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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3일(사순절 세 번째 주일, 성청 주일)
마가복음 5:21~43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네 페이지 설교 형식
1페이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의 일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자기 딸의 치유를 위해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예수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은 어린 딸의 생명을 살려 달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요청을 듣고 그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랐던 무리 중에 열두 해를 혈루증 앓던 여인이 섞여 있었습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은 그동안 자신의 병을 치료받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다녔으나, 괴로움만 더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이 여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병세는 더욱 위중해졌고, 좌절과 한탄에 빠져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여인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란 분이 계시는데, 그분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모든 질병을 치유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예수님 앞로 나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당당히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처지는 못 되었습니다. 혈루증은 오늘날의 의학 용어로는 ‘기능성 자궁출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병은 월경과 무관하게 불규칙적으로 출혈이 생기는 병입니다.
레위기 15장에 의하면, 혈루증 걸린 여인은 불결한 여인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또한, 불결한 여인이 만지는 사람이나 물건 모두가 부정하게 여겨졌습니다. 때문에, 이 여인은 자신의 질병을 숨기고 예수를 따르는 군중들 속에 뒤섞여 있어야만 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아무도 몰래 그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녀에게는 그의 옷자락에만 손을 대어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대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열두 해 앓던 그녀의 혈루병이 치유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일시적인 치유가 아니라, 혈류 근원이 마를 정도의 완치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가던 길을 멈추고 몸을 돌이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초라한 한 여성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 제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저의 병이 고침 받을 것을 알고 그랬습니다. 저는 열두 해 혈루증 앓던 불결한 여인입니다.”
이 여인의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두 눈에 맺힌 눈물은 그동안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던 여인을 향해 축복의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님은 그녀를 ‘딸’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이제 여인은 예수님과 아무런 관련 없는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침 받기 위해 다른 사람을 불결하게 만드는 문제의 여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딸이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요즘 같이 이기적인 사회에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여인을 가족으로 용납해 주는 일이 얼마나 감동을 주는 장면인지 모릅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어줍니다. 용납합니다.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실 때, 회당장의 집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셨습니다. 그 옆에는 치유 받은 혈루증 여인이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민망한 상황이 아닙니까?
한 사람은 병을 고침 받아 행복해합니다. 그러나 그 옆에는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들은 아버지가 서 있습니다. 즐거움과 고통이 공존합니다. 감사와 비통함이 공존합니다.
원래 예수님의 목적지는 야이로의 집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아픈 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에서 시간을 지체한 이유로 어린 딸이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의 회의적인 목소리가 들립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35절).”
이미 딸이 죽은 마당에 예수 선생에게 무엇을 더 기대하느냐는 자조적인 말입니다. 지금 상황에 적절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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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때의 상황이 요즘 우리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주변에 기대와 소원대로 성취되지 못해 좌절을 겪는 분들이 계십니다.
한동안 코로나 때문에 이 사회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코로나로 인해 사업이 특수를 누린 분도 있었습니다. 비대면 인터넷 쇼핑몰이나 영상 콘텐츠 업계 등에 근무하시는 분들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울고, 어떤 사람은 웃습니다. 원래 이 사회의 양극화가 심했습니다만, 시간이 갈수록 국가 간 양극화, 경제 계층 간의 양극화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더 웃고, 어떤 사람은 더 울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계층 간의 양극화가 지속하면, 이 사회에 보이지 않는 패배주의나 냉소주의가 자리 잡게 됩니다. "정직하면 무시당하고, 착하게 살면 손해 본다"라는 심리가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게 됩니다.
마가복음 6장에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엘리야' 또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라며 세례 요한을 치켜세웠습니다.
그러나 대중의 지지를 받던 세례 요한이 제수씨를 아내로 취한 헤롯왕의 악행을 비난하자, 헤롯왕은 세례 요한의 목을 잘라 죽였습니다. 그것도 은밀히 저지른 일이 아니라, 모든 신하가 모인 축하연 자리에서 말입니다.
자, 이 사건이 백성들 사이에서 회자하였을 겁니다. 과연 백성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나도 소신껏 말했다간 세례 요한처럼 되겠구나. 옳은 소리, 정의를 외치다 권력자의 눈에 거슬리면, 뼈도 못 추리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다음부터 백성은 정치에 무관심하게 됩니다. 어차피 우리는 너희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는 마음의 장벽이 쌓여갑니다. 점차 자기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것이 더 편리한 세상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경향이 짙어지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진리를 외쳐도 사람들은 그 진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상대방의 말을 무시하거나, 우습게 여기게 됩니다.
예수님이 회당장의 집에 가셔서 무엇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40절).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 비웃고 있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야 자기 일을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냉소적인 생각, 비웃는 문화가 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게 되면 이 사회에 생명과 나눔의 역사는 불가능해집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향해 비웃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셔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냉소적인 태도와 자조적인 언어를 내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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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회당장 야이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36절)”
예수께서는 냉소적인 태도와 자조적인 언어로 무장했던 외부인들의 말을 곁에서 들으셨습니다. 여기서 ‘곁에서 들었다’는 말은 귀담아듣지 않고 그저 흘려 들으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차피 이런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태도와 말에 대해서 마음 상해하거나, 일일이 대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무시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좋지 못한 말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마음에 담아 주고 곱씹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의 좋지 못한 말을 묵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에게 해가 될 것입니다. 지나쳐 버리고, 잊어버리십시오. 그것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바닷물 속에 좌초시키지 마십시오.
오히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에게 집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상황이 어려울 때, 누가 가장 많이 힘들어할지를 주의 깊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은 회당장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번역하면,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소녀는 곧 일어나 걸었고, 사람들이 매우 놀라게 되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야기의 초반부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예수님은 바닷가에 계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였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22절)”
예수님은 회당장의 딸을 살리기 위해 회당장의 집으로 향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뒤따르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에워싸 밀었습니다. 그중 열두 해를 혈루증 앓던 여인이 아무도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불결한 여인이라고 취급받던 여인이 예수님께 손을 대었던 동기가 있었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28절).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던 여인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이 광경을 회당장 야이로도 목격했습니다. 그는 잠시 후에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들어야 했지만, 병든 여인을 “딸”로 용납하시고 고쳐주신 예수님이 자기 앞에 계셨습니다.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여인에게 평안을 빌어주셨던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라며 회당장을 안심시키셨습니다.
이후로 회당장의 슬픔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회당장은 “어찌하여 선생을 괴롭게 하느냐”라고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던 하인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했습니다.
회당장은 큰 소리로 떠들며 예수님을 비웃던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따라 죽은 딸아이의 시신 앞에 섰습니다. 회당장은 죽은 딸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목격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생각했던 혈루증 앓던 여인의 믿음은 이미 회당장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병이 고침 받는다면, 예수께서 직접 손을 잡고 말씀하시면 죽은 아이라도 충분히 살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문제를 만날 때 필요한 자세는 나의 문제와 상황 속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회당장의 집에 함께 계신 예수님은 오늘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문제 가운데도 함께 하십니다.
예수께서 믿음 없어 비웃던 자들을 다 내보내셨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예수께서 문제 속에서도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과 함께 해 주셨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만약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주인이 되어 주신다면, 여러분은 더는 슬퍼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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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러분에게 한 선교사님의 글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몇 달 전, 밤새워 강풍과 폭우가 몰아쳤던 날이 있었다. 열대 기후에서 천둥, 번개, 폭우는 늘 있는 일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집 앞에 자라고 있던 파파야 나무가 뿌리째 뽑혀 땅에 넘어져 있었다.
간혹 나무에서 익은 향기롭고 달콤한 주황색 파파야를 하나씩 따먹는 것이 재미였는데, 힘없이 누워 있는 나무를 보니 안타까웠다. 두 동강이 나 뿌리째 뽑혀 죽은 나무는 말이 없었다. 그 후로 몇 달간 저 나무를 치워야 하는데 하면서 무겁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여 그냥 놔두었다.
그런데 문득 어제 멀리서 보니 쓰러져 있는 나무 윗부분에 초록색 잎 같은데 보였다. 호기심에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이럴 수가… 죽은 줄 알았던 나무에서 작은 가지가 나오고, 잎이 벌써 여러 개 나와 있는 것이다.
죽어 있는 줄 알았는데 그 몇 달 동안 간신히 연결된 뿌리를 통해 양분을 받고, 누구에게나 공평한 햇빛과 공기와 비를 맞으며, 그 나무는 쉬지 않고 다시 살아나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 생명력에 감탄하며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은 나무라 무시하지 말아라. 발로 차지 말아라. 포기하고 갖다 버리지 말아라. 그 나무가 다시 언제 살아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생과 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감히 창조물이 생과 사를 논할 일이 아니었다. 들풀 하나, 꽃 한 송이까지도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다고 했는데, 하물며 몇 년을 자라 열매까지 맺는 한 그루 나무를 모르시랴.
죽은 것 같은 나무에서도 새싹이 돋아나는 기적을 보며,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 죽을 때가 있으면 살 때가 있고, 묶일 때가 있으면 풀릴 때도 있다.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언제까지든지 기적을 바라고, 소망을 노래하며 살 수 있다. 초록색 잎새가 돋아나는 그 날을 기다리며…
-출처: https://www.facebook.com/share/p/gLEBtt6hnXmJCefB/?mibextid=oFDknk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 되어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열두 해를 혈루증 앓던 여인에게 구원과 평안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딸을 잃고 슬퍼하던 회당장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회당장의 집에 가셔서 능력의 말씀으로 죽은 아이를 살려주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지금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의지함으로 기도하고 있지만, 그 응답이 지체되어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십시오. 여러분 인생의 선장 되신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