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내 기억으로는 ‘히말라야’라는 영화였던 것 같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되게 인상적인 문구가 있었다. 한 속담이었는데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인생에는 어려운 길이 있고 쉬운 길이 있다. 쉬운 길에서 얻는 것은 단지 쉬웠다는 것뿐이다.’ 이에 맞물려 예전에 토인비라는 역사학자 책을 조금 읽었는데 그의 역사관이 생각난다. 오랫동안 발전하고, 번창하고 지속되는 문명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큰 어려움이나 역경을 겪지 않는 문명은 결국 안주하며 큰 발전을 보이지 않는다. 그 반면에 너무 큰 고난을 겪는 문명은 쇠약해지며 결국 무너진다. 오직 ‘적당한’ 역경, 시련을 맞이하는 문명만 계속 고비를 넘고 문제를 파헤쳐나갈 원동력을 일으키며 “성공”할 수 있다(당연히 그런 문명도 언젠간 막을 내리겠지만).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너무 풍족하고 편안함, 편리함 속에 살면 게을러지거나 교만, 교활해지기 쉽고 뜻이 굳세지기가 어렵다. 또한 있다가 없어지면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못 받았다고 억울하게 여기기도 한다. 반대로 너무 큰 고난에 시달리면 절망과 좌절에 빠지거나 마음이 굳어져 옹졸하고 거칠게 될 수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가고 있는가? 또는 우리 자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물질문명이 발달한 현재에 사는 '일반'인은 과거에 비해 엄청난 편안함과 풍족함을 누린다(물론 이 풍족함을 누리게 될 수 있기 위해 세상 어딘가에서 어떤 이들은 굶어가기도 하지만). 또한 과거에 심하게 엄한 세대들에 반박인마냥 우리 사고방식은 더 개방적이고 아이들에 관해서는 더 허용적이다. 이것은 분명히 과거로부터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발전'은 더 큰 상실과 퇴화를 불러오듯이 우리가 정말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이런 발전이라 부르는 것들을 우리도 모르게 악용해서 상황을 악화시키게 된다. 스마트폰이란 말 그대로 겁나 똑똑하다. 일반 평민이 널리 이런 위대한 도구를 쓸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똑똑한 물건이 '나'라는 존재는 얼마나 발전시켰나? 한번 철두철미하게 생각해 볼 문제이다.
감각적 쾌락만 유도하는 사회는 이상에 대한 꿈보다는 욕망을 좇는 몽롱한 꿈속에 빠진 인간을 키운다. 지금 이 사회에서는 무엇을 통해 감각적 쾌락을 유도하나? 대표적으로 음식과 미디어다. 거기에다 마약과 성까지 추가하면 타락의 밑바닥에 도달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아이들이 (또는 우리 자신도) 왜 의욕을 상실하고 무기력에 빠지게 되는 걸까? 최근에 든 생각은, 좀 뜬금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선이 악을 이길 수 없다는 (무의식적) 좌절함에서 오는 것 같다. 뉴스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실제 그래 보이기도 한다. 모든 인간은 양심을 지니고 있다 - 그것이 완전히 마비돼서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에게도. 양심의 비밀은 이상에 있는 것 같다. 그 반대로 탐욕과 그의 상극인 미움, 분노는 양심을 흐리게 하고 마비시키게 된다.
이 몸뚱이 하나 아낌없이 헌신하고 바치는 자들,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 세계 어디나, 어느 시대에나 그런 사람들은 있었다. 40여 년 전 이 지역에서도 뻔한 죽음에 달려드는 자들이 있지 아니했나? 그들은 어떤 신념, 어떤 정신으로 그리했을까? 아마 살기 싫거나 자기만 잘 먹고 잘살려고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소하고 삿된 마음으로는 절대 그런 힘, 그런 용기가 나올 수 없다. 이기심에서는 절대 용기가 나올 수 없다 - 용기인 척으로 위장해 나올 수 있는 것은 교만함, 타오르는 욕망, 무모함, 분노, 폭력성, 그런 것뿐이다.
우리의 신념은 어떻게 다져질 수 있을까? 시련을 통해서이다. 즐겁고 편한 것만 원하면 우리의 뜻은 경솔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갈망해 본 적이 있을까? 숨이 막혔을 때 공기를 찾듯이, 사막에서 갈증을 느끼며 물을 찾듯이, 무엇을 그렇게 간절하게 갈망해 본 적이 있나? 뜻이 가볍고 얕으면 경솔하고 교활해지게 된다. 우리는 자주 진정한 간절함이 없이 무엇을 얻길 바란다. 이 패스트푸드 문명, 스마트폰 문명은 사람을 무엇이든 큰 노력 없이, 즉석으로 바라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그 추세는 모두 알다시피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쇼츠’ 문화가 우리에게, 특히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우리는 갈수록 시련, 고난을 못 견디고 그런 것을 없애려 한다.
사실 이번 들살이 때 아이들이 2, 3일을 걷고 너무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이길래 스스로 '완주가 가능할까?', '내가 좀 무리했나?' 같은 의문들이 순간 들었다. 그냥 일찍 끝내버려야 할까라는 생각까지 해봤다. 하지만 나흘이 되고, 나흘이 일주일, 일주일이 열흘이 되면서 아이들은 보여주었다. 아픈 것을 참고, 단련이 돼가며 경사에서 낑낑대며 비틀거리는 걸음이 갈수록 척척 힘차게 파헤쳐나가는 모습으로. 떼쓰고 불평하는 것은 아직은 남아있는 어리광을 부리는 것뿐이었다(힘들어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아이들을 얕본 것이었다 - 인간이란 존재를 얕본 것이었다. 아이들을 위한다고 착각하며 아이들의 성장을 막을 뻔한 것이었다 (여태까지 성장을 막은 적이 적지 않겠지만..ㅠ). 끝에 가서 돌아보니 이것도 너무 편하게 간 것이 아닌가라는 나의 혹독한 욕심이 생길 정도였다.
10월7일 월요일(10일째)
10월8일 화요일(11일째)
10월9일 수요일(12일째)
첫댓글 애 많이 쓰셨습니다~ 선생님.
다녀오시며 많은 배움을 얻어오신듯 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일찍 주무셔요~~~
영국사뢈이 우리말을 이렇게 잘 써서 매번 이렇게 감동을 주시다니요!^^
부모로서 아이를 위한다고 한 것들이 결국은 아이를 나약한 존재로 만들어 더 힘들게 하고 있었던건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대장정 기록이 끝나가는 것이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