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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 멸망원인중 하나는 종교(宗敎)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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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글은 본인 글로서 네이버 아이디 여소제(ssyeo)로 활동하며 쓰는 게시글임을 알리는 바입니다.
글쓴이:여소제(ssyeo)
본 글이 종교(佛敎,道敎)를 거론하는것이라 혹시 오해하실분이 생길까 미리 말해두는데 본인은 불교(佛敎)나 도교(道敎)를 욕하기 위해 쓰는글이 아니라 기록을 보며 본인인 추측해가며 역사관점으로 쓰는것임을 미리 말해두는 바이다. 생각하건데『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왜 고구려 평양성문을 열어준 자가 스님이었던 신성(信誠)이었으며 고구려 부흥운동장이었던 검모잠(劍牟岑)이 당나라 관리들과 더불어 승려 법안(法安)을 죽인것일까? 왜 스님이 나라를 배신하였고 또 고구려 부흥운동자들이 스님들을 죽인걸까? 왜『삼국유사(三國遺事)』는 도교를 악의 세력식으로 기술하는것일까?
본인은 이에 따라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토대로 추측을 해보며 글을 쓰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불교도들이 고구려를 배신하고 당나라를 도운 이유는 도교(道敎)와의 종교싸움이 있던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구려는 불교 중심 국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증거로 본인은 다음을 주장하겠다.
[고구려가 불교 중심 국가가 아닌 이유]
1.불교(佛敎)식 화장 장례인 화장 무덤이 백제(百濟),신라(新羅)에는 흔하게 찾을 수 있으나(기록,유물적으로) 고구려(高句麗)에는 없다는 점.
2.5c인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를 보면 고구려의 주도이념이 건국신화 바탕이었으며 고구려의 천하관(천손관념등)이지 불교(佛敎)가 아니라는점.
3.한국 고대사에서 불교(佛敎)는 고대국가성립에 도움을 주는것으로 나오나 고구려는 백제(百濟),신라(新羅)와 달리 비록 소수림왕때 불교(佛敎)가 도움을 준것은 사실이나 이미 불교(佛敎)가 들어오지 않은 태조대왕(太祖大王)때 그러한 발전이 있었다는것
4.6c 고구려 대승상(大丞相) 왕고덕(王高德)은 의연스님을 북제로 보내어 불교에 대해 알아오게 한것 즉 당시 고구려(高句麗)에는 불교(佛敎)가 크게 세력을 확장하지 못했으며 자료가 부족했다는 것일것이다.
5.사후 세계관이 불교와는 다르다.
이밖에도 여러가지 증거가 있으나 이쯤하고 물론 고구려 유물에서 불상이 발견되는것이나 그런것을 보면 고구려(高句麗)가 아예 불교세력이 약했다고 할 수는 없을것이다. 그러나 토속종교에 비하면 불교는 세력이 약했고 특히 고구려에 국교(國敎)는 아니었던걸로 보여진다. 각설하고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 불교(佛敎)와 도교(道敎)의 싸움을 보자. 먼저 『삼국사기 개소문 열전(三國史記 蓋蘇文 列傳)』을 보도록 하자.
『삼국사기 개소문 열전(三國史記 蓋蘇文 列傳)』
개소문(연개소문:淵蓋蘇文)이 왕(보장왕:寶臧王)에게 말하기를 "듣건데 중국(당:唐)에는 삼교(三敎:유교,불교,도교)가 병행한다는데 우리나라에는 도교(道敎)가 빠졌습니다. 청컨데 당에 사신을 보내어 구하도록 하십시오."하니 왕은 드디어 표를 올려 청하였다. 당이 도사(道士) 숙달(叔達)등 8명을 보내고 겸하여 도덕경(道德經)을 선사하므로 이에 (불교도로부터) 부도사(浮屠寺)를 빼앗아 도관(道館)을 두었다.
이 내용을 보면 고구려(高句麗)의 독재자 대막리지(大莫離支) 연개소문(淵蓋蘇文)은 도교(道敎)를 당으로부터 받을것을 주장하였고 고구려 28대 마지막 왕인 보장왕(寶臧王)은 이를 허락하고 불교사원인 부도사(浮屠寺)를 빼앗아 도교들한테 주었다. 이 사건으로 아마 불교(佛敎)도들은 큰 불만을 갖게 되었을것이다.이는 일연(一然) 스님에『삼국유사(三國遺事)』역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당시 총애받던 재상 개소문(연개소문:淵蓋蘇文)이 왕을 설득하여 말하였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모두 강성 하지만 도교는 왕성하지 못하니 특별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포교를 구해야합니다."
그런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 내용의 전 내용을 보면 무덕(武德) 혹은 625년 즉 고구려(高句麗) 27대왕 영류왕(榮留王)때 오두미교(五斗米敎)가 크게 성하였다고 한다. 오두미교(五斗米敎)는 사실 도가라고 하기에는 이단적인 면이 보이지만 어쨋든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오두미교(五斗米敎)를 도교로 본듯하다. 오두미교(五斗米敎)란 후한말 장도릉(張道陵)이 만든것으로서 한자 그대로 "가르침을 받으면 쌀 5되를 준다."라는 것이다. 이 오두미교(五斗米敎)가 삼국지(三國志)에 황건적(黃巾賊)난에 종교적 원인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기록에 대해서는 맞는지 안맞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히 해둘것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저자인 "일연(一然)스님"은 불교도로서『삼국유사(三國遺事)』는 불교도들 관점에서 서술되었고 이에 따라 자신들과 맞선 도교(道敎)는 맹렬히 비난하여 불교를 선의 세력이며 구국 종교로 도교를 악의 세력이며 나라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종교로 설명한다. 그 대표적인 증거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그때(연개소문과 보장왕이 도교를 크게 받아들일때)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반룡사(盤龍寺)에 머물고 있었는데 도교가 불교에 맞서게 되면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질것을 염려하여 여러 차례 간하였으나 왕(보장왕:寶臧王)은 듣지 않았다. 이리하여 신의 힘으로 방장(方丈:승려가 거처하는곳)을 완산주(백제땅이다.) 고대산(高大山)으로 옮겨 살았다. 이때는 영휘 원년 경술년(650년) 6월로 얼마후 나라(고구려)가 망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불교도인 일연(一然)스님이 불교를 편애하여 기록했다는것을 알 수 있다. 일연(一然)스님은 보장왕이 보덕화상(普德和尙)에 말을 듣지 않았고 이에 보덕화상(普德和尙)은 백제로 가버렸으며 이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식으로 기술한다. 대표적인 증거가 "영휘 원년 경술년(650년) 6월로 얼마후 나라(고구려)가 망하였다."인데 고구려가 멸망한건 668년인데 18년이라는 세월이 어딜봐서 얼마후인가? 일연(一然)스님은 고구려(高句麗) 멸망을 불교를 믿지 않아서로 연결 싶어 했고 18년이라는 시간 간격이 있음에도 보덕화상(普德和尙)과 연결지어 고구려는 보덕화상(普德和尙)이라는 명승이 권고했으나 미련해 거부하여 스스로 망하는 길을 택하였다. 식으로 기술한다. 물론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역사책이 아닌 설화집이니 그럴 수 있겠지만 아무튼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당시 불교도들에 관점이었고 불교도들은 도교(道敎)를 극적으로 싫어하며 고구려의 멸망을 도교와 연결시켰다.
이러한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계속 나온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되 있는 두 내용을 보자.
『삼국유사(三國遺事)』
열반의 평등한 가르침은 우리 스님에게서 전해졌다고 한다.
슬프구나 방장(方丈)이 날은 후에는 동명왕(東明王)의 옛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네.
『삼국유사(三國遺事)』
불교는 넓디 넓은 바다처럼 끝이 없어
백 갈래 유교 도교를 모두 받아들이네
우습구나 고구려 왕은 웅덩이를 막았지만
와룡(臥龍)이 바다로 옮겨간것은 알지 못하내
이 내용을 풀이해주자면 1번째 방장(方丈)은 스님들이 사는곳으로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보장왕(寶臧王)에게 도교를 믿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경고했으나 듣지 않자 백제땅으로 날려보낸것이고 2번째 내용에 와룡(臥龍)은 내용상 볼때 보덕화상(普德和尙)을 뜻하는것이다. 고로 도교를 섬기는 고구려왕의 어리석음과 이로인해 나라가 망했다는것을 말하는 내용이다. 이밖에도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도교를 계속하여 비난한다. 결정적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가 도교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 라고 주장하는부분은 이부분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도사(道士)들은 국내의 유명한 산천을 돌아다니며 (기운을) 제압시키는데 옛 평양성 형세가 신월성(新月城)이라 하여 남하(南河)의 용에게 주문을 읽어 만월성(滿月城)을 더 쌓아 용언성(龍堰城)이라 하였다. 예언서를 지어 용언도 또는 천년보장도라고 하고 영석을 파내 깨트리기도 하였다.
즉 이 내용을 간단히 말해두자면 당나라에서 온 도교 도사들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기에 흐름을 깨트리고 신성한 담석을 깨트렸으며 평양성이 초승달인 "신월" 형태인것을 보고 다찬 달이라는 뜻인 "만월" 즉 만월성을 더 쌓았다는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三國史記 百濟 本記)』에 백제 멸망대 보면 귀신이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 라고 말하고 그 자리를 파보니 백제는 월륜(月輪)과 같고 신라는 신월(新月)과 같다.라는 말이 나왔다. 이 이야기는 잘 알것이다. 즉 고구려에 평양성은 신월 형태로 길한것이니 지는 형태인 만월 만월성(滿月城)을 더 쌓았다는것이다.(즉 뜨는 달 형태이었던 고구려 신월성을 만월성을 더 쌓아 기를 제압시켰다는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만 나올뿐이다. 도교 도사들이 그런짓을 했다면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나와야할것이다. 그런데 왜 안나올까? 이는 아마 불교도에게 정당성을 주기 위함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대표적인 증거가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三國史記 地理誌)』를 보면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이 있는데 그 둘레는 1838보(步)이다."라고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신월성은 경상북도로 나온다 위에 『삼국유사(三國遺事)』신월성(新月城)은 평양에 있다고 나온다. 그럼 한가지 물어보자 경상북도에 있다면 신라인들이 만든것인데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자기들이 빨리 멸망할 수 있게 성 이름을 신월성(新月城),만월성(滿月城)이라 지은것인가? 아니라는것이다. 즉 도교들이 고구려를 멸망시키려 했다는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망언일뿐이며 불교도의 왜곡이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이 불교(佛敎)와 도교(道敎)간의 싸움에 대한 기록은 사실 고구려로 끝나는것이 아니라 북위(北魏)에 군사적 전성기를 이룩하고 북위(北魏)를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만들어낸 대황제 태무제(太武帝)에 대해서도 나온다.
『삼국유사(三國遺事)』
탁발도(拓跋燾:태무제)가 다시 장안을 수복하고 관중과 낙양까지 위엄을 떨치게 되었다. 이때 박릉(博陵)의 최호(崔皓)가 좌도(左道:도교)를 조금 익혀 불교를 시기하고 미워하고 있었는데 재상자리에 올라 탁발도(拓跋燾:태무제)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에 천사(天師:도교 직책중 하나로 보임) 구겸지(寇謙之)와 함께 탁발도(拓跋燾:태무제)를 설득하였다. "불교는 무익하여 백성들의 이익을 해칠뿐입니다."그는 불교를 없애도록 권하였다고 한다. 태평(太平 556~557) 말기에 스님 담시(曇始)는 탁발도를 귀화시킬때가 왔음을 알고 정월 초하룻날에 갑자기 지팡이를 짚고 궁문에 이르렀다. 탁발도가 담시를 베라고 명했으나 아무리 목을 베어도 역시 베어지지 않자 북원(北園)에서 기르는 호랑이에가 먹이로 주었으나 역시 가까이 하지 않았다. 탁발도(拓跋燾:태무제)는 크게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다가 마침네 병에 걸리고 최호(崔皓)와 구겸지(寇謙之) 두 사람도 잇달아 나쁜 병에 걸렸다. 탁발도(拓跋燾:태무제)는 허물이 그들 때문에 생긴것이라 생각하여 두 집안을 없애고 불법을 크게 펄쳤다.
이 내용을 보면 일연(一然)스님은 역사왜곡까지 해가며 불교를 선의 세력으로 도교를 악의 세력으로 하고 윗글에도 보이듯이 도교를 좌도(左道)라고 칭하였다. 이에 비해 불교를 칭할때는 정도(正道),우도(右道)라고 하여 차별화시켰다. 일연(一然)스님이 도교를 낮추어보았다고 해도 될것이다. 더욱이 역사왜곡까지 저질렀는데 물론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역사책이 아닌 설화집이다. 하지만 이것은 좀 심했다고 할 수 있겠다. 위에 나온 탁발도(拓跋燾)는 북위 황제 태무제(太武帝)로 태무제(太武帝)라는 자는 당시 중국의 광개토대왕과 같은 자였다. 특히 그에 유연정벌은 북방 오랑캐들을 어떻게 제압하는지 제대로 보여주었으며 토욕혼,남조등을 꺾고 이로서 실질상 북위는 동아시아의 패좌로 오르게 된다. 대충 태무제에 정벌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북위(北魏) 황제 태무제(太武帝)에 군사적 업적]
424년 유연이 쳐들어오자 이를 격파
425년 유연을 공격하여 승리
427년 하(夏)를 공격하여 승리
426년 장안일대를 약탈
431년 섬서지역 대부분을 점령
439년 북량을 공격하여 점령
436년 북연을 공격하여 점령
439년 유연을 공격하여 승리
443년 유연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승리
448년 만도귀로 하여금 쿠차를 속국으로 만듬
449년 유연을 다시 대대적으로 정벌하여 크세 승리
450년 100만 군대로 송나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해 크게 승리
당시 유연은 유목제국으로서 아주 강력한 힘을 자랑하였다. 그들에 기마병만 수십만이었으며 영토도 아주 넓은 제국이었다. 태무제(太武帝)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동북아시아의 전세는 유연이 장악하였으나 태무제(太武帝)가 등장하면서 북위가 패권을 잡은것이다. 이렇듯 태무제는 위대한 황제였다. 물론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것처럼 태무제(太武帝)는 불교를 억압하고 도교를 추구했던 자이다. 그런데 일연(一然)스님은 한가지 착각하셨다. 기록을 보면 태무제(太武帝)는 자신을 중국인이 아닌 이민족이라 칭한다.
『유라시아유목제국사 p117』
중국인(中國人:동진-東晉-나라인)들은 보병(步兵)이고 우리(북위-北魏-)는 기병(騎兵)이다. 풋내나는 망아지와 송아지들이 호랑이와 늑대를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위 내용은 태무제(太武帝)가 유연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겠다고 하자 신하들이 동진(東晉)이 이를 노려 비어있는 북위(北魏)를 공격해오면 어떻게 하냐는것이었다. 이에 태무제는 저리 답해주고 출전하였다. 실제로 동진(東晉)은 북위(北魏)을 공격치 못하였다. 저글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태무제가 동진(東晉)을 중국(中國)이라 칭했다는점과 북위(北魏)를 호랑이와 늑대로 비교했다는 점이다. 즉 북위(北魏)는 당시 중국이 아닌 유목민족 왕국이었다.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는 태무제(太武帝)가 있을때까지 자신들의 고유습성을 지키고자 노력하였고 특히 이에 따라 불교를 배척하였다. 이에 비해 도교는 허용하고 국교로 삼을 정도였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최호(崔皓)와 구겸지(寇謙之)가 중심 세력이었다.
그러나 실상 따지고 보면 최호(崔皓)라는 자는 실상 도교(道敎)를 믿고 어느정도 알지만 실상 행위를 보면 유가(儒家)쪽 사람이다. 최호라는 사람은 태무제(太武帝)한테 처형되지 않았으며 그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왜곡일뿐이다. 태무제는 죽기까지 불교(佛敎)를 배척하고 핍박한 인물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해동불교(海東佛敎)에 중요한 역활을 하신 담시(曇始)스님을 극대화 시켜주기 위해 이런 왜곡을 한것으로 보여진다. 역사를 보면 위대한 황제 태무제(太武帝)는 452년 환관 종애(宗愛)에게 독살된다. 그리고 태무제(太武帝) 뒤를 이은 문성제(文成帝)때부터 불교는 허용되었고 국교가 되는것이다. 특히 최호(崔皓)는 한족(漢族)의 사족(士族)지주로서 유가이다. 도무제(道武帝) 척발규가 제위하고 있을때 최호(崔皓)는 문헌을 작성하는 벼슬직에 있었고 명원제(明元帝)인 척발사가 오르자 그는 척발사에게 글을 가르쳐준 스승이었기에 중용되었다. 오히려 태무제때를 보면 모함을 받아 파직당했다고 태무제와 그는 관계가 실상 좋지 못했다가 그가 떠난뒤 사실상 전쟁에만 능하고 정치에는 별다른 능력이 없는 태무제는 최호를 다시 부르고 관직을 복귀시킨뒤 정치부분을 그에게 맡겼다. 이렇듯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것처럼 최호(崔皓)와 태무제 관계가 안좋은것이 아니다. 그리고 태무제는 죽기전까지 불교를 핍박했고 스님 담시(曇始)가 태무제를 만난 이야기는 그저 일연스님 상상이거나 불교도들에 야사중 하나로 역사라고 볼 수 없다. 결과적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불교도 입장에서 서술되었고 공평하지 못했으며 역사왜곡까지 저지른것이다. 뭐 애초에 역사책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것으로 볼때 불교(佛敎)와 도교(道敎)간의 싸움이 격렬했다는것을 알 수 있고 그 싸움은 굉장히 오래됬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三國史記)』와『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볼때 고구려 조정은 도교(道敎)편을 들어주었고 이에 따라 불교(佛敎)는 어느정도 핍박을 당했다. 대표적인 증거는 앞서 말한 『삼국사기 개소문 열전(三國史記 蓋蘇文 列傳)』에 "부도사(浮屠寺)를 빼앗아 도관(道館)을 두었다." 이것이다. 이에 따라 불교도들은 고구려 조정과 거리가 더욱더 멀어졌다.
또한 도교(道敎)를 받아들이는데 주력자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 역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그리 좋게 기록하질 않는다. 연개소문(淵蓋蘇文)에 대해 삼국유사는 수나라 장수,재상이던 양정,양명등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환생하여 태어난것이 연개소문(淵蓋蘇文)이다. 식으로 말하고 있다. 이 모두 불교도에 역사 왜곡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것이 이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개금(蓋金:연개소문)은 또 왕(보장왕-寶臧王-)에게 아뢰어 동북쪽 장성을 쌓게 하였다. 이때 남자는 부역을 하고 여자들은 농사를 지어 16년만에야 공사가 끝났다.
이 기록은 천리장성을 쌓았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이다. 그런데 중국기록이나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고구려(高句麗) 27대왕 영류왕(榮留王)이 당나라 침략을 대비해 쌓은게 천리장성으로 나온다. 즉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연개소문이 백성들을 고생시켰다고 주장하기 위해 천리장성이 연개소문이 백성을 괴롭히기 위해 했다는듯이 서술한다. 즉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왜곡이다.
사실 후기 고구려(高句麗) 조정과 불교 세력은 그리 친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三國史記 居柒夫 列傳)』을 보면 고구려 승려인 혜량 법사(惠亮 法師)는 신라(新羅) 첩자로 온 거칠부(居柒夫)를 첩자인줄 알았음에도 고구려 조정,군부에 알리지 않았고 신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는등에 모습을 보여진다. 물론 이것은 신라(新羅)에게 천명이 있다는식에 기술이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혜량 법사(惠亮 法師)는 조국인 고구려를 버리고 신라(新羅)에 결탁한것이다. 이로 볼때 불교(佛敎)는 개소문 전부터 이미 고구려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했나 하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말이다. 발견된 고구려의 불상들로 볼때 고구려에서 불교가 그리 약한 세력은 아니지만 고구려 조정으로부터는 환영받지 못했다. 라고 하는것이 맞을것이다.
더욱이 도교(道敎)를 강력히 주장하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집권하면서 『삼국사기 개소문 열전(三國史記 蓋蘇文 列傳)』내용처럼 불교(佛敎)도들은 억압 받았을것이고 도교에게 많은 이권을 빼앗겼을 것이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도교(道敎)를 강력히 주장했던 이유는 왕권강화에 도움이 되는 불교(佛敎)를 배척하고 도교(道敎)를 주장하여 자신의 권력을 확장시키려는 목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장왕(寶臧王)도 이에 찬성하고 도교(道敎)를 지원한것을 보면 왕권배척을 위해 했던 행위라 보기는 힘들듯하다. 어쨋든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도교도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다는 증거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왕이 옳다고 생각하여 당(唐)나라에 도교를 청하자 당나라 태종(太宗)은 서달(徐達)등 도사(道士) 8명을 보냈다. 왕이 기뻐하여 절을 도관으로 삼고 도사를 높여 유가(儒家)의 선비보다 읫자리에 두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라 어느정도 의심해야하지만 윗 내용중 "왕이 옳다고 생각하여 당(唐)나라에 도교를 청하자 당나라 태종(太宗)은 서달(徐達)등 도사(道士) 8명을 보냈다. 왕이 기뻐하여 절을 도관으로 삼고"는 『삼국사기 개소문 열전(三國史記 蓋蘇文 列傳)』과 비슷하다 뒷 내용은『삼국유사(三國遺事)』가 앞서 말했듯이 불교도들이 도교도를 비하하는 편이라 믿기 어렵긴 하지만 어쨋든 유교의 선비들보다 도교(道敎)의 도사들이 더 높은직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도교(道敎)세력이 가장 강력해졌다는 뜻이다. 이때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당나라에서 온 도교 선사들이 당나라를 위해 고구려를 망하게 할려고 종교적 만행을 저질렀다는 듯이 기록한다. 다시 『삼국유사(三國遺事)』이다.
자 지금까지 본인은 도교와 불교간의 싸움이 간략하지만 기록된것들을 내밀었다. 불교와 도교간의 마찰이 있었고 고구려 조정의 지원을 받는 도교(道敎)세력은 이로서 불교보다 더 큰 권리를 가지며 불교도를 억누른 것이다. 이에 따라 불교도들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불교도들은 타국으로 가거나(혜량 법사(惠亮 法師)가 대표적일것이다.) 타국에 투항하여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대표적인 증거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三國史記 高句麗 本記)』에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三國史記 高句麗 本記)』
남건(연남건:淵男建)이 군사의 일을 승려 신성(信誠)에게 위촉하니 신성(信誠)은 소장 오사(烏沙),요묘(饒苗)등과 더불어 비밀히 이적(李勣:이세적 당나라의 명장)에게 사람을 보내어 내응할 것을 청하였다. 5일후 신성(信誠)이 성문을 열자 이적(李勣)이 군사를 풀어 성에 올라가 북을 두드리고 고함치며 성을 불살랐다.
고구려(高句麗) 멸망의 내용이다. 기록을 보면 연남건(淵男建)으로부터 군권을 받은 승려 신성(信誠)은 이적(李勣)에게 스스로 자청하여 성문을 열것을 말하였다. 이적(李勣)이 회유하기도 전에 승려 신성(信誠)이 자청해서 말이다. 이는 자발적으로 승려 신성(信誠)이 항복했다는 것이고 비록 짦지만 불교계의 고구려 조정에 대한 불만에 표출이라 볼 수 있겠다. 또한 앞서 말했듯 혜량 법사(惠亮 法師)등 많은 스님들이 신라(新羅),백제(百濟)로 갔는데 삼국사기를 보면 김유신(金庾信)은 고구려 지역이 익숙한듯이 고구려 병사들 모르고 군사를 빼는등 고구려 지리를 훤히 읽는듯한 모습을 보인다. 물론 첩자들로 알아냈을 수도 있지만 보덕화상(普德和尙), 혜량 법사(惠亮 法師)등을 볼때 이런 투항한 스님들이 지리를 알려주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이 든다. 물론 이것은 근거가 미약하다. 본인에 추측일뿐이다.
고구려 멸망에 스님들이 당나라측에 참여하였고 이후로도 당나라 앞잡이로 활동했다는 증거가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三國史記 新羅 本記)』내용을 보자.
『삼국사기 신라본기(三國史記 新羅 本記)』
6월에 고구려 수림성(水臨城) 사람 모잠(牟岑:검모잠劍牟岑) 대형이 남은 백성들(고구려 유민)을 거두어 모아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강 남족에 이르러 당의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등을 죽이고 신라(新羅)로 향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三國史記 新羅 本記)』에는 "당의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등을 죽이고"라고 나온다. 당의 관리만 죽이면 됬지 왜 승려인 법안(法安)을 죽였을까? 이는 법안(法安)이라는 스님이 당나라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단 한명의 스님께서 이러셨다고 모든 고구려 스님들이 당나라 앞잡이를 했다고 하니 좀 이상하지만 고구려가 망하자 스님들이 당나라 앞잡이 노릇을 했다고 볼 수 있겠다. 앞서 말한 신성(信誠)스님이 증거일것이다. 물론 본인은 이 주장이 증거가 부족한것은 인정한다. 그저 추측할뿐이다. 또한 기록이 없음은 신라(新羅)와 고려(高麗)가 독실한 불교도 국인것을 볼대 기록을 일부 삭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도 본다.(뭐 전해지는 사서는 별로 없지만 말이다.) 어찌됬든 이렇듯 도교(道敎)와 불교(佛敎)의 세력 다툼은 고구려를 망국으로 이끄는 이유중 하나였을 것이라 본인은 과감히 추측해본다.
부족한 본인에 글을 읽어준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며 이만 본인은 글을 마치고자 한다. 본인에 글들은 0.1ver으로 시작되어 내용이 추가 될시에는 0.2ver,0.3ver로 Ver이 올라가게 됨을 알리며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지적을 부탁드린다.
글쓴이:여소제(ssyeo)
=네이버 아이디=
첫댓글 윗 글에서도 말하였으나 물론 이것에 대한 증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몇줄 안되는 기록들 뿐이며 추측일뿐입니다. 뭐 본인이 지금까지 주장했던 것중 가장 근거가 미미하네요.(좀 많이 까일듯...) 어쨋든 한번 과감히 추측해봤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남건은 왜 군권을 승려 신성에게 부여했을까요? 여소제님의 논지를 주욱 보면 당시 고구려 내부에서 불교도에 대한 대우는 그리 좋지 못 했는데요. 물론 남건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당시 아버지가 고구려 최고 권력자였는데 둘 사이의 관계가 오래 지속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만약 여소제님 말씀이 맞다면 신성은 연개소문 사후 의도적으로 남건과 결탁한 불교 세력으로서 고구려를 멸망시키려는 어떤 음모를 꾸몄다고 봐야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남건은 사람을 잘못 믿고 대의를 그르친 거구요. 여기에 대한 생각을 좀 부탁드립니다. ^^ 그럼 이만.
돌부처님도 말씀하셨지만 연남건은 사실상 입지가 좁았고 이에 따라 불교 세력에 힘을 빌린것으로 보여집니다. 물론 기록 부족으로 "연남생이 독실한 도교도였는가?" 하는 증거는 없지만 말이지요.
흐음.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 감사합니다.
제 생각엔...그만큼 남건의 입지가 좁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연개소문 사후 사실상 대권은 남생에게 있었으며 그와 불화관계에 있는 남건의 입지는 상당히 좁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랬기에 남생이 자신있게 도성을 떠나 지방을 순시할 수 있었던 것이죠. 다만 남건과 남산은 이 기회를 잡아 평양을 장악합니다. 남건의 입지가 좁았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첫째 남생이 쉽게 도성을 떠날 수 있었다는 점, 둘째 남건이 평양을 장악하고 왕을 배후에 두고도 남생을 1년 가까이 극복하지 못한 점, 셋째 당시 대표적 귀족가문이라 볼 수 있는 고현과 고자 가문 등이 남생과 함께 당에 투항한 점입니다.
결국 남생을 몰아내고도 기반이 약하고 주위에 사람이 없다보니 결국 힘을 빌 수 있는 세력이 그나마 남아있는 불교세력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불교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주장은 종종 본 적이 있습니다. 발굴되는 유물의 양도 그렇고, 벽화를 봐도 그렇고, 무엇보다 고구려에 다양한 신앙이 공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하튼 여소제님 글은 상당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거가 빈약하다고 하시는데, 자료가 많은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에 있어서 하나의 근거가 차지하는 비중이 같을 수 없죠.
다만 시대에 따른 구분이 필요할것 같은데요. 4~5c의 경우 왕의 이름을 불교식으로 지었다는 것은 확실히 이 시기만큼은 불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우위에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건 그렇습니다. 고구려 후반기에 불교 세력이 약화된것이지 삼국사기나 다른 사서들을 보아도 그 이전에는 불교 세력이 아주 강했지요.
본문 논지와는 큰 상관없는 지엽적인 문제 하나 지적합니다. 위에서 태평(太平)을 AD556-557에 이용된 양(梁)의 연호 태평(太平)이라 하셨습니다만, AD440-451에 이용된 북위(北魏)의 연호 태평진군(太平眞君)이 아닐까 합니다. 태무제의 활동시기는 AD408-452이니, 앞의 것이라 하면 좀 이상하지요. :-)
흐음... 그렇네요. 참고하겠습니다.
고려말 조선성립도 어찌보면 불교세력을 유교세력이 몰아낸 종교개입 쿠데타라고 볼수 있겠네요
이만한 글을 쓰시기도 쉽지 않을 터인데 대단하십니다. 근본적인 논지에 십분 동의하며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