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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 3,13-20ㄴ
13 너희는 나에게 무엄한 말을 하였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런데도 너희는 “저희가 당신께 무슨 무례한 말을 하였습니까?” 하고 말한다.
14 너희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만군의 주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그분 앞에서 슬프게 걷는다고 무슨 이득이 있느냐?
15 오히려 이제 우리는 거만한 자들이 행복하다고 말해야 한다.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번성하고 하느님을 시험하고도 화를 입지 않는다.”
16 그때에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이 서로 말하였다.
주님이 주의를 기울여 들었다.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며 그의 이름을 존중하는 이들이 주님 앞에서 비망록에 쓰였다.
17 그들은 나의 것이 되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나서는 날에 그들은 나의 소유가 되리라.
부모가 자기들을 섬기는 자식을 아끼듯 나도 그들을 아끼리라.
18 그러면 너희는 다시 의인과 악인을 가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이와 섬기지 않는 자를 가릴 수 있으리라.
19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겨 두지 않으리라.
20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5-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5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빠, 아버지”께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한밤중에 찾아온 벗에 대한 비유’와 ‘세상의 아버지에 대한 비유’를 통해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넉넉히 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주십니다.
첫 번째 비유는 잠을 자던 사람도 벗의 끈질긴 간청에는 마지못해 들어주거늘, 하물며 주무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잠든 우리를 깨워 간청하게 하시는 아버지께서야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는지를 들려줍니다.
두 번째 비유는 세상의 아버지들도 제 자식들에게는 세상의 좋은 것을 주거늘,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야 어련히 하늘의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는지를 들려줍니다.
그러니 이토록 넉넉히 주시는 아버지께 청하라 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루카 11,10)
여기에서는,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을 통해 하느님을 향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이를 우리는 대신덕 혹은 향주덕이라 부릅니다.
곧 ‘청하라’는 것은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입으로, 곧 말로 간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 희망을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께 두고 겸손하게 청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먼저 아시고, 우리가 그것을 청하기를 바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기와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청할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진정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청해야 할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찾아라’는 것은 믿음을 아버지께 두고, 믿는 바를 몸으로 수고로움을 바쳐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사실, 아버지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 나서시며, 우리가 찾아 나서기만 하면 “네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사 65,24; 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18)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불신과 의혹에 빠져도 결코 우리에게서 믿음을 거두지 않으시고 끝까지 충실하시고 신실하시고 항구하게 우리를 찾으시니, 우리 또한 그렇게 찾아나서야 할 일입니다.
'두드려라'는 것은 사랑의 가슴으로 두드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당신께서 사랑으로 마음을 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라고 먼저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말과 몸(행동)과 가슴으로, 곧 전인격으로 아버지께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곧 희망하는 바를 말로 청하고, 믿는 바를 행동으로 찾으며, 사랑하는 바를 마음으로 두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불신과 분리를 조장하는 교활한 뱀이 아니라, 거센 파도에도 상하지 않고 온 몸을 맡기는 일치와 믿음의 생선을 주실 것입니다.
뒤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어 뒤를 경계하게 하는 전갈이 아니라, 병아리를 탄생시킬 앞을 바라보게 하는 희망의 달걀을 주실 것입니다.
단단하여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돌이 아니라, 생명을 살찌울 사랑의 부드러운 빵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청한 것보다도 “좋은 것”(마태 7,11), 곧 “성령”(루카 11,13)을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루카 11,9)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당신을 몸으로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서로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을 믿는가? 어떤 하느님을?>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너무도 분명하여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고 특히 청하는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병이 났을 때 실제 믿는 것은 의사이고,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조언을 구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닌 사람이며, 지치고 힘들 때 힘을 얻는 것도 하느님이 아닌 사람이기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기도하지 않으면서 믿는다는 사람의 경우, 실은 주님의 가르침이 훌륭하여 그 가르침만 믿거나 하느님이 아니고 천주교를 믿는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무신론자가 있을 수 있고 심지어 수도원 안에도 무신론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기에 천주교가 실망스러워 천주교를 떠난 뒤에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수도원을 떠난 뒤에 신앙생활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기도하지 않는 또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을 잘못 믿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나쁜 하느님으로 믿는 겁니다.
뱀이 아니라 생선을 주고 전갈이 아니라 달걀을 주는 인간 아비보다 못한 아비,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심지 않은 데서 거두는 모진 주인이라고 믿는 겁니다.
그러니 어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그 아버지가 아닙니다.
어제 기도 가르침에서도 그리고 오늘 기도 가르침에서도 하느님은 어느 인간 아비보다도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주님께서는 가르치시는데 그렇게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나쁜 하느님으로 믿거나 나쁜 하느님은 아니라도 좋은 것을 주지 않으시는 분으로 믿는 이유가 있습니다.
좋은 것을 주시는데 그것이 성령이라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세상 아비처럼 원하는 것을 주셔야 하는데 성령을 주시니 악한 아비는 선하고 선한 하느님은 악한 하느님이 되시는 겁니다.
그러니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라고 하시는데, 무엇을 청하는 나인가가 중요하겠습니다.
성령을 청하고 영적인 것을 청하는 나인가?
그 반대의 것을 청하는 나인가?
이것을 돌아보게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원하는 사람이 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습니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월드컵 축구 시합 응원에서 “꿈은 이루어진다”는 희망을 표현했고 그 희망이 기쁨을 주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고 4,2)
그러므로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구한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림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는 보증입니다.
(기도할 때)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을 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야고 1,6-7)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1요한 5,14-15)
청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주시는 것은 그분의 몫입니다.
그러나 청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시편 66장 18절을 보면 “만일 내 마음속에 죄악이 들어 있었다면 주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셨으리라.”고 적고 있습니다.
완고한 자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합니다.
“율법을 듣지 않고 귀를 돌리는 자는 그 기도마저 역겹다.”
(잠언 28,9)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야고 4,3)
더더욱 악행을 저지른 자의 기도는 외면하십니다.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이사 1,15-16)
기도했는데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첫째는 마음 없이 청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없어야 합니다.
또한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디안들이 가뭄에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도한답니다.
한편 내가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기도는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또 다른 이유는 들어주면 오히려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과일을 까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졸라대며 칭얼거린다고 칼을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허락하면 교만해지고 피해가 간다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되 합당한 마음으로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믿음으로 소원을 하느님께 말씀드리길 바랍니다.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며, 믿고 사랑하라!’ 하느님의 손길을 분명히 느끼게 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이웃을 향한 가장 무책임한 행위란?>
오늘 복음은 주님의 기도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이는 마치 문을 두드리며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빵 세 개는 성령으로 구워지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의 목적은 성령을 청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마치 문을 두드리듯 끊임없이 바치면 성령을 얻게 되고 그러면 친구에게 줄 빵 세 개를 얻게 됩니다.
결국 기도하는 목적은 성령으로 빵 세 개를 얻어서 이웃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만약 빵 세 개가 준비되지 않았다면 분명 그 사람은 칼 세 자루를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100% 피해를 보게 됩니다.
영화 ‘나이트 크롤러’(2014)의 줄거리입니다.
나이트 크롤러는 직업적으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고나 범죄 현장을 찍어 방송사에 파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주인공 루 블룸은 도둑이자 사기꾼이며 폭행도 일삼습니다.
그는 고철을 훔쳐 팔고 그를 저지하는 경비원을 폭행한 다음 시계도 빼앗아 찹니다.
그러다 나이트 크롤러가 사고 현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그 일에 뛰어듭니다.
경찰 무전을 도청하여 사건 현장에 도착해 자극적인 장면을 촬영하여 그런 영상을 원하는 방송국에 비싸게 팝니다.
돈도 많이 벌게 되어 차도 바꿉니다.
그러며 점점 더 위험하고 자극적인 영상을 얻기 위해 그는 조수를 채용합니다.
루는 절망에 빠진 젊은이 릭을 고용합니다.
그리고 위험한 총격전과 같은 상황에서는 그에게 촬영을 맡깁니다.
루는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가택 침입이 진행 중인 곳에 도착하여 당국에 즉시 전화하는 대신, 살인자들이 떠나는 것을 촬영한 후 집에 들어가 내부의 시체를 촬영합니다.
그는 나중에 스스로 추적할 수 있도록 살인자들을 보여주는 부분을 보류하고 영상을 판매합니다.
루는 숨겨둔 영상을 사용하여 용의자를 찾아내고 경찰에게 그들의 위치를 알려줌으로써 계속되는 추격전과 총격전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추격 도중 루의 전술에 점점 불편해진 릭은 루가 살인범의 영상을 경찰에 공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더 많은 돈을 요구합니다.
용의자의 자동차가 추락하자 루는 릭을 내보냅니다.
범인들이 다 사망하였다는 거짓말과 함께.
그러나 범인 중 한 명이 아직 살아있어 릭을 쏩니다.
경찰은 총잡이를 사살하고 릭은 부상으로 사망합니다.
루가 일부러 자신의 범죄에 돈을 요구하는 릭을 죽게 한 것입니다.
루는 차에서 이 모든 장면을 찍어 매우 비싼 값에 팝니다.
경찰은 그날 밤의 사건에 대해 그에게 심문하지만, 그는 무죄한 척하고 석방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루는 자신의 사업을 확장하고 비디오 저널리스트 팀을 훈련하는 모습을 보이며 헌신과 노력이 성공의 열쇠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나는 내가 하지 않을만한 일은 절대로 여러분에게도 시키지 않습니다.”
루는 타인의 고통을 통해 이익을 취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일을 하려고 하는 릭의 운명은 처음부터 어두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기 옆에 있어 봐야 피를 빨리는 일밖에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고 쾌락을 좋아하고 교만한 사람과 있으며 이익을 보려는 생각은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또한 이웃에게 그러한 칼을 세 자루 가지고 다니며 만나지 않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칼 세 자루를 버리고 빵 세 개를 가지고 친구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친구가 생깁니다.
루카가 말하는 빵 세 개는 성령으로 얻어지는 복음삼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루카 복음은 명확히는 밝히지 않지만, 항상 ‘삼구’(三仇) 때문에 말씀의 열매, 곧 사랑이 맺히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시고 광야에서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육체의 유혹, 자신에게 절하면 세상 권세와 영예를 주겠다는 유혹, 그다음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교만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곧 육체와 세속, 그리고 교만의 유혹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루카의 행복과 불행 선언에서는 이것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마태오 복음의 여덟 가지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닌 행복을 빼앗는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곧 부유한 사람과 배부른 사람, 세상 사람들에게 들어 높임을 받아 지금 웃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합니다.
세속과 육신, 그리고 교만이 불행을 자초한다는 말입니다.
이와 반대로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 복음 때문에 박해 받고 모욕과 중상을 당하면 행복하다고 합니다.
복음삼덕, 곧 청빈-정결-순명이 행복의 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루카 복음만의 고유한 전승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도 삼구가 두드러집니다.
씨는 말씀이고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 길과 돌밭, 그리고 가시밭입니다.
길은 말씀을 아예 받아들이지 않는 악마와 같은 교만한 마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바위에 떨어진 것은 쉽게 뜨거워졌다 식었다 하며 시련을 견디지 못하는 육적인 마음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밭은 세상의 재물과 쾌락, 걱정으로 말씀의 씨를 죽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역시 마귀-육신-세속을 말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성령이 필요한데, 그 성령은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그 해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삼구와 싸우셔서 복음삼덕의 열매를 맺어 그 빵 세 개를 지니고 복음 전파를 시작하셨듯이 우리도 이웃을 기쁘게 하려고 성령으로 삼구를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날카로운 가시를 들고 이웃에게 다가갈 것인가, 아니면 빵 세 개를 들고 다가갈 것인가는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얼마나 정성스럽게, 또 얼마나 끈기 있게 바치느냐에 달렸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한 행위는 빵 세 개를 준비하지 않는 채 누군가를 만나러 나가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참된 기도가 어떤 것인지 늘 고민합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화두 삼아, 대체 무엇을 청할 것인가 고민하고 묵상해봅니다.
난데없는 고통이 다가올 때, 예기치 않았던 환난이 밀려올 때, 자녀된 입장에서 사랑하는 아버지께 도움을 청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점차 청소년, 청년, 장년으로 성장해나가듯이, 우리의 기도 역시 성장해나가야 마땅합니다.
어른이 되면 더 이상 아기 때처럼 부모에게 칭얼거리거나 그저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청하기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자녀들은 힘겹게 낳아주시고 지극정성으로 양육해주시고, 잘 교육시켜주신 덕에 한 사회인으로 성장하게 해주신 부모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면서, 이제 더 이상 부모에게 청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뭔가라도 드리고 싶어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담은 선물도 드리고, 영양제도 챙겨드리고, 용돈도 드리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기도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냥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졸라댈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크신 은혜와 자비에 깊이 감사드리는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대자연을 창조하시고, 사랑스런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찬미의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참된 기도가 어떤 것인지 늘 고민해봅니다.
한 인간 존재가 자신의 창조주이며 근원이신 하느님, 나를 극진히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은 나를 바라보는 것, 그분이 너무 사랑스러워 그저 가까이 앉아 있는 것만 해도 행복한 상태.
결국 유한한 한 인간 존재가 영원하신 하느님께 항상 연결되며 사랑을 주고받는 것, 그것이 기도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지향하는 청원의 기도를 들어주셔도 좋지만 당장 들어주시지 않아도 괜찮은...
그저 우리가 하느님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그 자체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저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그분 안에 머무는 그 자체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기도>
오늘 말씀의 뜻은 “세속에서는 끈질기게 졸라대야만 겨우 청을 들어 줄 때가 많다. 그러나 아버지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청하면 곧바로 기꺼이 들어 주신다.”입니다.
또는 “세속에서는, 처음에는 청을 들어 주려고 하지 않다가, 끈질기게 졸라대면 못 이기는 척 하고 청을 들어 줄 때가 많다. 그러나 하느님은 너희가 청하면 곧바로 들어 주시는 분이다. 처음부터 너희의 청을 들어 주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뒤의 18장에 있는 다음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루카 18,7-8ㄴ)
하느님은 미적거리지 않으시는 분이고, 지체 없이 기도를 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상황을 조금 바꿔서, ‘빵 세 개’를 꾸려고 하는 상황이 아니라, 훨씬 더 긴박한 상황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가족에게 목숨이 위험한 어떤 ‘응급 상황’이 생겼다고 연락이 왔다면?
그러면 누구든지 모든 것을 중단하고, 곧바로 달려갈 것입니다.
한밤중이라면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식사 중이라면 먹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경우라면 그 일들을 중단하고, 즉시 갈 것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런 분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정말로 사랑하시는 자녀이고, 그래서 어떤 ‘응급 상황’이 아니더라도 내가 간절하게 청하면, 곧바로 조치를 취하시는 분입니다.
실제로 그런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밤낮으로 부르짖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끊임없이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바로 그 ‘가장 좋은 때’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생각하시는 ‘가장 좋은 때’와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때’가 다를 때, 사람들은 흔히 하느님께서 미적거리신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지금 당장’이 ‘가장 좋은 때’ 같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몇 년 후나, 몇 십 년 후, 또는 몇 백 년 후를 ‘가장 좋은 때’ 라고 판단하실 수도 있습니다.
기도에 관해서 말할 때 ‘믿음’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냥 ‘믿음’이 아니라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겨우 기도 한 번 하고 나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청하는 기도는 사실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한 준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언제’ 주실지, 그것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잘 받으려면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끈질기게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은 주실 때까지 계속 떼를 쓰는 일이 아니라, 사실은 차분하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불안해하거나 초조해 하지 않고...
하느님은 우리가 악한 것을 청해도 좋은 것을(선한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자기가 청한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자기가 청한 것과 다를 때에는 받기를 거부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믿음’만 강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 자기가 원하는 것과 달라도 겸손하고 감사하게 받는 태도가 필요하고, 또 중요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자기가 원하는 때에 달라고 고집부리면서, 그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계속 끈질기게 졸라대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의 욕심과 고집을 꺾을 줄 모른다면, 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와 순종이 없다면, 그런 믿음은 참된 믿음이 될 수 없고, 신앙생활에 해가 될 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올바른 것’을 청해야 하고, ‘올바른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어떤 문이 ‘올바른 문’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을 모르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8,26ㄴ).
그리고 성령의 도움을 잘 받는 방법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참 좋은 영적 탄력 - 한결같은, 끊임없는 기도와 믿음의 삶>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항상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시편 90,14)
날마다 새롭게 확인하는 제 신원입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 가톨릭의 수도사제이다." 일기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오늘 역시 만세육창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어제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더불어 민주당이 압도적 승리로 끝났습니다.
선거혁명의 위력을 실감합니다.
한국사회가 얼마나 역동적 사회인지 희망을 읽습니다.
새벽 읽은 어느 열심한 자매가 보내준 카톡 메시지도 신선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헛된 것에 목숨 걸고 집착을 하는지요.
주님의 기도 열심히 바치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감사합니다.”
하루하루 강물같이 흐르는 시간입니다.
모두가 다 지나갑니다.
하느님 빼놓고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엊그제 10월10일 ‘아흔여섯 최장수 현역 문인 김남조 마리아 막달레나(1927-2023)’ 시인이 별세했습니다.
모든 일간 신문에서 큰 지면을 할애하고 있을 정도로 비중이 높은 가톨릭 대표적 여류시인입니다.
10년전 인터뷰 기사와 만93세 때 낸 시집 <사람아, 사람아>란 시인의 끝시집에 나오는 '사랑, 된다' 시 전문을 인용합니다.
“80년을 살고 나니까 생명이라는 것의 갸륵함을 느낀다.
사람은 물론이고, 현미경으로만 보이는 곤충일지라도 몸이라는 작은 우주 안에 신기한 맥동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주어진 시기까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사랑 안 되고
사랑의 고백 더욱 안 된다면서
긴 세월 살고 나서
사랑 된다 사랑의 고백 무한정 된다는
이즈음에 이르렀다
사막의 밤의 행군처럼
길게 줄지어 걸어가는 사람들
그 이슬같은 희망이
내 가슴 에이는구나
사랑 된다
많이 사랑하고 자주 고백하는 일
된다 다 된다.”
이 시집에서 시인의 다음 말을 통한 고백도 심금을 울립니다.
“나는 시인이 아니다.
시를 구걸하는 사람이다.
시여 한평생 나를 이기기만 하는 시여”
저는 ‘시’대신 ‘하느님’으로 바꿔 읽습니다.
“나는 시인이 아니다.
하느님을 구걸하는 사람이다.
하느님이여 한평생 나를 이기기만 하는 하느님이여”
분명 시인은 이렇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저절로 기도하기 마련입니다.
김남조 시인의 시는 거의가 기도시처럼 느껴집니다.
그의 뒤엉킨 생을 읽는 키워드는 단연코 ‘사랑’ 그리고 ‘사랑’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는 저절로 기도하고 시를 씁니다.
사실 사랑하면 누구나 시인이 됩니다.
가을은 기도의 계절이요 누구나 시인이 되는 계절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은 기도로 끝났고 지금 10월은 묵주기도 성월, 11월은 위령성월입니다.
비단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사람이, 사랑이 됩니다.
사랑하라 사람입니다.
그러니 기도해야 사랑이요 사람이 됩니다.
어제 복음은 주님의 기도였고, 오늘은 기도와 믿음의 삶에 대한 자세입니다.
끊임없이 간청하라는 비유 마지막 예수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줄 것이다.”
좌절하지 말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집요하게 청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거룩한 뻔뻔함은 얼마든 좋습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그대로 예수님의 심중을 반영합니다.
역시 한결같이, 끊임없이 청하라는, 끊임없이 시도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이것은 기도의 자세이자 믿음의 자세이고 삶의 자세입니다.
끝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이렇게 살아야 참 좋은 영적탄력에 영적건강입니다.
그러니 탓할 것은 하느님도 그 누구도 아닌 나입니다.
쉽게 포기하고 쉽게 좌절하는 나입니다.
제 좋아하는 단골 용어도 생각납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참 신자의 삶이요 이래야 영적 탄력이 살아난다.”
육신의 탄력이 떨어져도 열정이 식어 영적 탄력이 떨어지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영적탄력의 척도는 백절불굴의 믿음이요 희망이요 사랑의 열정입니다.
이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끊임없는 하느님 사랑의 표현인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도 멋지고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다 더 주시겠느냐?”
최고의 참 좋은 선물이 성령이요, 이 성령이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원동력이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이런 성령의 사람들, 영적탄력 좋은 기도와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말라키 예언서에 나오는 불신자들처럼 무엄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 것은 헛된 일이다.
만군의 주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그분 앞에서 슬프게 걷는다고 무슨 이득이 있느냐?
이제 우리는 거만한 자들이 행복하다고 말해야 한다.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번성하고, 하느님을 시험하고도 화를 입지 않는다.”
하느님을 떠나 희망을 잃어 버렸을 때, 영적탄력을 잃어 버렸을 때, 완전히 부정적 비관적 인생관이요 회복불능의 좌절 절망 상태로의 전락입니다.
참으로 말라키 예언서 마지막 부분, 심판과 구원이 확연히 드러나는 상황이 더욱 우리를 분발케 하여 한결같은, 끊임없는 기도와 믿음의 삶을 살도록 부추깁니다.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라.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겨두지 않으리라.”
오늘이 그날입니다.
언젠가 그날이 아니라 오늘 여기부터 시작된 심판이자 구원입니다.
오늘 여기서부터 천국을 사는 이도 있고 연옥을 또 위 상황같이 지옥을 사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묘사는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리라.”
(말라키 3,20ㄴ)
바로 주님을 경외하여 한결같이, 끊임없이 사랑의 기도와 믿음의 삶에 충실한, 영적탄력 좋은 이들에게 오늘부터 주어지는 축복의 현실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하느님, 우리 주의 어지심이,
우리 위에 내리옵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우시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시편 90,17)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 상자’는 이야기의 내용은 다르지만 이야기의 구성은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낙원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을 맡겨 주셨습니다.
다만 ‘선악과’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서는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았다고 전해 줍니다.
유혹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의 열매를 먹었고, 결국 낙원에서 쫓겨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하와에게는 출산의 고통이 주어지고, 아담에게는 거친 땅을 일구어야 먹을 수 있는 노동의 고통이 주어집니다.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류 최초의 여성입니다.
불의 신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의 나라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자 제우스는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불러 아름다운 여자를 만들게 하고, 여러 신에게 자신의 가장 고귀한 것을 선물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모든 선물을 받은 여인'이라는 뜻의 판도라가 탄생하였습니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온갖 고통과 악이 들어 있는 상자, 즉 '판도라의 상자'를 준 뒤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아우 에피메테우스와 결혼한 판도라는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다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만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 순간 상자 속에서 슬픔과 질병, 가난과 전쟁, 증오와 시기 등 온갖 악(惡)이 쏟아져 나왔으며 놀란 판도라가 황급히 뚜껑을 닫았으므로 희망은 빠져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인간은 이전에는 겪지 않았던 고통을 영원히 떨쳐 버릴 수 없게 되었으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하며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선악과와 판도라의 상자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유의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자유와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유의지는 이제 우리의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헌법 37조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헌법에 의해서 우리는 신체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유에 따른 ‘책임’입니다.
자유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자유의지가 이성과 오성을 만나면 종교가 되고, 문화가 되고, 역사가 됩니다.
자유의지가 교만과 욕망을 만나면 폭력과 전쟁이 되고, 증오와 원망이 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너희는 주님을 경외하며 그분을 온전하고 진실하게 섬겨라.
그리고 너희 조상이 강 건너편과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주님을 섬겨라.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들과 이 땅에 사는 아모리족을 우리 앞에서 몰아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신앙의 여정도 그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처절한 실패이고 억울한 죽음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시 일어났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났습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났습니다.
원망에서 감사함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을 선택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선택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을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깃발을 선택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는 머물 곳이 많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느 인기 연예인의 수필을 읽다가 이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어렸을 때, 자전거를 타다가 발등을 다치게 되었는데 제대로 관리를 안 해서인지 피부 괴사가 진행된 것입니다.
결국 수술까지 하게 되었고, 수술 결과로 발등에 흉터가 생겼습니다.
이 흉터가 정말로 싫었고, 이 흉터에 대한 남의 시선을 느끼면서 하나의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타투를 해서 흉터를 가린 것입니다.
이렇게 흉터를 가려서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의 흉터를 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피곤한 일이 더 생겼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이게 뭐야? 안 아팠어? 왜 했어? 어디서 했어?” 등의 질문이 계속해서 주어졌습니다.
못난 흉터가 보이는 발등에 대해서는 아무도 어떤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타투로 꾸며진 발등에 대해서는 너무 큰 관심과 시선이 쏟아지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관심과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발등을 더 숨기고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나의 단점에 대해 다른 이는 그렇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나만 관심을 가질 뿐입니다.
사람들도 나처럼 흉하게 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오히려 더 큰 관심을 끌게 되었던 것을 보면서, 다른 이의 시선보다 나의 시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이의 시선을 신경 쓰기보다 주님의 시선에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요?
더욱 올바르게 살게 되면서 자기 시선에 대해서도 만족스럽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내맡기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즉, 필요한 것을 청할 때, 한결같이 신뢰하고 끈질기게 청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성령까지도 주실 것이라고 하시지요.
사람의 시선이 먼저가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이 먼저였습니다.
사람의 시선만을 따지면 계속해서 숨으려 하고 더 나아가 좌절과 절망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 가득하신 하느님의 시선에 집중할 수 있다면, 자기를 드러내고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길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루카 11,9)
빵을 꾸어 달라고 간절히 청하는 친구에게 빵을 내어주는 것은 혈연이나 학연, 인맥과 화려한 경력 때문이 아니라, 청하는 이의 간절함과 진실함 때문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만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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