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대전교구 당진 솔뫼 성지, 공주 황새바위 성지>
-2021년 9월 1일(수요일)
-06시 30분 본당 출발
-주제:희년을 보내면서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 영성을 본받고 우리 삶에 깊이 새깁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1846년 8월 26일 옥중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페레올 주교님께 쓴 편지 내용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관장이 저에게 ‘당신이 천주교인이오?’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어찌하여 임금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천주교를 믿는 거요? 그 교를 버리시오.’라고 심문하기에 ‘나는 천주교가 참된 종교이므로 믿는 거요. 우리 종교는 하느님을 공경하라고 가르치고 또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해 주오. 나는 배교하기를 거부하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솔뫼 성지]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솔뫼로132(송산리 산 45-3)
산에 소나무 숲이 많다하여 솔뫼 또는 송산(松山)이라고 불리는 천주교 사적지이다.
이곳은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그의 부친 성 김제준(이냐시오), 당고모 성 김 데레사가 태어난 곳이며,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한 신앙으로 다져진 곳이다.
솔뫼는 성 김대건 신부가 박해를 피해 용인 땅 골배마실로 이사 갈 때인 일곱 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2004년 복원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생가 터가 있다.
이 작은 마을에 복음이 전례된 것은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 그의 고향인 충청도 지방의 전교를 맡으면서 시작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가 50세에 영세한 이후 교우 마을이 되었다.
면천 군수로 있을 당시 김진후는 이존창에게서 복음을 전해들은 뒤 벼슬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다가 신해∙신유박해 대 체포되어 10여년을 옥살이 하다가 1814년 해미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김대건 신부 집안 순교사의 시작이다.
1816년에 김진후의 셋째 아들 김종한(?~1816, 안드레아)이 순교하였고, 1839년에는 다시 둘째 아들 김택현의 아들 김제준(1796~1839, 이냐시오)이 순교, 1846년에는 김제준의 아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함으로서 김대건의 가문은 32년 사이에 4대가 순교하는 영광의 가문이 되었고, 솔뫼는 신앙의 못자리로 불리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 가문 사람 가운데 가장 먼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김진후의 장남인 종현이었다. 그는 이존창의 권면으로 입교한 후 형제와 조카들을 차례로 인도하였고, 그의 부친 김진후도 1791년 이전에 입교하였다.
아울러 이존창의 딸인 이 멜라니아와 김대건 신부의 조부인 김택현이 혼인함으로써 김대건 신부 가문의 천주 신앙은 더욱 활기를 띠었으며, 그러한 신앙 전통이 김제준과 김대건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증조부와 종조부가 순교한 천주학 집안이어서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또 언제 새로운 박해가 닥칠지 몰라 김대건 신부 집안은 1827년의 정해박해를 계기로 솔뫼를 떠났다.
가솔을 이끌로 서울 청파로 이주한 조부 김택현은 그곳에서 다시 경기도 용인의 한덕동(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묵리)으로 옮겨 살다가 1830년에 사망하였다.
솔뫼에 전해진 신앙은 1984년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성 김제준(이냐시오), 성 김 데레사 등 3명의 성인을 배출하였으며, 김진후(비오)와 김종한(안드레아)은 2014년 8월 16일에 열린 124위 한국 복자 시복식에서 복자로 시복되었다.
[출처 : 순교자의 땅, 이제는 순례자의 땅]
김대건 신부님의 스물한 번째 편지 (마지막 회유문)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 무시지시(無始之時)로부터 천지 만물을 배설(配設)하시고, 그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慰藉)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은(主恩)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을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效驗)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배은(背主背思)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得罪)하면 아니 남만 못 하리.
밭을 심는 농부를 보건대 때를 맞추어 밭을 갈고 거름을 넣고 더위에 신고(辛苦)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씨를 가꾸어 밭 거둘 때 이르러 곡식이 잘 되고 염글면, 마음의 땀낸 수고를 잊고 오히려 즐기며 춤추며 흠복할 것이요, 곡식이 염글지 아니하고 밭 거둘 때 빈 대와 껍질만 있으면 주인이 땀낸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내고 들인 공부로써 그 밭을 박대하나니, 이같이 주 땅을 밭을 삼으시고 우리 사람으로 벼를 삼아 은총으로 거름을 삼으시고 강생 구속하여 피로 우리를 물 주사 자라고 염글도록 하여 계시니, 심판날 거두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염근 자 되었으면 주의 의자로 천국을 누릴 것이요, 만일 염글지 못하였으면 주의 의자로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으리라.
우리 사랑하온 제형들아, 알지어다. 우리 주 예수 세상에 내려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가운데로조차 성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나게 하신지라.
그러나 세상 풍속이 아무리 치고 싸우나 능히 이기지 못할지니 예수승천 후 종도(宗徒) 때부터 지금까지 이르러 성교 두루 무수 간난(艱難) 중에 자라니, 이제 우리 조선이 성교 들어온 지 5,60년에 여러 번 군난(窘難)으로 교우들이 이제까지 이르고 또 오늘날 군난이 치성(熾盛)하여 여러 교우와 나까지 잡히고 아울러 너희들까지 환난(患難)을 당하니, 우리 한 몸이 되어 애통지심(哀痛之心)이 없으며 육정(肉情)에 차마 이별하기 어려움이 없으랴.
그러나 성경에 말씀하시되 작은 털끝이라도 주 돌아보신다 하고 모르심이 없어 돌보신다 하셨으니, 어찌 이렇다 할 군난이 주명(主命) 아니면 주상주벌 (主賞主罰) 아니랴.
주의 성의(聖意)를 따라오며 온갖 마음으로 천주 예수의 대장 편을 들어 이미 항복받은 세속 마귀를 칠지어다.
이런 황황(遑遑)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友愛)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걷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위주광영(爲主光榮)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여기 있는 20인은 아직 주은으로 잘 지내니 설혹 죽은 후라도 너희가 그들의 가족을 부디 잊지 말라.
할 말이 무궁한들 어찌 지필(紙筆)로 다하리. 그친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만나자. 마음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너의 이런 난시(難時)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우를 빌어 삼구(三仇)를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 받아 위주광영하고 여등(汝等)의 영원 대사를 경영하라.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덕공(德功)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사주구령사(事主救靈事)에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성녀의 자취를 만만 수치(修治)하여 성교회 영광을 더으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 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矜憐)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 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여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親口) 하노라.
부감목 김 안드레아.
세상은 온갖 일이 막비주명(莫非主命)이요 막비주상주별(莫非主賞主罰)이라. 고로 이런 군난도 역시 천주의 허락하신 바니 너희 감수 인내하여 위주(爲主)하고 오직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 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고 큰 사람을 이뤄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 잘 있거라.
김 신부 사정 정표
[황새바위 성지]
충남 공주시 왕릉로 118
참수처형지로서의 순교성지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참수 처형으로 대표되는 순교성지이다. 특히 박해시대 초기에는 사형 판결을 받은 사학죄인들에게 해읍정법이 적용되었는데, 이는 백성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고자 사학죄인들을 출신 고향에서 공개 처형한다는 의미이다. 사학죄인으로 잡혀온 천주교 신자들이 배교를 거부할 경우 사형 판결 권한을 위임 받은 관찰사의 명령에 따라 제민천변 황새바위에서 참수 처형 되었다. 황새바위 순교성지의 위치는 지리학적으로 금강의 본류와 제민천의 지류가 만나는 모래사장으로 공개처형지로서의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공주지역 100여 년 순교 역사의 현장
1784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 세례를 받고 고향 내포에 내려와 신앙을 전하면서부터 시작된 내포교회는 곧 박해에 부닥치게 되었고 기록상 마지막 순교자를 낸 1889년까지 100여 년 간 공주는 박해의 땅이었다. 신유박해(1801년)부터 시작하여 이존창 루도비코 및 이국승 바오로 등 16명이 이 시기에 참수처형 되었고, 병인박해(1866년) 시기에는 약 1,000여명의 순교자가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공주는 천주교 4대 박해와 함께 100여년 순교 역사의 현장이다.
한국 최대의 순교자를 기록으로 남긴 순교성지
공주는 내포와 더불어 천주교 전파가 가장 활발했던 곳이며, 조선시대에 충청감영이 있었기에 천주교인들이 가장 많이 처형된 곳이다. 충청도·경상도·전라도에서 잡혀온 천주교 신자들은 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배교하기를 거부할 경우 사형판결 권한을 위임받은 관찰사의 명령에 따라 처형을 당하였다. 지금까지 자료조사를 통하여 발굴된 순교자는 총 337명으로 이는 한국 최대의 기록으로 여겨진다.
신앙교육의 현장
황새바위 순교성지는 순교자의 처절하고 용기 있는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모범을 통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이 무엇인지, 신앙인으로써 무엇을 바라보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삶의 자리를 돌아보고 새로 나는 장소, 은총의 배움터이다.
<성인>
손자선 토마스(1844-1866년)
"나는 솔직히 죽는 것을 몹시 무서워합니다.그러나 나에게 죽는 것보다 몇 천배 더 무서워하는 것이 있으니그것은 바로 나의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복자>
이국승 바오로(1772-1801년)
"신앙을 지키는 마음을 비록 형벌을 받아 죽는다 해도 마음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김원중 스테파노(?-1866년)
"주님 명에 순종하면서 살다가 죽은 후에 천당에 가서 서로 만날 수 있기를 바라오."
이도기 바오로(1743-1798년)
“정산 고을을 전부 주신다 해도 천주를 배반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종>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최종여 나자로와 최천녀 베드로
고의진 요셉
배문호 베드로
김화숙 베드로
고선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