走馬加鞭, 달리는 말에게 채찍을 가하다
- 주변의 냉담자들로 인한 사슬에 묶여 있는 이들에게
에페 6,10-20; 루카 13,31-35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2020.10.29.; 이기우 신부
오늘은 주변의 냉담 신자로 인해 늘 숙제를 안고 사시는 분들에 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배우자나 자녀나 부모 등 사랑하는 가족이 세례를 받고 나서 냉담하는 경우, 또는 아주 절친한
벗이나 함께 믿었으면 하고 바랄 만큼 아끼는 지인이 냉담하는 경우에 속이 상하기 마련입니다.
조바심이 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신앙인들에게 딱 어울리는 속담이 있습니다.
바로 走馬加鞭이라는 속담입니다.
이 말은 달리는 말에 채찍을 더한다는 뜻으로,
일을 잘하고 있는 사람에게 더 잘하도록 격려한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17세기 조선 영조대에 무지막지한 중화사상의 사슬에서 벗어나 사상의 자주적 기운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 선비 홍만종(洪萬宗)이 조선의 사상 흐름을 후대에 전하고자
간추려 기록한 책, ‘순오지’(旬五志)에 나오는 일종의 경구(警句)입니다.
‘순오지’란 보름 만에 완성한 문집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복음화에 있어서도 이제까지 많은 노력을 해 왔지만,
아직도 냉담하고 있는 주변 신자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들에게 이 속담을 드리고 싶은
이유는 냉담 교우를 회두시키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적잖게 수고하고 있는 터에 더 요구를 하면 너무 힘든 노릇이니까, 정 힘들면 잠시 짐을
내려놓고 쉴 필요도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상황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호의적이었던 몇 몇 바리사이들이 헤로데가 그분을 죽이려고 한다고 알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시어 예루살렘으로 피하셨습니다.
그분은 박해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이 동네에서 박해가 일어나면 저 동네로 피하라고 일러주시기도 했습니다.
냉담자들도 언젠가는 다시 미사를 참례하러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다만 계기를 만들지 못해 망설여 온 기간이 길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도 너무 다구치지 않은 것이 좋습니다.
기다려주다 보면 하느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실 때가 반드시 옵니다.
좋은 일을 크게 하자면 긴 호흡으로 조용히 노력하며 기다려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요.
하지만 영적으로는 더욱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 지시기를 바랍니다.
주마가편이라는 속담이 말뜻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요,
그것도 영성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사람의 믿음을 무디게 만들어 냉담시키는 것도 악마의 간계입니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하느님께로부터
떼어놓으려고 온갖 술수를 부리는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냉담하고 있거나 아예 하느님께 마음을 두지 않는 이들을
언제라도 설득할 수 있고 또 가슴 깊이 감화시킬 수 있도록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살아가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붙잡아야 합니다.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믿음을 멀리하게 만드는 시대의 사상적 사슬에 매여 있어도
언제 어디서든 담대하게 복음의 신비를 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우리에게 주는 에페소판 ‘주마가편’의 권고입니다.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마수(魔手)를 피해 가신
예루살렘에서는 십자가 수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가셔서야 그분은 당신 생애에 있어서 일생일대의 승부수를 던지셨습니다.
죽음으로 부활하는 파스카였습니다.
원래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이 평화의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바빌로니아, 그리스, 이집트, 시리아 등 주변
강대국들의 군사력에 의해 여러 번 침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로마 제국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상시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로마 제국은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자국의 군대가 점령하고 있는
제국내 모든 영토에서 ‘로마의 평화’ 즉 Pax Romana를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물리력으로 강요하여 만들어낸 억지 평화요 거짓 평화였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에 감돌고 있는 거짓 평화를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깨뜨려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진정한 평화가 싹트게 한 것은 그분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분을 만나뵈온 제자들은 놀랍게도 180도 달라진 자세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박해를 도무지 두려워하지 않고
갈 수 있는 곳곳마다 복음을 전하러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용감하게 순교하여 복음을 퍼뜨렸습니다.
물론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부활하여 순교한 곳에 세워진
교회의 수호자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통공의 진리가 실현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냉담 교우들을 위하여 또 자기 자신의 영성을
성숙시키기 위하여 들이는 희생은 부활을 위한 십자가입니다.
조만간 영광스런 부활의 은총이 그 냉담자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함께 믿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할 그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이룩되는 천상 예루살렘의 평화입니다.
그날이 오면, 마음의 사슬이 풀리고 우리는 함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하고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