만 남북으로 분단된 것이 아니라 몽골도 우리와 같은 동병상련이다.
몽골 수도인 울란바타르 정부기관이 몰려있는 수흐바타르 광장에는 정부청사 정면 가운데에 “칭기스 한”, 그의 셋째 아들이자 2대 한인 “오고타이” 그리고 “칭기스 한”의 손자이며 원나라의 초대 황제인 “쿠빌라이” 좌상 조각이 좌우로 있다. 광장 한가운데는 청나라로부터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독립을 쟁취한 독립영웅 수흐바타르 장군의 기마 동상이 있다.
몽골에서는 캐시미어 털을 많이 생산하여 가격도 저렴하고 품질도 괜찮은 것 같아 겨울에 입을 스웨터 하나 사 왔다. 올겨울은 촉감이 부드러운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몽골 여행의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면서 보내야겠다.
여행 도중에 몸이 조금 아픈 동기도 있어 고생했으나 우리 동기 한 사람의 도움과 여러 동기들의 관심으로 병이 악화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휴대폰을 국립역사박물관 화장실에 놓고 와 나중에서야 발견하여 급히 가이드가 박물관에 연락하고 가이드의 기지로 빨리 휴대폰을 회수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13명의 여행 동반자들의 배려와 도움으로 무사히 4박 5일의 몽골 여행을 즐겁고 행복하게 마칠 수 있어서 모두에게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