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이루어 낸 역사 / 홍속렬
우리는 많은 꿈을 꿉니다
그중 대부분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입니다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의 독백
꿈을 꾸고 울고 있는 제자에게 스승이 묻습니다
꿈을 꾸었느냐?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그 꿈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이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 꾸었을 때 갖는 허탈감이 온몸을 감쌀 때 갖는 허탈함은 곧 꿈은 꿈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받아드리는 것이기에 꿈은 꿈만으로 치부하는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꿈의 사람 요셉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기로 결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었기에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이루어 나갈 세계를 통치할 목적으로 보낸 꿈의 사람이었기에 요셉과는 다르게 보통사람 우리에겐 꿈은 그저 꿈으로만 존재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다릅니다
도무지 이룰 수 없는 꿈을 현실에서 이루어 낸 것입니다.
나는 무명 축구선수였습니다
그저 축구가 좋아 무 조건적으로 축구가 너무 좋아 축구에 목을 맸습니다
군대에서 축구를 했습니다, 중학교에서 축구를 한 실력으로 사단 선수가 되어 영내생활은 안 하고 민간 집에 합숙을 나가 전문적으로 축구만 했습니다
그러했기에 그 어려웠던 6.70년대 축구로만 군대 생활을 했으니 남보다 더 편하고 축구에 몰입 군대 안에서는 알아주는 축구선수였습니다.
얼마나 축구를 열심히 했었는지 우리 편이 지고 있으면 선수들을 독려하여 기어코 승리하게만들었고 우리 편이 지고 있으면 울면서 뛰고 격려하여 팀을 하나로 단결시키며 최선을 다해 승리하게 만들었던 겁니다.
그러했기에 지휘관들은 내가 경기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가슴에 감동을 느낍니다.
그래서 평상시 지휘관들은 나를 기억하고 책임감 있는 나를 중요 보직에 임하도록 인사조치를 했습니다.
성실과 정직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나의 모습이 군대 생활 내내 계속됩니다
육군 안에서는 축구 하면 홍속렬 원사 그래 육군대표 축구 감독이 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고 그 자리는 6.25 이후 한국 성인 축구를 이끌어 간 군대가 한국축구의 근간이 되는 어마어마한 역사를 썼고 또 이끌어가는 한국성인축구의 근간이 되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자리를 무명선수 출신 내가 맡게 된 겁니다
60만 군의 대표 대 육군대표 축구 감독? (大 陸軍代表)
이 자리는 보통 자리가 아닙니다
무명선수 출신이지만 책임감과 군인 정신이 충익했던 나는 직을 맡고 나서부터 성적이 일취월장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70년대 성인 축구의 최고봉이 되었습니다.
잘 가르쳐서가 아니라 모두가 하나가 되게 하고 공평하며 선수 선발에 정직하고 공평했으며 어떤 불의와 모순 없이 팀이 청명하며 명랑하고 정의롭게 이끌어 나갔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아내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무명선수로 대 육군대표 감독이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축구로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전 하라는 명령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제부터 선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팀이 되라고 권유해 줬습니다
70년대 축구계에는 골을 넣으면 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이영무 선수, 아내는 말했습니다. 운동장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선수가 누구냐? 고 그 선수 우리 팀에 영입하면 좋을 것이라고
당시는 육, 해, 공군 3군이 다 축구부를 갖고 있었는데 이 3개 팀이 선수를 끌어모으는 데는 선의의 경쟁을 넘어 도가 지나칠 정도로 치열했습니다
육군은 선수들의 입소문으로 분위기가 좋고 운동할 만한 여건이 갖춰진 군 팀이라는 게 알려져 웬만한 선수 능력 있고 기량 있는 선수는 인간 대접을 해 주고 군대 생활 중 어렵고 힘든 일을 감독이 손수 다 처리해주는 육군을 선호 했던 터라 대표선수급 선수들은 육군에 오기를 희망했던 시절.
그러나 당시 공군에서는 걸출한 차범근이 소속돼 있었고 이영무 선수도 공군에 갈 계획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내는 그 선수를 영입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합니다. 선수는 이미 공군에 약속돼 있다고 하니 아내는 내가 기도해보겠다고 하며 그날부터 아침만 금식을 하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기도하기를 100일째 되는 날, 이영무 선수의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육군에 입대 하겠다고.
아내의 기도 응답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전 선수들에게 의무적으로 신앙교육을 받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곤 거기에서 프로팀 1호 할렐루야 팀이 창단되었고 나의 축구 선교가 1977년부터 시작된 겁니다
중미 과테말라에서 사역 중 잠시 휴가를 얻어 고국에 왔습니다
한국인 유일의 나, 쁘라도 마을의 유일한 나 한국인 그래 늘 고독과 외로움에 시달리다가 이번 가을을 맞아 잠시 몸과 마음을 추수리려 고국에 와 제일 먼저 고향을 찾았습니다
생각해보면 군대 생활 30년 그때도 잠시라도 쉴 수 있는 공간적 육체적 정신적 여유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자축구를 시작하려 1년 먼저 전역해 나오기 전 세상에 먼저 나와 1년 전부터 뛰고 달려 쉬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니 잠시 쉬어주는 것도 몸과 정신적 건강을 위해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 가장 큰 충격적 요법으로 고향을 찾았습니다
고향에서의 쉼은 빠른 시간에 회복되는 놀라운 효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더구나 한가위를 맞아 모처첨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귀엽고 사랑스런 손녀의 재롱을 보며 한껏 고조된 기쁨과 태어난 후 처음이랄 것 같은 기쁨.
아내와 재래시장 장을 보며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행복이란 이런 놈이구나 하는 실감을 갖게 됩니다.
도리켜 보면 도저히 오를 수 없는 나무?
우리 속담에 “오를 수 없는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는 속담이 있습니다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 대 육군대표 감독직?
그 자리에 오른 꿈을 이룬 나는 꿈을 꾸고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그 한곗점 때문에 울고 있는 수행인의 한계를 넘어선 꿈? 을 이룬 결과 한평생을 축구선교에 바쳐 스스로 고난의 길을 선택한 결과 가족과 나는 힘들었지만
수천 명에게 복음을 전한 결과로 나는 그저 행복합니다
나로 인하여 복음을 받아드리고(자의든 타의든) 수십 명의 목사. 축구선교사와 평신도를 배출 할 수 있어서 나는 하늘나라에 가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두 손 높이 들고 환영해 주시리라 믿는 믿음으로 팔십 노구를 이끌고 과테말라에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축구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첫댓글 항상 건강하세요!
풋볼님, 많은 사람들이 꿈만 꾸며 시간을 허비하는데 임의 꿈은 노후 생할을 빚어내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열정으로 가득한 축구공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