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왔다. 꽃바구니 배달이 있는데 집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때는 다 외출하고 있었다. 우리 집 현관 앞에 놓으라고 했다.
집에 오니 현관 앞에 꽃바구니가 없었다.
배달한 분에게 전화를 했다. 확인하니 ‘아뿔사! 이사 오기 전의 집이다.’
전에 살던 집은 한참 먼 거리에 있다. 꽃바구니도 중요하지만 누가 보냈냐가
더 문제다. 꽃바구니를 가지러 전에 살던 집에 가는 중에 전화가 왔다.
전에 살던 집으로 이사 온 새댁이다. 스승의 날 축하 꽃바구니가 배달되어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꽃바구니를 찾았다. 여주인은 잘 보관했다가 준다.
무척 고맙다. 첫 부임지엔 용인 시골 초등학교에서 50여 년 전에 가르친
제자가 보냈다. 스승의 날 축하 카드가 꽂혀 있다.
교직에서 퇴직한지 10년이 넘는다. 강산이 또 한 번 변했다.
현장 교사들은 ‘스승의 날’을 없애자고 야단이다.
갈수록 괴리(乖離)되어 가는 교사, 학생, 학부모 사이에서 교직은 갈등 속에
날로 매력을 잃어간단다.
특히 시도 때도 없는 학부모의 민원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스마트폰 보급은 더욱 부채질한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니,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니 하는 말은 다 고릿적 이야기다.
전철역의 승강장에선 스승의 날이라고 노래가 나온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노래처럼 생각하는
학생과 학부모는 몇이나 될까? 이젠 다 선사시대(先史時代) 이야기다.
수업에 방해되는 산만한 어린이를 “교실 뒤에 가 서 있어”라든지,
“머리에 손 올리고 있어” 해도 아동학대죄란다. 일기장 검사를 하면 인권에 위배
된다나. 딸에게만 설거지를 시키면 인권위원회로 신고하라고 친절가지 베푼다.
참으로 본분을 모르는 할 일없는 인간들이다.
쉬는 시간에 장난을 치다가 안경테가 부러져도 학교폭력으로 신고를 한단다.
그래서 경찰까지 의무적으로 출동한다. 어떤 학부모는 불만이 있으면 직통으로
청와대에다 민원을 넣는다.
식물을 키우다 보면 줄기, 가지 잎이 잘못 될 수도 있다.
그런 것은 고칠 수 있으나 뿌리가 썩으면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우리 교육이 그 처지다. 우리 교육은 뿌리 채 흔들리거나 시들거나 썩고 있다.
이도 마찬가지다. 보이는 부분 충치는 고칠 수 있으나 이뿌리가 고장 나면
별도리가 없다. 뽑거나 뽑혀지는 수밖에……. 모든 세상사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근본(根本)이 아닌가 한다.
누가 그랬다. 현재는 “교사는 있으나 스승은 없고, 학생은 있으나 제자는 없다”
라고. 작금의 교사는 학원 강사보다 못한 전락해 가고 있다.
결국 교육도 ‘쩐의 전쟁’의 범주에 벗어나지 못하나 교사도 노동자라고
스스로 여기고 있으니……. 그러니 근본이 흔들린다.
이 지경까지 오기까지 교사의 자기 책임도 막중하다.
더 막중한 책임을 가져야 하는 곳이 교육부이다. 교육부는 줏대가 없다.
아이나 교사의 교육이 부평초(浮萍草)처럼 따 돈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는 교육은 십년커녕 1~2년의 변덕을 부리고,
교육부 수장은 그 목숨이 위기 탈출용 단명이니 말이다.
현직에 있는 교사는 대부분 오직 올 한 해가 무사히 그럭저럭 지나기를
기원하다니……. 교사의 권위는 날로 실추하고 있다.
권위는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 세우는 것이다.
작금의 교사나 교수는 스스로 권위를 실추 시키고 있다.
교수들의 일탈 행위나 교사들은 스스로 노동자임을 자처하더니 정치
세력이 되 가고 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교사, 학부모, 학생에게 다 근본이 있는 것이리라.
최후의 국가 보루가 무너지고 있다. 무너지는 것이 거의 인간의 속성과
속물이지만…….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 했다.
교사의 가르침과 학생의 배움은 본연의 임무이다. 이 두 요인인 뿌리까지
흔들린다. 더구나 소명의식(召命意識)이 교사의 자세나 존경의식 없는
학생이나 다 기름과 물처럼 부평초(浮萍草)처럼 떠돌고 있다.
이 얽히고설킨 교육의 현실을 타개할 쾌도난마(快刀亂麻)는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