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멕시코계 미국 여가수 티시 히노요사가 부르는 <Donde Voy,어디로 가나요?>, 이 노래는 미국-멕시코
국경을 넘어 밀입국하는 멕시코인들의 애닳은 사연과 애환을 그리고 있습니다
* 쿠르베가 그린 프랑스 노르망디 반도, 에르트라의 <코끼리 절벽>
[ 천사를 그리기를 거부한 사실주의 거장,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7) ]
프랑스 동남부 스위스 국경에 가까운 작은 도시 오르낭에서 태어난 쿠르베는 중학생 때부터 무명의 지방화가에게 그림을 배우며 소질과 관심을 보였으나 부모들은 교양을 넓히는 일반적 취미 수준에서 머무르기를 바랬습니다.
21세 때인 지주였던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공부를 위해 파리로 나왔지만 곧 그 공부를 때려치우고 화가를 지망하여 미술 아카데미에 다니며 루브르 미술관에서 바로크 풍의 거장들의 작품들을 열심히 모사하며 기초를 다져 나갔습니다.
화단에 알려질 즈음인 1848년의 프랑스 사회는 2월 혁명으로 공화제가 선포되는 등 계속되는 혁명의 기운에 젖어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림과 아울러 미술비평가로 데뷔하며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예술의 방향을 모색하던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와 "20전 짜리 책을 읽는 자들이야말로 진정한 독자층이다"라고 대중성의 새로운 가치를 외친 샹플뢰리 등과 친교를 나누며 사회변화와 현실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한편 쿠르베는 고향 오르낭을 주제로 사실적인 그림들을 그리며 화단의 주목을 받게됩니다. 그는 꼭 아름답지 않은 것도 그것이 현실이면 있는 그대로 그릴 수 있는 것이 회화라고 생각하고 보통 사람의 생활 모습이나 노동하는 모습을 화제로 택했으며 그림에 과장이나 이상화를 반대하였습니다.
* 쿠르베 말년의 그림 <시용성>
또한 자기 그림이 당시의 널리 인정된 인습에 대한 항의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고 신흥부자들인 부르주아들을 깜짝 놀라게 하여 그들이 자기 만족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전통적인 상투적 수법의 능숙한 조작에 반기를 들어 타협하지 않는 예술적 성실성의 가치를 선포하려고 했습니다.
시골생활의 한 장면을 그린 <오르낭의 식사 후 휴식>, 돌 깨는 사람의 힘찬 노동을 가감없는 사실풍으로 묘사한 <석공들>, <마을 처녀들>, <미역감는 여인들>,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등을 발표하며 화단의 비난과 칭송을 동시에 받게 됩니다.
1855년,<리얼리즘(사실주의)>이라는 명칭이 화단에 정면으로 드러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오르낭 읍장을 비롯해 모든 사람을 한 명씩 아틀리에에 불러서 그렸다는 대작 <오르낭의 매장>과 자신의 예술적 생애의 7년에 걸친 시기를 정의하는 현실의 비유라는 내용으로 그린 <화가의 아틀리에>가 그해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미술전에 출품을 거절당하게 된 것입니다.
분노한 쿠르베는 박람회장 바로 건너편에 자기 비용으로 가건물을 세우고 60점의 작품을 모아 개인전을 열어 관전 심사위원회에 정면으로 도전했고 <리얼리즘>을 내세우며 "나는 리얼리스트-사실주의자"라고 선언했던 것이죠. 당시 낭만파 대가엿던 들라크루아는 관객 없는 그의 쓸쓸한 전시장을 찾아 패기 넘치는 쿠르베의 열정에 감복하며 그의 재능을 인정했다고 하네요.
"나는 사회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자요, 공화주의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혁명의 지지자며 무엇보다도 리얼리스트-즉 진짜 진실의 참 벗입니다"라고 어느 편지에 밝히고 있듯이 1848년 2월 혁명에 참가한 후 정치, 사회적 문제에도 정면에 나서길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 후 수년간에 걸쳐 제2제정(나폴레옹 3세 통치를 말함)의 반동적인 미술 당국과 대립해 온 그는 위험인물로 취급받았습니다.
1860년대 이후 후원자가 생기는 등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게 되며 1870년대는 화가로서 열광의 절정에 위치하고 제2제정 정부가 레지옹 되네르 훈장을 "훈장보다 자유가 아쉽다"라며 거절하기도 합니다. 그 후 <예술가 연합>의 회장으로서 파리의 기념 건조물과 미술품의 보호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으면서도 방돔 광장의 원주인 <나폴레옹 기념탑>을 쓰러뜨린 사건의 책임을 지고 6개월간 투옥을 당했고 급기야는 스위스로 망명하게 됩니다.
* 방돔 광장에서 쓰러져있는 <나폴레옹 기념탑>
스위스 레만 호반에서 망명생활에 들어간 만년의 쿠르베는 스트레스와 몸이 부어오르는 수종병으로 고통받으며 많은 초상화와 풍경화를 그립니다. 1877년 마지막 날 프랑스에 남겨둔 작품과 전 재산이 경매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나는 천사를 그리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라는 말에서 쿠르베의 사실주의적 회화관을 알 수 있듯이 고전주의의 이상화나 낭만주의적인 공상 표현을 배격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할 것'을 주장한 그의 회화관은 일상생활에 대한 관찰자적 밀도를 촉구한 점에서 미술사상 큰 의미를 남겼습니다.
[ 작품 감상 ]
* 화가의 아틀리에
쿠르베는 19세기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였습니다. 사실주의의 개념은 시대와 입장에 따라 다르게 정의될 수 있지만,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단순히 대상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넘어 '현실에 대한 합리적, 과학적 접근'을 중시하는, 비판적인 현실인식을 담은 예술이었죠. 이 같은 그의 예술적 입장은 파리 코뮌 당시 혁명의 편에 서게 하는 등 결국 그를 당대의 정치적 격동으로 내몰았다.
"나는 사회주의자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자요, 공화주의자이다. 한마디로 말해 혁명의 지지자이며, 무엇보다 사실주의자, 곧 진실의 참다운 벗이다."
이렇듯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이성으로서 예술의 불을 밝힌 쿠르베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제작한 작품의 하나가 <화가의 아틀리에>입니다.
그림을 보면, 화가가 가운데서 풍경화를 그리고 있고, 옷을 벗은 모델과 남루한 어린 아이가 이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좌우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각각 배치돼 있는데, 문인이자 언론인인 샹플뢰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쿠르베는 오른쪽에 있는 이들이 동료화가와 친구, 후원자들이라고 밝히고 있고, 왼쪽에 있는 이들이 일상을 사는 사람들, 그러니까 빈부귀천과 착취-피착취 관계에 있는 다종다양한 인간상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이들 가운데는 사회주의자이자 무정부주의자인 프루동, '악의 꽃'의 시인인 보들레르 등이 보여 쿠르베의 남달랐던 지적, 정신적 배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쿠르베의 사실주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대표작의 하나입니. 화구 (畵具)가 담긴 상자를 짊어지고 막 역마차에서 내린 여행자 차림의 쿠르베 앞에 몽펠리에 시의 미술 애호가인 알프레드 브뤼야스가 마중 나와 인사하는 장면입니다.
맑은 남프랑스의 들녘에 선 화가와 그를 마중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너무도 일상적인, 그렇기 때문에 그림의 소재로서는 걸맞지 않게 보이는 장면을 소재로서 다루었다는 데서 쿠르베의 현실에 대한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생각이 적나라하게 묘출되고 있습니다. 빛으로 충만한 남 프랑스의 풍광은, 쿠르베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밝은 심경의 반영처럼 시사됩니다.
* 오르낭의 매장
이 작품 역시 사실주의자 쿠르베의 면모가 잘 드러난 걸작입니다. 이 작품은 오르낭의 고향집 다락방에서 제작한 대작으로, 이를테면 사실주의의 선언서 같은 작품입니다. 평범한 시골 사람들의 일상을 위대한 역사화 형식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당시 미술 애호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길이가 6미터가 넘는 이 대작은 그 크기만으로도 관객들에게 뭔가 위대하고 거창한 혹은 이상적인 이야기를 전해주리라 지레 짐작하게 했습니다. 역사화라는 것이 전부 종교적 신화적 혹은 역사적 영웅들의 활약상을 그린 것이 아닌가요?
그러나 이 그림을 마주한 당시의 프랑스 관객들은 자신이 알고 있거나 기릴 만한 영웅이 그림에 단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내용 자체가 평범한 촌부들의 평범한 일상사라는 것을 알고는 분노를 금치 못했습니다.
죽은 사람이 뭔가 위대한 일을 하다 죽었다든지, 죽은 영혼이 하늘로 들려 올라가 신의 영광을 찬미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 죽었으니 묻고 슬퍼한다는 평범한 내용이었기에 관객들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죠. 이렇게 현실을 냉철하게 묘사하면서 쿠르베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사실주의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다. 오로지 이상을 거부하는 것일 뿐이다. "
죽음이라는 자연적 현상과 그것을 슬퍼하는 사회적 현상을 넘어 이상화 신비화하거나 도덕적 교훈부터 찾는 것은 현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 쿠르베의 생각이었죠.
촌부의 죽음이 영웅의 죽음보다 못하다고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에게 화가란 정직하게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그리는 것이엇습니다. 이처럼 전통적인 관념의 이술가가 아니라 냉정한 해부학자의 시선으로 사실을 표현한 까닭에, 그가 죽은 뒤 <오르낭에서의 매장>이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갈 때 "<매장>을 루브르에 들이는 것은 모든 미학에 대한 부정" 이라는 격렬한 반발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미술사가들은 쿠르베의 그런 태도를 자기 시대의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 애쓴, 진실로 근대적인 투쟁으로 보고 있습니다.
* 석공들
서민들의 삶의 현장을 생생히 묘사한 그의 역작 <석공들>은 2차대전 당시 폭격으로 망실되어 현재는 사진만 남아 있는 작품입니다. 아깝게 사라져버리긴 했지만, 사실주의자 쿠르베의 면모가 잘 드러난 작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작품의 등장인물은 단 두 사람입니다. 왼편의 어린 석공과 오른편의 나이 든 석공. 어린 석공, 나이 든 석공 모두 이 일을 하기에 힘이 부쳐 보입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쿠르베는 이 두 사람을 자신의 고향인 오르낭 근처 메지에레 마을로 마차를 몰고 가다가 발견했다고 합니다.
큰 돌을 깨뜨려 건축이나 도로 포장에 쓰는 작은 돌로 만드는 일은, 당시 농사로는 생계가 어려운 최하층 농민들이 주로 하던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힘겨운 노동에 릴은 인상을 받은 쿠르베는 그들을 화실로 불러 이 그림의 모델로 서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의 모델들은 자신과 관련이 없는 일을 위해 자세를 취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위해 자세를 취한 것이죠.
그만큼 이 그림에서는 현실과 투쟁하는 가난한 서민의 모습이 생생히 되살아납니다. 당시 프롤레타리아들의 냉엄한 현실이 정확히 포착돼 있는 그림이라고 하겠습니다. 고전주의를 지지하던 비평가들이 이처럼 정치의식이 뚜럿한 그림을 좋아할 리 만무했습니다. 한 비평가는 다음과 같이 비꼬았습니다.
"그 어떤 예술가도 이렇게 대단한 거장의 솜씨로 예술을 빈민굴에 처넣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자 쿠르베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고 합니다.
"아무렴, 예술은 빈민굴에 처넣어져야 하는 것이지."
지금까지의 미술이 지배 계층을 즐겁게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면, 이제부터는 서민들의 목소리가 가감없이 반영되는 통로가 돼야 한다는 것이 쿠르베의 생각이었습니다.
* 파이프를 문 자화상
쿠르베 초기의 자화상 중 하나. 아버지의 희망으로 법률 공부를 위해 파리로 온 쿠르베는 곧 그 공부를 팽개치고 그림 공부에 열중하였는데, 파리에 나온 지 6년, 여러 차례 살롱에 입선한 경력을 통해 한 사람의 화가로서 자신을 쌓았던 무렵에 그려진 것입니다.
야심에 찬 한 시골 출신의, 약간 텁텁하면서도 오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작에 이처럼 사인을 기입하고 있는 것도 이전의 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녹색의 상의, 녹회색의 배경에 떠받쳐진 흰 셔츠와 붉은 얼굴은 은은하게 인물을 드러내는 전통적 수법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 검은 개가 있는 자화상
1842년에 제작해서 44년의 살롱에 첫 출품, 입선한 쿠르베의 23세 때 작품입니다. 고향인 쥐라 산중의 봉누보 골짜기에 있는 프레질 퐁테뉴 동굴 앞에서 스패니얼 종의 개를 데리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쿠르베의 자화상입니다.
그 주제에 있어서나 묘사에 있어 쿠르베의 제반 특성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 그의 예술이 이미 청년 시대에 든든히 형성되어 있음을 엿보여 줍니다. 화면은 인물의 얼굴을 향한 삼각형의 구도 속에 인물과 개가 자리 잡고 배경은 암벽과 하늘로 처리하였습니다. 검은 인물의 옷과 개의 모습이 밝은 색조의 암벽과 원경(遠景)에 대조를 이루면서 한층 안정감을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