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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평론에 대한 나의 생각
이동민
수필을 평할 때는 평을 하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기준을 전통적인 예술론에 근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은 예술 자체를 부정하는 이론도 만만치 않으므로 예술론으로 근거를 삼는 것도 뿌리가 흔들린다.
(아서 단토(1924-2013)가 팝 아트의 브릴로 상자를 보고 예술의 종말을 말하였다.)
그렇더래도 전통적인 개념으로는 예술을 어떻게 말하는지를 보자.
“소비자에게 공적으로 전달되고, 즐거움을 위해 경험하며, 창작이나 현실에 대한 해설이 가미된 표현 형식을 가졌으며,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서 정의되는 유, 무형의 구체적인 생산물이다.”
(어렵지요. 정의란 것은 거의 대부분이 어렵게 말을 합니다.)
이 정의대로라면 수필은 읽는 이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하고, 수필에는 작가가 경험하거나 창작한 작품에는 작가의 해설이 가미되어야 한다. 수필 작가는 이 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리라. 왜냐면, 즐거움에 더해서 ‘해설’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예술은 우리의 생활에서 하부 구조를 반영하는 경험을 소재로 하여, 상부 구조를 형성하는 지적인 이야기를 만든다. 즉 실제의 생활에서 얻은 인생의 삶과 생활을 글로 쓰면서, 해설을 지적인 색깔로 입혀 상부 구조에 해당하는 수필을 만든다. 수필을 쓴다는 것이 바로 지적인 작업임으로 예술론에 어긋나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해설이 바로 지적인 작업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든지 노력하여 부와 명예와 지위를 누릴 수 있다가 기본 사상이다.
그렇다면 노력이란? 노력이 무엇인지도 알아보자.
작품의 내용이나 품질을 따지지 않는다. 작품은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는 상품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노력이란 ‘상품 만들기’이다. 예술작품을 상품이라고 한 말은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는 하지만 시대의 추세가 그렇다.
상품 만들기란 이유로 작품의 품질이 아니고 작품에 따라다니는 작품 밖의 요란한 이야기를 더 많이 선전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현상은 대중 음악에서 특히 더 잘 나타난다고 하였다. 요란한 오디션 쇼를 한다. 이때까지는 무명가수로 가수 직업을 그만 둘까도 생각했다는, 임영웅이 좋은 사례가 된다.
한강 작가도 노벨문학상이라는 작품 밖의 요란한 쇼가 그를 하루아침에 백만부나 팔리는 작가로 만들었다. 다시 말하자면 문학작품도 작품 그 자체보다 작품을 둘러 싼 주변 이야기가 더 큰 영향력을 나타냈다. 출판업자도, 작가도 주변 이야기 만들기에 많은 투자를 하여 작품을 상품으로 만든다. 수필 영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험으로 비춰보아도 문학상을 두고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은 상품 만들기의 여파라는 의심이 든다. 이런 일을 두고 문학 자체를 뿌리까지 폄훼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지나친 자기비하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문학은 문학으로서의 근본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폄훼하는 말 때문은 아니지만 주변 이야기에 집중하기보다는 문학 자체에서 가치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일반 독자가 아니고 문인이기 때문에, 문학 이외의 여러 요소들은 무시하고, 독서의 대상을 오로지 작품으로서만 평기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한강이 노벨상을 받았을 때, 젊은 작가 한 분이 ‘교육 당국은 무식하게도 노벨상을 받을 작품을 알아보지 못하고, 중, 고등학고 도서실에 비치하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중, 고등학교의 학생이 읽어도 좋은 도서인지를 평가할 때는 작품 이외의 요소는 평가에서 제외하고 작품만으로 평가해야 하는 것이 더 유식한 행위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수필쓰기에는 반드시 작가의 의식이 담겨진다. 의식이 바로 수필을 지적인 내용의 글로 만든다. 말하자면 수필작가는 지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평소에 준비해두어야 한다.(이 말이 나의 지론입니다. 이 말을 하려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나는 수 십 년 전에 수필쓰기 공부를 시작할 때 앞으로는 수필이 문학에서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리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의 수필은 문학의 영역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수필은 문학의 변두리를 맴돌고 있을 뿐이다. 수 십 년 전의 말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나는 ‘수필은 변두리 문학이 아니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조건을 붙여야겠지만 문학사의 흐름은 수필이 문학의 중심이 되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문학사의 추이라고 해야할까. 역사적 흐름이라고 해야할까. 수필이 문학의 주류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잠시 역사의 관점에서 찾아보자.
중세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한 것은 인간이 아닌 ‘신’이었다. 인간의 사고는 ‘신의 뜻대로’라는 한 가지 방향으로만 모아져 있었다. 즉 신에게 수렴되도록만 하였다. 신만 있었지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서양의 중세였다. 우리나라는 유학 사상, 그것도 성리학 하나만을 생각하도록 강요하였다. 거대하고 절대적인 하나의 이론만이 우리를 지배하였다. 근, 현대로 넘어오면서 모든 사람을 하나로 통합하는 이런 가치가 무너지고 다양한 인간을 찾아가는 시대가 되었다. 다양한 인간만큼이나 다양한 사유의 세게가 펼쳐질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이런 경향이 역사의 흐름이다. 수필도 예외 일 수 없다. 절대적인 가치 대신에 자기만의 가치를 가진 개개의 인간을 찾아나서는 것이 문학의 흐름이 되면서, 인간을 소재로 작품을 만드는 수필이 제 세상을 만난 것이다. 그런데도 수필은 여전히 변두리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대라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공리(公利)주의라는 사고에서 벗어나 있다.(*다 함께 잘 사는 사회(공리주의)를 모토로 한 대표적인 사회 이념이 공산주의이다. 공산주의는 이미 무너졌다.) 모든 사람이 같은 가치를 가지고(하나의 중심 가치만을 가지고), 성장-발달을 거듭하여 이상세계에 다다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공리주의)를 이미 버렸다. 그런 사회란 불가능한데도, 그런 가치를 주장하면서 인간을 옭아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공공의 가치가 절대 우선이다 보니 ‘나’라는 인간은 없어져 버린다. 지금의 사회는 ‘전체적인 것’이라는 대신에 개인적이고 자유로운 것을 선호한다. 이제는 ‘나’를 찾아가자는 것이 오늘의 가치이고, 역사의 흐름이다.
이것이 문화의 흐름이라면 수필도 이런 추세에 발맞추어 나가야 한다. ‘나’라는 인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수필이 문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의 수필은 여전히 기가 죽어서 문학의 변두리에서 흐느적거리고 있다. ‘나’라는 인간을 이야기하는 수필이 문학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유라면, 수필가가 ‘나’라는 인간을 문학 이야기로 만들어내지 못한 탓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실, 우리가 쓰는 수필은 거의 모두가 ‘나’를 소재로 하여 이야기를 만든다. 그런데도 왜 ‘인간’을 이야기한다는 말을 듣지 못할까.
그렇다면 인간이란?
우리가 인간을 아는 방법은 사람을 관찰 대상으로 삼아서 유심히 관찰하는 방법이 있다. 사람에게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행위와, 외적인 행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의 내적인 심리가 있다. 그 중에서도 외적인 행위보다는 내적인 심리, 즉 마음을 관찰하는 일 이 더 중요하다. ‘마음’이란 인간의 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사상으로서, 감정, 의지 등을 말한다. 흔히들 정신이니 영혼이라라고도 말한다. 수필에서 관찰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거의가 자기자신이다. 자기의 내면까지도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해설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나의 내면에는 의식도 있고, 무의식도 있다.
문학에서 글로 쓰는 방법을 보면 밖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사건으로 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는 배경을 따져서 그 사람의 의식을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다.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내면적인 심리에는 ‘무의식’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무의식은 자기도 모르는 자기라고 하니까.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마음공부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 깊이 말하자면 수필에서 심리의 흐름은 작가의 심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작품을 읽고 평을 하는, 즉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도 대상이 된다. 글을 읽는 독자도 심리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즉 평글에는 평을 하는 독자(평자)의 심리도 관여하기 때문이다. 독자가 일방적으로 자기의 관점으로 글을 읽고 작품을 평하면서, 절대적인 평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더 확대한다면, 글을 쓰는 작가나, 평을 하는 독자도 시대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다. 이것을 역사적 시점이라고 말한다. 어느 시대이든 그 시대의 가치관이 작가나 독자의 의식에 영향을 준다. 그렇다면 오늘의 시대 이념은 자유 민주주의라고 하겠다. 평등도 시대 이념에 들어간다. 우리의 글에, 우리의 평에는, 무지불식간에 이런 가치관이 투영된다.
예로서 김호중이라는 가수가 저지른 사건을 보자. 그 사건을 통해서 김호중이라는 인간을 탐구해보자.
김호중이라는 가수가 음주운전을 하다가 적발되어서 구속된 사건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수 천만 국민이 매스컴을 통하여 이 사건을 경험하였고, 이 사건을 두고 국민들 각각이 나름대로 글을 쓴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글을 쓸까?
그 가수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은 외부적으로 드러난 행위일 것이다. 샤건의 전말이 이야기의 줄거리가 된다. 그 다음에 그와 같은 행위가 나타나는 이유를 따져들면서, 다양한 의견들이 나올 것이다. 말하자면 ‘내면의 심리’를 다루는 부분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아무도 김호중이 어떤 생각을 하고, 그런 행동을 하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을 공부하였다면 추측은 가능하다. 일찍 부모를 잃은 고아로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학창시절에 일진이 되어서 행동했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가수로 성공하였다. 어려움을 극복한 성공사례의 인물이 되어서, 요즘은 아주 잘 나가는 가수로 펜도 많고, 인기도 아주 높다. 음주운전을 하다가 적발되었으며, 자기 대신에 젊은이가 운전했다고 거짓을 꾸몄고, 뺑소니하여 술을 의도적으로 들이킴으로, 음주운전이라는 사실을 은폐하려 했다는 것이 외부에 드러난 행위이다.
김호중에게는 두 가지 사실이 얽혀있다. 고아가 가수로 성공했다는 사실과, 음주운전이란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이 일어나기에는 김호중의 내면 심리가 작동하였으리라 짐작된다. 두 사실을 연계하여 어떻게 평가하고, 연결할 것인가는 말하는 사람(또는 수필작가)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 불행했던 지난날을 더 부각시켜서 글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금의 김호중은 고아로서 동정을 받을 위치가 아니다. 오히려 성공한 자에 대한 질투 심리를 유발하는 처지에 있다. 이런 사실을 알고, 행동거지를 조심해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독자의 심리 반응일 것이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독자는 김호중을 나쁘게 말할 수도 있다.
김호중이 공분을 산 이유라면 그의 행동에서부터 법 적용까지 평범한 시민처럼 행동했는가에 대하여 독자가 의문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이야기를 하게 되면 조금 다르다. 김호중이라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히 자유와 일반 시민들의 행동과 비교하여 평등하게 행동했는가의 문제와는 다른, 그가 살아온 인간의 이야기일 경우가 많다. 김호중이 살아온 지난날들이 관심이 대상이 된다. 그만큼 인간 이야기를 하기는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독자도 인간 공부를 하면 글읽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김호중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쓴 수필은 본 일이 없다. 그러나 나의 주변에서 김호중에 대해서 이렇쿵저렇쿵 하는 말은 많이 들었다.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 이야기의 내용에 차이가 많았다. 만약에 이들이 말 대신에 수필로 표현하였다면 각자는 다른 내용의 글을 썼으리라. 각자가 쓴 다른 내용의 글이 그 사람의 수필일 것이다. 그 글을 읽고 내가 평글을 쓴다면 어떻게 쓸까.
먼저, 평자로서의 나의 의식부터 말해보자. 나는 더러 수필 평을 하면서 나의 의식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평에서 평자가 어떤 사고를 하는지는 아주 중요하다. 평자의 사고가 해설을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전통적인 도덕주의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생활에는 기본 질서는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보수적 사고를 한다. 예를 들면, 건널목에서 푸른 불이 켜지지 않으면 절대로 건너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신호를 무시하고 건너도 탓하지 않는다.(예전에는 저런! 저런! 하면서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나, 지금은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제 김호중 사건을 평하는 말들을 옮겨보자. 수필 평론이라면 이런 말이 평글에 나타날 것이다. ‘그 친구 학교 다닐 때, 일진이라고 하더라. 제 버릇 개 못준다더니, 내 참.’ ‘고아로 자라면서 어린 시절을 얼마나 힘들게 보냇겠나. 그래도 성공했으니 잘 살았다는 것 이니니,’ 이런 경우는 음주운전이라는 행위 자체를 아예 무시해버리고, 지난 날의 고난의 삶만 들추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모처럼의 찾아온 성공한 삶의 기회인데, 지난 어려운 시절을 생각하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빠져나가고 싶었을테지.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이해도 되어.’ ‘사회를 너무 만만하게 보았네.’ ‘아니, 그래 새파란 젊은이를 자기 대신 자수하라니. 막 돼 먹은 인간이야.’ ‘학교 다닐 때 일진짓을 했다니 제 버릇 어디 가겠어. 인간이란 한 번 굽으면 펴기가 어려워.’ ‘그래도 노래로서 많을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데, 한 번 실수로 치고 그냥 봐 주지, 붙잡아서 꼭 감옥에 넣어야 하나.’ 등등. 이런 것들이 내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들이다. 만약에 각자의 수필에서 위의 내용을 담았다면, 나는 어떤 평을 쓰게 될까.
김호중에 대한 이런 평가에는 우리가 사는 시대의 가치관이 크게 관여하고 있다. 자신의 의견인 듯 내세우는 주장도 사실은 시대의 가치에 물들어 있다.
더 근본적으로 김호중은 왜 사회의 공분을 사는 일을 저질렀을까. 이유를 룬석하기 위해서는 행동을 하게 하는 인간의 마음이 어떤 구조인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성인의 마음 구성에서, 무의식으로 분류되는 부분은 거의가 과거에 나의 경험이라고 한다. 억압해버린 나의 경험이라고 한다. 앞에서 살펴본 김호중의 과거들은 다분히 본능적이고, 사회가 수용하ㅣ 어려운 것이었으므로 무의식으로 억압되어 있다가, 밖으로 튀쳐나왔기 땜문이다. 사회적 명성이 높아짌두록 무의식을 다루는 훈련을 하여야 한다. 이 결과가 그 사람의 인품 또는 인격이 된다. 김호중의 이런 사실을 잊고 뛰쳐나온 나온 무의식의 요구를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비난받는 것이다.
(*나는 정호승 문학관에서 ‘인간의 마음’에 관하여 강의한 일이 있었다. 슬프게도 문인들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문학관의 문화교실에서 공부하는 몇 분이 참여하였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사회의 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내가 평글을 쓴다면 나의 관점(사회의 법을 지켜야 한다.)에서 수필(말을 듣거나)을 읽을 것이고 평을 할 것이다. 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말이나 글을 평할 것이다. 그렇다면 평론 글도 평 글을 쓴 사람의 관점이 반영된 것이지, 절대로 완전무결한 평가라고는 볼 수 없다. 완전무결한 평가란 있을 수가 없다.
보수주의자인 내가 보수의 가치에 치우친 수필평을 쓰면서도 나는 공정하였다고 말 하지만, 또 믿지만, 내가 내린 평가는 보수주의자의 가치인 사회 가치를 잣대로 하여 평가했을 것이다. 반드시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더라도 나는 글을 쓴 작가를 평가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으려 한다. 수필은 작가=화자=글 속의 인물 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하더라 작품 속의 인물만을 인간이란 잣대로 평하고자 하겠다. 즉 수필평은 수필 글로서 수필을 평하여야지 수필을 쓴 작가를 평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수필은 작가=화자=주인공 이라는 등식을 가진다. 그런데도 작가와 글의 주인공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 내면의 이중성 (의식과 무의식) 때문이다. )
수필평은 이처럼 민감한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평론가는 반드시 공부를 해야한다. 정말, 정말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평하는 자가 공부도 하지 않고 타인의 글을 평하는 것은 오만불손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범죄이다. 나의 경우는 이런 평을 하기 위해서는 심층 심리학자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반드시는 아니지만 나의 평글을 심리주의 비평이라고 생각한다. 프로이트가 있고 융도, 라캉도 있다. 사실 나는 이들을 조금 공부한 일이 있다. 마음 공부는 수필 알기에 도움이 되었다. 이것이 내가 수필 평을 하는 밑천이 되었다. 프로이트는 마음의 영역을 이드, 이고, 수퍼이고로 나누어서, 마음의 움직임을 갈등 관계로 보았다. 융은 가면이라는 페르소나를 말했고,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콤프렉스라는 것도 말했다. 라캉은 성장하면서 사회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에 ‘아버지의 법’이란 것을 말했다. 좀 더 어렵게 은유, 환유도 말했다. 인간을 다루는 수필 글의 평에는 이런 지식이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심리학자들이 대상자의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서 수도 없이 만나고, 상담을 하더라고 인간을 알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글 한 편을 읽고 인간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더라도 인간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평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사례를 든다면 그들이 주장한 지식을 활용한다는 뜻에서 융이 말한 ‘가면 이론’을 보자
인간이 사회생활을 할 때는 사회의 가치에 맞도록 만든 가면(perosona)을 쓰고 생활한다고 하였다. 인간의 외면적 행위로 나타나는 것은 모두 가면이 하는 행위리는 것이다.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은 가면 뒤에 숨어 있다. 이 글에서 내가 주장하기를 수필이란 인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로서의 인간이 아니고, 행위의 뒤에 있는 내면의 심리를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수필쓰기란 자신의 페르소나 뒤에 숨어 있는 모습이 바로 진짜 자기이고, 인간의 모습이다. 수필쓰기는 그 모습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우리는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의 참모습을 알기가 무척 어렵다. 가면을 쓰고 행동하는 본인도 가면을 쓴 모습이 자기의 참 모습으로 착각하는 일이 많다. 이런 사람이 수필을 쓴다면 수필에서 인간의 참 모습을 나타내지 못한다.
수필 평자는 작가와의 사회적인 인간 관계라는 것이 있다, 나의 경우는 유교 사회에 물이 들어 있는 의식도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내면을 들추듯이 평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이런저런 제약을 벗어나지 못한 평을 하는 것이 현실이다. 작가도 솔직하게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이런 이유들이 모여서 지금도 수필은 문학의 변두리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한다.
비평이란 어원을 찾아가면 ‘남을 비난하다’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비평이라고 하여 반드시 비난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작가가 왜 이런 글을 썼는가를 이해하고, 동조해주는 것도 평론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수필평이라 하여 비난만 할 것이 아니고, 작가의 생각에 동조해주는 방법도 있다. 이런 평론을 ‘주례사 비평’이라고 하던가. 이런 평론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는 것을 소개한다.
나와 의견이 다른 글을 읽고, 주례사 비평을 하려고 그 사람의 의견을 긍정적으로 수용해 주는 일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요약하면 수필 평론은 가면 뒤의 인간의 모습을 읽어내는 작업이다. 수필 평론은 여러 조건들로 인하여 가면 뒤의 모습을 읽어내지 않고 있다. 수필은 여전히 문학의 변두리에 머물 것이고.
(*앞에서 인간의 내면은 이중적이라고 했다. 즉 페르소나(가면)와 가면 뒤의 얼굴이 다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