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글을 쓰려면 그 글을 쓸 자격을 따져봐야 한다. ‘영어학습에 대해 글을 쓸 자격이 이 글을 쓴 기자에게 있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독자가 있다면, 그 의문은 정당하다. 기자는 1985년부터 몇 년 전까지 한 1억원어치의 한영 번역을 했다. 알랭 드 보통, 『총·균·쇠』의 저자 다이어먼드 교수, 폴 케네디 교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등 해외 석학급 인사들을 수십명 인터뷰했고 인터뷰를 묶어 곧 책으로 낸다.
하지만 기자가 영어를 아주 잘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다. 겸손이 아니다. 특히 생활영어가 약하다. 해외 칼럼을 번역할 때에는 모르는 단어 찾느라 정신이 없다. 영어공부를 한번 체계적으로 하고 싶으나 게으른데다가 ‘시간이 없다’는 핑계가 있다.
기자의 경험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체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가지 사례라고 생각하고 이 글을 읽으면 된다.
영어를 학습하는 게 아니라 영어 학습에 대한 책을 읽는 데 몰두하는 ‘오류’에 빠지는 영어학습자도 상당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영어 학습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여러 사례를 검토해보고 ‘나 만의 영어 학습법’을 개발해 그 학습법을 쭉 밀고 나가면 된다.
기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다음 몇 가지를 말할 수 있다.
- 영어 학습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고통스럽다. 아니 영어 자체가 고통스럽다.
책 제목 자체가 ‘고통 영어’라는 영어학습서가 나왔으면 좋겠다. 표지에는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의 삽화를 쓰면 좋겠다. 영어는 고통이다. 수많은 광고와는 달리 말이다.
미국에서도 상당수 간부급들이 타임·뉴스위크 같은 고급 매체를 제대로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속으로 끙끙 앓는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TV 뉴스를 보고 얻은 지식으로 고급 매체를 소화하고 있는 척 한다는 것이다.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 간부급까지 올라가는 데 성공한 사람들도 영어가 고통스러운 것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에게 영어를 잘하는 법에 대해 물었더니 ‘꾀부리지 말고 그냥 무식하게 공부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씀하셨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이다’는 말이 영어학습에도 적용될 수 있다.
사례를 들어보자. 최고경영자로서 외국 회사들과 영어로 거래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는 분이 이런 말을 하시는 것을 들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서 영어 교과서를 다 외라고 하셨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 외지는 않았다. 같은 반의 한 녀석은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실제로 교과서를 통째로 외었다. 수십년 지나고 보니 그 녀석은 영어가 원어민 수준, 나는 아니다. 사업에 지장은 없지만.”
- 영어가 고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영어 학습법이 나온다.
독해력을 늘리려면 지문을 직접 번역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기자의 경우에도 『성문 종합영어』에 나오는 지문을 모두 번역하고 책 끝에 나오는 ‘정답’과 대조했다. 듣기 공부도 마찬가지다. 녹음기를 틀어놓고 받아쓰기를 직접 해봐야 한다. 수백번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십번은 들어본 다음에야 답을 봐야 한다.
- 가시적인 것과 성취감 체험이 필요하다.
영어 공부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다. 그래서 고통스럽고 재미가 없다. 성취감을 맛보는 한가지 방법은 카드에 새로 접한 단어를 적는 것이다. 앞면에는 단어를 뒷면에는 뜻을 쓰는 것이다. 카드 묶음이 수십개 수백개가 쌓이는 것을 보면 스스로가 기특하다. 영영한 사전을 한 권 사서 찾아본 단어에 줄을 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손때가 묻은 사전만큼 성취감을 주는 것도 없다.
- 단어가 곧 영어다.
‘CNN에 나오는 단어들은 우리가 다 아는 단어다. 귀 훈련이 되지 않아 안 들릴 뿐이다.’ 이 말은 거의 거짓말에 가까운 말이다. 단어 자체를 몰라서 안 들린다고 보면 된다. 단어 카드 만들어가며 단어를 외어야 한다.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영어 단어는 수백 개에 불과하니 어려운 단어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실생활’에는 직업이나 생활 스타일에 따라 뉴욕타임스 칼럼 읽기가 포함될 수도 있다. 아무리 이상하고 희한한 단어라도 다 쓸 데가 있다.
- 문법이 중요하다.
문법을 무시해야 한다는 ‘이상한’ 풍조가 있다. 문법은 몰라도 문법에 맞게 말하고 글을 써야 한다. 영어 말하기·쓰기 시험에서 중요한 측정 기준도 문법이다.
- TOEIC을 무시하지 말고 우군(友軍)으로 삼아야 한다.
이상하게 TOEIC을 무시하는 풍조가 있다. ‘TOEIC 900점이 넘어도 입도 뻥긋 못하더라’는 말도 있다. 기자는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여러분은 여기 TOEIC 공부하러 온 거지 영어 공부하러 온 게 아니다. 영어 공부는 입사 후에 하라’는 강사도 있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점수 늘리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어차피 TOEIC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라면 ‘TOEIC 따로 영어 따로’인 것은 이상하다. TOEIC 문제를 만드는 사람들은 수십년 동안 테스팅에 몰두해온 기관의 전문가들이다. TOEIC에 나오는 독해·리스닝 지문은 검증된 좋은 지문들이다. 읽기·듣기 공부를 하는데 믿을만한 내용이다. 외다시피 숙지하는 게 좋다. TOEIC에도 한계는 있을 것이다. TOEIC은 대략 중급까지만 영어 능숙도를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급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TOEIC의 세계에서 나와 더 넓고 높은 세계로 나아가 도약해야 한다.
- 학습은 초급·중급·고급 수준으로 진행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의외로 무시되고 있는 영어 학습의 ‘진리’다. TOEIC은 중급용이다. 자신이 중급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중학교 교과서부터 다시 봐야 한다. 초급에서 중급이 되는데 6개월이 걸린다면, 중급에서 고급이 되는 데는 2~3년이 걸린다. 학원 같은 데 가서 레벨(level) 테스트를 받고 예컨대 자신이 1단계~10단계 중 어디에 속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 영어는 누구나 배울 수 있다.
말 가는 데 소 간다. 하루에 1~2시간씩 영어를 공부하면 누구나 3년이면 중급 수준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다. 하루에 10시간 공부하고 한달 동안 영어책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보다는 하루에 30분이라도 해야 한다.
- 영어 학습은 목적에 부합돼야 한다.
영미권 출판사나 신문사에서 교정·교열을 보는 에디터에게나 중요한 시시콜콜한 문제, 즉 작가나 기자도 잘 모르는 영문법과 어법에 집착하는 학습자도 있다. (물론 영자지 에디터가 되는 게 목표라면 영문법·어법에 대한 책이나 언론사의 스타일매뉴얼을 사서 공부해야 한다.) 그런 경우 영어에 대한 지식은 많게 되도 영어 활용 능력은 오히려 미흡하게 된다.
- 학원을 다녀야 영어가 는다.
강철 같은 의지가 있다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다음에는 독학해도 된다. 대부분의 학습자들은 의지가 약하다. 세계적인 마라톤 선수들도 같이 뛰어줄 동료가 필요하다. 중간고사·기말고사 기간에 도서관 자리 잡기가 힘든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집에서 공부하면 되는데 왜 도서관에 자리잡으려고 새벽부터 그 난리일까. ‘공동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도서관 자리잡기가 시작되면서 ‘시험 모드’로 전환하게 된다. 학원 못지 않게 유용한 것은 영어 스터디 그룹이다.
- ‘왕따’가 될 각오도 필요하다.
직장인의 경우에는 술을 끊어야 학원에 제대로 다닐 수 있다. 저녁 회식에 ‘개근’하다 보면 학원의 저녁반도 새벽반도 다닐 수 없다. 며칠 빠지면 진도가 훌쩍 나간 후다.
- 인생은 짧고 영어는 길다.
만약 영어가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에 필수적이거나 도움이 된다면 지금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지금 하지 않으면 영어는 40세가 되건 60세간 되건 영원히 고통으로 남는다.
- 영어를 사랑하라.
영어에 대한 증오, 영어를 하는 사람에 대한 증오를 표출하는 사람들도 있다. 권력은 권력을 증오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돈은 돈을 증오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게 아닐까. 영어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