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흥산성의 느티나무와 대조사 석불.
영화나 드라마에 나온 장소나 상징물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명소가 되는 곳이 더러 있다. 창원의 우영우 팽나무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전에 영화속에 등장하여 천연기념물이 된 곳이 부여군 임천면의 성흥산성 느티나무다.
임천군의 현청이 있었던 임천면사무소를 지나 성흥산성에 오른다. 성흥산성의 문루가 있었을 성싶은 성문을 지나면 우측으로 성벽은 휘돌아가고 좌측에는 500여 년은 되었음직한 잘생긴 느티나무가 서 있다.
그렇다 언제나 산성 앞에 서면 시공을 뛰어넘어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환상에 빠져든다. 그 시절 이 땅의 백성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이 성을 쌓았을 것이다. 성은 세월의 질서에 부서지고 흩어졌다가 다시 그 세월 속에서 이끼 낀 옛돌 들이 새로 식구가 된 반듯한 새 돌들과 맞물린 채 질서도 정연하게 쌓여져 있는 것이다. 성흥산성(聖興山城)은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구교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토석혼축산성으로 둘레는 600m, 면적 12만916m로 사적 제 4호로 지정되어 있다. 테뫼형 산성으로 남․서․북문지와 군창지, 우물터 세 군데 및 토축보루의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는 이 성에 관해서『삼국사기』‘백제본기’ 제 24대 동성왕 23년(501) 조에 ‘8월에 가림성(임천의 옛 이름)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로 하여금 이를 지키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이 산성은 백제시대에 쌓은 성곽 중에서 쌓은 연대와 당시의 지명을 알려주는 하나뿐인 예로 귀중한 유적이다.
당시 이곳이 가림군(加林郡)이었으므로 가림성(加林城)이라고도 부르는 이 성의 성벽 높이는 대개 3~4m이며, 축조방식은 일부는 석축, 일부는 토축으로 되어 있다. 안으로 흙을 다져 내탁(內托)을 하고 외면은 석축을 하였으므로, 흙을 파낸 곳은 자연히 호(壕)를 형성하고 있다. 서쪽 성벽의 석축부분이 가장 잘 남아있는데, 그 기초부분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성벽보다 약 1.5m 정도 앞의 부분까지 넓혀서 기초를 만들었고 토축부분은 산의 능선을 따라 지그재그식으로 축조하고 있다. 주문이었던 남문지의 너비는 4m이며 초석이 그대로 남아있고 이 남문지 앞에 있는 토성산(土城山)애 둘레 약 200m의 토축보루가 있는데 이 토축보루에 부속된 소보루(小堡壘)가 또 있다. 이와같은 대․소 성의 배치는 백제산성의 독특한 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성을 쌓은 동성왕은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로 담력이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았다. 그는 삼근왕 때 일어난 해구의 반란을 평정한 뒤 실권을 장악한 진씨 귀족세력에 의해 왕이 되었다.
동성왕은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효과적으로 막기위해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으면서 신라 이찬 비지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고 도읍지를 웅진으로 옮긴 뒤 나성을 축조하고 새로운 도읍의 면모를 갖추었다. 금강 남쪽의 웅진에 임류각이라는 정자를 지은 동성왕은 가림성, 우두성, 사현, 이산 등의 성을 쌓으며 신라나 고구려와의 관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그러나 동성왕은 이 가림성을 축조한 뒤 비운의 죽음을 맞는다.『삼국사기』에 의하면 동성왕의 명을 받아 이 성의 성주로 부임한 백가는 이 성의 중요성을 고려하고 이 산성을 지키도록 보냈다. 그러나 백가는 한직으로 보냈다는 생각으로 앙심을 품게 된다. 백가는 그 일을 못마땅해서 병이라 칭하고 사직하고 말았는데 동성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때마침 사냥을 좋아하던 동성왕이 그해 11월(음력) 사비서원에서 사냥을 하다가 큰 눈이 내려 길이 막히는 바람에 마포촌이라는 곳에서 머물게 되었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백가는 이때를 틈타 자객을 보내 왕을 시해했다. 백가의 반란은 25대 무령왕이 즉위하자마자 보낸 해명에 의해 진압되었고 백가는 참형되어 백마강에 버려졌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간직한 성흥산성은 무왕의 아들 성왕이 도읍지를 부여로 옮긴 뒤에는 더욱 중요한 요새지로 자리 잡았다. 그러한 연유 때문인지 나당연합군에 의해 부여가 함락될 때의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그 무렵 몇날 며칠을 두고 깊은 안개가 이 山城을 둘러쌓고, 시야를 가리우므로 수비장이 마음이 이상하게 설레어 下山해 보았더니 안개는 山城만 에워싸고 있었다. 不吉한 예감에 말을 달려 부여에 다다르니 이미 王城은 함락되었으므로 통분하여 自決하였다 그러한 전설을 간직한 성흥산성은 백제가 망 한 뒤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지로 자리하기도 했다. 그 때의 기록이『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唐)나라 유인원(劉仁願)이 손인사(孫仁師)가 말하기를, 부여풍(夫餘豊)을 공격할 때 모든 장수와 의논하매, 어느 장수가 말하기를, ‘가림성은 수륙의 요충이므로 마땅히 먼저 이를 공격하여야 한다.’ 하니, 유인궤(劉仁軌)가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실(實)한 곳을 피하고 허(虛)한 곳을 치라 하였다. 가림성은 험준하고 견고하니, 이를 치려면 군사의 손상을 볼 것이요, 대치하고 있으려면 오랜 시일이 소요될 것이다.’하여 드디어 주류성(周留城_으로 달려갔다.”
그 날의 역사가 세월 속에 흐릿하게 보이지 않아서인지 안개는 자욱하고 산성 안에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운 유금필의 사당이 있다.
평주(지금의 황해도 평산) 출신인 유검필(庾黔弼)은 태조를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었다. 태조 25년 10월에는 정서대장군으로 임명되어 후백제의 연산진을 공격하여 길환을 죽이고 임존성을 공격하여 후백제 군사 3천 여명을 무찔렀다. 조물성 전투에서는 계속 몰리고 있던 왕건을 도왔고 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대신해 죽은 신숭겸의 시신을 찾고 있을 때 “신숭겸의 왼쪽 발 아래에 북두칠성 같은 사마귀가 있다”고 알려줘 시신을 찾기도 했다. 전투가 있을 때마다 혁혁한 전공을 세운 그는 931년 그를 모함한 사람들 때문에 곡도(지금의 백령도)에 유배되기도 했으나 왕건의 도움으로 유배에서 풀린 그는 운주성 싸움을 비롯한 나주 전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싸움에서 무패를 자랑했다.
그 무렵 백제와 싸움을 벌이기 위해 내려가던 유검필이 임천면을 지나던 중 임천지역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들을 가엽게 여겨 빈민들을 구제하였다. 그것을 감사하게 여긴 임천 사람들은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성흥산성 안에 유검필이 살아있는 데도 그의 사당을 세워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941년에 세상을 떠난 그는 충절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994년(성종 12)에는 태사 벼슬이 추증되었다.
그렇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역사이고 기록 또한 그들의 기록이다. 백제의 옛 땅이며 후백제의 땅 위에 살아있는 고려 장군 유검필의 사당까지 세워진 것이다. 유검필의 사당에는 남자 둘 여자 세 분이 모셔져 있고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만감에 젖어 천천히 나무 숲길을 올라가자 금세 정상이다. 날이 맑은 날 이곳에 서면 금강을 건너 부여 일대가 선명하게 보이는데 구름 속에서 산 아랫자락 그 어디도 보이지 않는다. 성벽을 따라 만들어진 오솔길로 내려가자 오래된 성벽이 무너진 채 나타난다.
오랜 세월을 견디고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끼 얹은 성벽을 만지다가 성흥산성을 수호하듯 서 있는 느티나무 아래에 서자 문득 멀리 띠를 두른 듯한 금강은 강경 웅포를 지나 서해 바다로 들어간다.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성흥산성 중턱에 오랜 역사의 이끼가 켜켜이 쌓인 대조사가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 6교구 마곡사의 말사로 성흥산 중턱에 자리 잡은 대조사(大鳥寺)는『扶餘邑誌』에 의하면 인도에 가서 범본(梵本)을 갖고 백제로 돌아와 백제 불교의 방향 제시에 큰 역할을 하였던 고승 겸익(謙益)이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하는데 남아있는 절 건물로는 용화보전과 요사채 산신각 등이 있다.
내가 절에 도착했을 때 스님은 절을 쓸고 있었고 한 가족인 듯 싶은 몇 사람이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편 사적기를 참작하여 적은 현판에는 백제 聖王 五년(527) 담혜(曇慧)가 창건하고 고려 원종(元宗)때 진전장로(陳田長老)가 중창한 뒤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절은 여러 창건설이 이 절이 6세기 초엽에 창건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절 중의 하나임을 알 수가 있다.
법당 뒤에 있는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양식과 규모도 볼 때 한 눈에도 관촉사의 은진미륵이나 연산 개태사 삼존석불 그리고 홍성의 상하리 미륵불과 닮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불상은 관촉사 미륵보살의 부리부리한 눈과는 달리 온화한 눈빛을 띠고 있어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이 석불은 화강암을 찾아 조각한 것으로 높이가 10m에 이르며 둘레가 4.8m나 되어 몸체가 다소 둔중한 듯 하지만 청아하고 차분한 맛이 있다.
머리에는 원통형의 높은 관을 쓰고 그 위에 사각형의 보개를 두 개 올려놓았는데 보개 네 귀퉁이에는 동령이 달려있다. 석불 옆의 바위 위엔 500년 가까운 노송老松이 마치 푸른 용이 용트림하며 올라간 듯한 자세로 석불 쪽으로 가지를 뻗어 우산처럼 가리어 있어 운치도 있으려니와 경건한 기분을 일깨우게 한다.
전설에 따르면 도승 겸익이 이 바위 밑에서 수도하다가 어느 날 한 마리의 큰 새가 바위 위에 앉은 것을 보고 깜빡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어느새 바위가 석불로 변해있었다. 그래서 이 절을 대조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산성 성흥산성과 그 성을 지키는 수호신 성흥산성 느티나무가 논산 익산, 부여 일대를 흘러서 서해 바다로 유장하게 흐르는 금강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다. 오랜 역사 속의 이야기를 간직한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성흥산성이 사람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서 가서, 그 나무 아래 기대서서 흐르는 금강을 바라보고 싶지 않은가?
2026년 2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