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5주간 목요일] |
<연중 제29주일 기도문>
|
 |
시편 17(16),6.8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주님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당신의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저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순종하며, 언제나 정성스럽고 성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
 |
포로지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한다. 하까이 예언자는 그들을 독려하며 질책한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어찌 편하게 지내고 있느냐는 꾸중이다. 성전을 다시 세우는 일은 희생과 봉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제1독서). 헤로데 임금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분의 기적 이야기를 듣자, 요한이 소생한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을 살해한 것을 뉘우치고 있다. 하지만 호기심으로는 예수님을 만나도 치유가 되지 않을 것이다(복음).
|
 |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받으리라.> ▥ 하까이 예언서의 시작입니다. 1,1-8 1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 여섯째 달 초하룻날,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에게 내렸다. 2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주님의 집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3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내렸다. 4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5 ─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6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7 ─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
시편 149,1-2.3-4.5-6ㄱ과 9ㄴ(◎ 4ㄱ) <선창자가 후렴을 선창하면 교우들은 후렴을 받아 반복한다.> ◎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신다. <이어지는 시편은 선창자가 하고 교우들은 후렴을 반복한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를. 충실한 이들의 모임에서 찬양 노래 불러라. 이 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분을 모시고 기뻐하고, 시온의 아들들은 임금님을 모시고 즐거워하여라. ◎ ○ 춤추며 그분 이름을 찬양하고, 손북 치고 비파 타며 찬미 노래 드려라. 주님은 당 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 ◎ ○ 충실한 이들은 영광 속에 기뻐 뛰며, 그 자리에서 환호하여라. 그들은 목청껏 하느 님을 찬송하리라. 그분께 충실한 모든 이에게 영광이어라. ◎
|
 |
요한 14,6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알렐루야.
|
 |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7-9 그때에 7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
 |
주님, 저희가 자유로운 마음으로 이 예물을 바치며, 주님의 은총으로 거룩한 신비를 거행하오니, 저희의 온갖 죄를 깨끗이 씻어 주소서. 우리 주 …….
|
 |
시편 33(32),18-19 참조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목숨을 구하시고, 굶주릴 때 먹여 살리시네.
|
 |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
주님, 저희가 천상 잔치에 자주 참여하여, 현세의 도움도 받고 영원한 신비도 배우게 하소서. 우리 주 …….
|
 |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은 로마가 통치했습니다. 그들은 총독을 보내 이스라엘을 지배했지만, 겉으로는 왕이 다스리는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당시 임금은 ‘헤로데 안티파스’로, 헤로데 대왕의 아들이었습니다. 자신과 부인 ‘헤로디아’를 비난한다고 요한 세례자를 죽게 했던 인물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소문내자, 헤로데 임금은 만나고 싶어 합니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는 주장에 호기심을 드러냅니다. ‘신비스러운 사건’은 쉽게 사람들의 주목을 끕니다. ‘기적과 예언’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누구나 한번쯤 가 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정말 ‘신비스러운 사건’은 성경 안에 넘치도록 있습니다. 성경의 기적에는 잠잠하면서 사람들의 소문에는 ‘혹한다면’ 성숙한 모습이 아닙니다. 먼저 ‘주변의 기적’에 눈떠야 합니다. 사방을 둘러보면 어디에나 기적의 꽃은 피어 있습니다. 신앙인은 기적에 놀랄 사람이 아닙니다. 평생 기적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의 기적입니다.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우주를 만드신 분을 모실 수 있습니다. 운명을 주관하시는 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체 안의 예수님을 느끼지 못하면, 아무리 기적을 보고 예언을 들어도 ‘호기심의 만족’ 이상을 넘지 못합니다. 오늘날에도 헤로데의 모습은 많이 있습니다.
|

“그게 무슨 짓이여?” 성호를 긋는 내게 아버님이 물으셨다. 그것은 내가 처음 들은 아버님의 나무람 섞인 질문인 동시에 예수님께 대한 최초의 관심표명이기도 했다. 아버님은 대소가는 물론 근동에서 ‘생불’로 통하던 일자무식의 농부이셨다. 말씀도 적고 웃음도 적었지만 그 푸근한 성정에 나는 마음 깊이에서 며느리 아닌 딸이 되어 있었다. 물음에 답을 드릴 수 없었다. 그분의 예수님께 대한 적대감을 충분히 이해했던 것이다.
아버님은 큰댁에서 모시던 전신불수인 당신 아버지를 화재로 잃었다. 큰댁 식구 모두 교회에 간 사이에 일어난 불상사였다. ‘예수라는 이가 그렇게 신령하다면….’ 당신 아버지의 횡액을 막아 줬어야 한다는 아버님의 단순하고 요지부동인 논리를 뒤집을 재간이 없었다. 아버님은 돌아가시기까지 예수님과 화해하시지 않았지만 성호 긋는 나를 외면하시지도 않았다. 그 참에 용기를 내어 ‘예수님은 사랑’이라고 한마디 했어야 옳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나는 친정·시댁 통틀어 맏이였고 최초의 천주교인 신자였고 타고난 쇠고집이었지만 턱없이 소심했다. 아버님이 타계했을 때 대소가 어른들의 뜻에 따라 유교의식으로 장례를 모시면서도 나는 속으로만 성호를 그었을 뿐이다. ‘나는 이미 전능하신 하느님께 씻긴 몸이다. 지상의 어느 의식을 따른들 시늉일 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 행위가 얼마쯤 교리에 어긋나는지 알음알음했지만 속수무책 아닌가, 크게 가책한 것 같지도 않다.
이상한 건 우유부단하게 눈치 보며 몸 사리는 내게 미사 시간을 챙겨주는 이가 한둘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더 이상한 건 그즈음에 실로 열렬한 교우가 이웃으로 이사 와 동네에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킨 일이다. 그의 직선적 언행이 너무 당당해서 가끔 거부반응이 있었지만 그는 밀리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든 기도했고 닥치는 일거리에 몸 사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내가 원하던 예언자였다. 그는 내가 하고 싶었지만 용기 없어 못했던 말(예레 1, 10 참조), 미뤄둔 일들을 해치우며 내가 들어야 할 군소리를 내 대신 듣는 것 같았다. 그의 용기가 부럽고 고맙고 미안하기도 했다.
이웃들은 그의 언행일치의 신자다움에 차츰 천주교에 관심을 갖고 세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 시어머님이 대세로 종언하시자 잡음 없이 천주교 상례에 따라 모실 수 있었던 것도 그 교우의 공이 크다. 고인께 송구하게도 모시는 내내 축제 분위기였다. 나는 틈틈이 그 힘찬 교우를 보내주신 분께 감사의 성호를 그었다.
이난호(서울대교구 구로1동천주교회)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25 주간 목요일 -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
며칠 전에 가까운 동기 사제관에서 밤에 무서운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자정이 다 되어 혼자 집으로 돌아오려니 왠지 무서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차 뒤에 누가 앉아있는 것 같고 창문 밖에서 누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텔레비전 볼 때는 안 무서운 척 했지만 저도 모르게 팔찌 묵주를 빼어 들어 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사제로서 창피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한 선배가 사제가 되면 귀신을 만나도 절대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해 주며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어느 날 밤에 사제관으로 공소 회장님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빨리 병자성사를 해 주어야 한다고 하며 차를 태워 산으로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그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다 귀신을 보고 정신이 이상해진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혼자 당당히 들어갔고 누워있는 할아버지에게 병자성사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오려고 하는데 물방울 같은 것이 얼굴에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손으로 닦아보니 피였습니다. 신부님은 위쪽을 올려다보니 한 소복을 입은 여자가 천정에 붙어서 자신의 혀를 질근질근 씹으면서 뻘겋게 된 눈으로 신부님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이야기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 선배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사제가 되려면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병자성사를 주기 위해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희 집은 매우 시골이었습니다. 밤에 집에 가려면 자전거를 타고도 20분가량은 불이 없는 어두운 시골길을 달려야했습니다.
복사단을 하면서 새벽과 밤에 오가야 할 경우가 많았는데 그 시골길은 혼자 다니기에는 너무 무서웠습니다. 무서움을 이기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봤습니다. 소리를 크게 질러보기도하고 노래를 크게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도 노래를 부르면서 오는데 검은 마귀같이 생긴 것이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순간 주춤 했지만 용기를 내어 더 가보니 나무에 걸려 흩날리는 검은 비닐봉지였습니다.
어느 순간 저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 두려움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구나!’
오늘 헤로데는 예수님을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 살아난 사람이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두려워합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두려움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많으신 분이지만 헤로데는 자신이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무서운 심판관으로 여깁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우리 안에 있는 ‘내적 법원’, 즉 ‘양심’에서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판단내립니다. 이 법정을 피해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자신에게 죄인으로 찍히고 나면 ‘벌’을 기다리게 됩니다. 사실 이 벌을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마치 한 반에서 시험을 잘 못 보아 선생님이 모든 학생들을 때리려고 할 때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그 마음입니다.
유다처럼 그 벌을 못 기다리고 자신 스스로 그 벌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지으면 모든 사람이나 상황이 자신에게 벌로 다가올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를 지으면 위축되고 두려워지고 사람을 만나기 싫어집니다. 벌을 받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모든 것까지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또 사람을 무서워하게 되는 이유는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대리만족으로 사람으로부터는 미움을 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을 대할 때 조심스러움을 넘어서서 두려운 마음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유지되고 그러면 사람이든 귀신이든 두려워 할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벌하기 위해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죄도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부모님도 자녀들을 혼내는 이유가 다 자녀가 다시 잘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었더라도 다시 잘 하겠다는 결심만 있다면 그것으로 오케이입니다.
어제 식사하는데 한 엄마가 자신의 아이를 막 나무라서 아이는 더 크게 울면서도 다시 엄마의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는 것입니다. 야단맞았지만, 그래서 울고 싶지만 결국 돌아갈 곳은 엄마 품밖에 없었나봅니다. 엄마는 야단친 것이 미안했는지 다시 아이의 등을 토닥거려 주는 모습이 참 인상 깊은 장면이었습니다.
만약 아이가 엄마가 미워서 도망가 버렸다면 엄마는 더 화가 났을 것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이깁니다. 부모님이 자녀가 잘못 하였어도 그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부모님께 예전처럼 달려들기를 원하는 것처럼 하느님도 가끔은 매를 들 때도 있지만 두려움 없이 당신께 달려들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다시 하느님께 얼굴을 파묻으면 세상의 두려움은 다시 사라집니다. 두려움은 마치 아기가 부모가 곁에 없을 때 느끼는 감정처럼, 나를 지켜 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느낄 때부터 시작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