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5년 공동의 집인 지구를 돌보는 것에 관한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반포하시어 해마다 9월 1일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지내기로 하셨다. 이날 교회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의미를 묵상하고, 창조 질서를 파괴한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며, 생태계를 보호할 것을 다짐하는 시간을 가진다.
제1독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는 안 된다. 주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4,1-2.6-8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곳을 차지할 것이다.
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도 안 되고 빼서도 안 된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6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규정을 듣고,
‘이 위대한 민족은 정말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이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
7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8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제2독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1,17-18.21ㄴ-22.27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17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습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21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22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27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1-8.14-15.21-23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1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마음을 빼앗기는 법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은 왜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은 외적인 행위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알 바꿔야 거룩해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마음은 원하고 믿고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인간은 원죄로 자기가 신이라 믿고 소유하고 먹고 이기는 데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 마음을 없애고 당신의 마음을 넣어주는 일이 구원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겠다.”(에제 36,26)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전갈과 개구리’ 이야기에서도 개구리처럼 착해지고 싶었던 전갈이었지만, 정작 수영을 할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자기를 태워주는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개구리도 죽이고 자신도 죽습니다. 마음으로 자신이 전갈이라 믿고 있으면 아무리 개구리처럼 살려고 하더라도 전갈의 본성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믿는 대로 이뤄집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9)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우리 구세주로 믿으면 마음이 고쳐집니다.
영화 ‘김 씨 표류기’(2009)는 어떻게 자기 마음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김 씨는 회사에서 잘리고 애인과도 헤어졌는데 빚 독촉도 심해지자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립니다. 그런데 한강 밤섬에 표류합니다. 표류한 김에 적응하며 사는데 다른 사람 간섭을 안 받고 혼자 사는 삶이 즐겁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입니다. 자기의 마음이라는 섬에서 자신이 왕입니다. 그리고 생존에 집중합니다. 김 씨는 짜파게티 봉지를 보고 그것을 만들어 먹고자 합니다. 그를 지켜보던 극도의 대인기피증으로 방 안에서만 살아가는 김정연이라는 여자가 김 씨를 사진기로 보고는 그 섬까지 짜장면을 시켜줍니다. 김 씨는 짜장면을 거부합니다. 그것을 받으면 간섭 받아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농사지어서 결국엔 짜파게티를 만들어 먹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행복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허무함과 그 달콤함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는 중에 여자 김 씨와 소통하며 조금씩 관계를 쌓아갑니다. 결국 섬에서 쫓겨나게 되었지만, 그는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 김 씨도 집 밖으로 나와 남자 김 씨에게 달려옵니다. 이제 둘은 서로의 섬이 되어줍니다. 갈 곳이 생기자 이제 이전의 자기를 지배하던 섬, 곧 마음을 버리고 탈출에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의 마음을 빼앗겨야 합니다. 아기가 부모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 방법은 피를 받음으로써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살과 피를 내어줍니다. 자녀는 마음으로 미안함과 감사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 마음 안에서 살지 않고 부모의 마음으로 삽니다. 부모가 기뻐하는 일을 하려 하고 마음 아픈 일은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부모의 세계로 성장하며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저에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제 내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렇게 사제가 되고 조금씩 하늘 나라에 살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성체성사로 예수님께 계속 마음을 빼앗깁시다. 그분의 마음으로 구원될 것입니다. 전래 동화 ‘선녀와 나무꾼’에서 선녀는 나무꾼에게 자기 옷을 빼앗겨 아기까지 낳습니다. 나무꾼은 옷을 숨긴 미안한 마음에 선녀에게 옷을 내어줍니다. 선녀도 아이 둘을 데리고 올라와 나무꾼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방법을 고안하여 나무꾼을 하늘로 불러 올립니다. 그리스도와 우리는 서로 마음을 빼앗기는 관계입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부부싸움에서 가장 큰 원인은 “당신은 왜 변하지 않느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자매님께서 남편에 대한 불만을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눈물까지 흘리시는 것을 보니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이 모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물으니, 결혼과 동시에 그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결혼하신 지 40년이 넘으셨으니, 40년 넘게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하소연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쭤보았습니다.
“40년 넘게 변하지 않으셨는데, 과연 남편분께서 변하실 수 있을까요?”
우리의 불만족은 상대가 달라지기를 바라면 바랄수록 커집니다. 상대의 변화를 바라는 것, 그래서 조금 더 나은 자기 배우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분명히 이기적인 감정이지만 피하기 어려운 마음일 것입니다. 상대방이 변하면 자기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그래서 이기적인 감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상대는 이 변화로 오히려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40년 넘게 유지했던 자기 모습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변하지 않아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자기가 불행이라는 틀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사랑만을 이야기하시고 당신 삶으로 직접 사랑을 보여주셨던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행복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께 변화를 요구합니다. 제발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 몇 사람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서 따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해 주십니다. 단순히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행위보다 깨끗하고 흠 없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인간의 전통과 관습 위에 있습니다. 당연히 하느님 섬기는 행위가 손 씻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자기와 다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하는 것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다름 아닌 바로 일의 계획과 방향을 세우는 인간의 의식에서 나온다고 하시면서 진정으로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이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에는 제2독서의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1독서 신명기 말씀처럼, 오로지 주님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결국 주님의 사랑에 집중하면서, 자기의 진짜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가장 강한 나무는 가장 유연한 나무이다(노자).
사진설명: 오늘은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