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지폐에 등장하는 이씨네들.
초기 화폐 : 오백환 이승만 대통령
1. 5만원권 신사임당. 이율곡의 어머니(1504 ~ 1551년)
1. 1만원권 세종
1. 5천원권 이이
1. 1천원권 이황
노비 부자들
* 남자는 노(奴), 여자는 비(婢) 이를 합쳐서 '노비(奴婢])'라 함
1. 이맹현(1436 ~ 1487년) 재령이씨. 이조참판.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산 45-5. 노비 758명.
1. 이황(1501 ~ 1570년) : 노비 367명(남노 203명, 여비 164명), 35만 평 토지
* 청빈한 그가 거느린 노비 367명, 논과 밭을 각각 1천166마지기, 1천787마지기 소유한 땅부자였다.
1. 이이(1536 ~ 1584년) : 노비 111명
1. 세종의 제 5왕자 광평대군과 제 8왕자 영응대군은 각각 1만여 명의 노비를 거느렸고,
1. 선조의 맏아들 임해군은서울에 300여명, 시골에 수천 명의 노비가 있었다.
1. 윤선도 집안에는 700명이 넘는 노비가 있었다.
* 해남윤씨(1587 ~ 1671년). 공조좌랑, 한성부서윤,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 한시조 최고봉
1. 조선조 태종 대 홍길민(洪吉旼), 세종 대 안망지(安望之)의 처 허씨, 문종 대 유한(柳漢) 등은 1,000여 명, 조선조 성종 대의 영응대군(永膺大君)은 1만 명 이상의 노비를 소유하였다. 이들 대다수는 외거노비로 주인의 농장이나 자신 혹은 타인의 토지 경영에 종사하였다.
* 노비제도 찬성자 : 세종(1397 ~ 1450년) : 노비 종부법은 폐지하고, 노비 종모법은 제정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 줄여서 종모법(從母法)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시대 세종에 의해 실시되기 시작한 노비 제도로서 양인(良人) 남자와 천인처첩(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의 신분은 모계를 따라 노비가 되게 한 신분법이다.[1] 즉, 자녀의 신분이 모계 혈통을 따른다는 점에서 노비종부법과는 반대되는 제도였다.
* 세종이 채택한 종모법으로 인해 노비숫자가 증가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고, 백성 중 노비의 비율이 높아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더더욱 나쁜 것은 당시에 노비는 양반의 사유재산으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양반이 소유 노비의 숫자를 증가시키기 위해 여노비를 건드리는 성범죄까지 증가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도 그 자식은 노비가 되기 때문이죠. (홍길동 전은 이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권 차원에서 보면 기가 막힌 일이며, 우리가 성군으로 추앙하는 세종 때부터 본격화되었기 때문에 안타깝습니다.
...... 조선 시대 가장 대표적인 선비라 할 수 있는 이황도 소유 노비가 367명이었다.
예안 봉화 영천 의령 풍산 등지에 걸쳐 논은 1166마지기, 밭은 1787마지기라는 엄청난 규모의 전답을 보유했다. 마지기는 면적 자체보다는 수확량에 따른 기준이라 그 넓이를 일률적으로 가름할 수는 없으나, 논 한 마지기가 대략 150-300평, 밭 한 마지기가 대략 100-400평 정도다. 그렇다면 최소의 면적으로 계산하더라도 이황은 논과 밭 각각 17만평 이상, 도합 34만평 이상을 보유한 셈이다. 그는 굳이 벼슬을 하면서 국가의 봉급을 받을 필요조차 없는 부호였다.
.......1886년(고종 23년)에 노비세습제를 폐지하면서 노비의 자녀들은 자동으로 양인이 되었다.
양인 신분이므로 당연히 매매를 비롯한 노비 처우는 금지되었으며, 이후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를 폐지하면서 노비제 또한 완전히 폐지되어 공식적으로 남은 노비 전원은 양민이 되었다.
노비법 폐지 : 1894년.
....... 그런데 1894년 甲午更張에 의한 노비제의 혁파는 법제상의 조치였을 뿐이며, 일제강점 초기까지도 노비는 殘存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하던 노비가 법제상의 변화로 인해 급격히 사라지기 어려웠던 것이다.
1909년 일제에 의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어 모든 사람이 姓과 本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국민 모두가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다.
....... 1945년 8월 광복 이후에도 당연히 노비는 있었으나 6.25 전쟁이 터지면서 사회가 뒤집어졌다.
다만 사회가 한바탕 뒤집혔다고 해도 전후기에도 한 동안 궁핍했던데다가, 실업률도 높아서 도시로 상경해봐야 실업자 신세인 경우가 많았던지라, 머슴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서 일거리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자, 머슴들은 시골을 떠나고 도시로 대거 상경하게 되었고, 머슴고용비 또한 급속히 상승하였으며, 머슴의 대다수는 초등교육을 받은데다가 군입대를 한 경력까지 있었던지라, 이전처럼 막 대하기가 어려워졌고, 실질적인 노비는 급속하게 사라지게 된다.
2020년대인 지금 과거를 되돌아보면.....
은근슬쩍 신분세탁했으니 모두 다 양반집 자손들일 게다.
가짜 족보도 만들고, 남의 족보에 슬쩍 끼어들고......
'쪼다 이씨조선' 시대상황이 정말로 답답했을 게다.
왕족, 진짜 양반계급은 얼마 안 되고, 대부분 평민이며, 노비(공노비, 사노비)였으니 구한말에도 신분사회였던 이씨 조선조는 잘 거꾸러졌다(1910. 8. 29.).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21세기 2020년대인 지금도 이씨조선 왕들이 계속 통치할 게다.
황제 폐하가 되어서 ......
1)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2) 청빈하다의 뜻은 괴상하게 변질되어?
글감...
나중에 보완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