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년 전의 내 모습
1950년대 초 서해안 충남 보령군 웅천면 구룡리에서는 7년간 대흉년이 들었다고 한다. 이런 흉년을 기억하는 화망마을 사람들에게는 먹는 것이 하나의 전쟁이었다고 본다.
내가 기억하는 1950년대 말 - 단지 끼니를 얻어먹을 뿐인 굶주린 貧民들. 내가 국민학교 시절에 전학 간 大田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는 기억이 지금도 인상 깊게 남았다.
그들은 너무나도 가여운 存在이었기에 나는 지금도 그들을 '거지'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당시에는 끼니조차 굶은 사람이 많았기에 영양가가 적은 채소류와 고구마 감자 등을 먹어서인지 아이들의 아랫배는 올챙이 배처럼 불룩 내밀었다. 그리고 날채소류를 먹은 탓인지 횟배를 앓는 아이가 많았으며, 학교에서는 이따금 회충약(구충약)을 나눠주었다.
해가 짧은 겨울철에는 늦게서야 아침밥을 먹고, 점심은 건너뛰거나(굶음) 고구마 몇 개로 점심을 때웠으며, 그 대신에 저녁밥은 일찍 먹고는 일찍 잠자리로 들어갔다.
아침밥을 먹을 무렵에는 대문가에서 헛기침을 하는 貧者가 종종 있었다. 소반(小盤)에 조촐하게 밥상을 차려주면 혼자서 다 먹거나 아니면 몸에 지닌 바가지나 깡통에 밥덩이와 반찬을 그릇째 쏟아서 담아갔다. 아마도 가족의 끼니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봄철의 못자리와 모내기, 여름철의 세벌 김 매기, 피사리, 가을철의 벼 베기, 볏단 나르기, 벼 바슴 등에는 일꾼들이 많이 동원되었다. 들밥 또한 항상 많이 퍼 담아 일꾼이 지게로 날랐으며 숟가락도 열 개쯤 여벌로 더 가져가야 했다. 들밥을 먹을 때는 일과 상관없는 들녘의 사람들을 불러서 같이 먹었다.
당시 우리 집 논은 머슴이 직접 지었으며, 타 동네 무술(竹靑里)과 大昌里에서 소작료(小作料)가 들어왔다.
봄철 밭 언덕에 지천으로 널린 풀은 삐비*였다. 삐비 대궁을 손으로 잡아당겨 뽑아내면 속에서 뽑혀 나온 대궁 끝에서 달짝지근한 즙(액체 방울)이 나왔다. 이것을 빨아먹고 또 대궁의 끝부분을 씹어서 맛을 보았다.
논둑을 괭이나 삽으로 파면 가느다란 마디 띠(삐비 뿌리)가 나왔으며 이 띠를 깨끗이 씻어서 - 실은 바지자락에 슥슥 문질러서- 잘근잘근 씹으면 흙냄새와 함께 달짝지근한 맛이 우러났다.
이른 봄 뒷산에 올라 활짝 핀 진달래 가지를 꺾어 집에 가져와서 물병에 꼽아 두었다. 봉오리는 꽃이 되어 활짝 피었으나 산에서 피던 싱싱함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진달래 꽃잎을 따 먹었으며, 입안 가득히 씹다가 땅에 뱉으면 섬뜩한 핏빛이었다.
어머니는 진달래 꽃잎을 조그마한 단지 안에 꾹꾹 눌려 담은 뒤 아구리를 천(옷감)을 덮어 부엌광 그늘 속에 둬서 진달래 술을 담기도 하였다. 진담(가래)를 삭히는 약용으로 쓴다고 하나 나는 발효되어 쉰내와 군둥내가 심한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더 이상 맛을 보지 않았다.
충남 보령 해안지방의 진달래는 樹高가 1미터 이내이며, 대체로 줄기가 가늘고 樹形이 왜소하였다.
6월. 집 주변의 양지바른 터(곳)에는 연노란 색깔의 잎을 가진 열매. 붉은 색깔의 뱀딸기가 앙징스럽게 매달리기에 이것으로도 입정거리를 했다. 그러나 뱀딸기는 뱀이라는 명칭이 첫 글자에 붙어서 섬뜩한 느낌을 주었으며, 키 작은 풀속에 배암이 숨어 있거나 또 뱀이 딸기를 입맛 다셨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먼저 들기도 했다.
6월 초. 흔하디 흔한 식물은 찔레나무이다. 짙은 녹색 풀물이 배는 여린 순을 한 뼘 길이로 잘라서 엺은 껍질을 손톱으로 벗겨낸 뒤 속살인 연하디 연한 새순을 씹으면 달작지근하고 풋냄새가 났다. 먹을 만하였으나 풋내가 유난히 나서 많이 먹지는 않았다. 찔레넝쿨은 잔 가시가 많아서, 자칫하면 찔리며 다치기에 사람 손길이 별로 닿지 않아서 덤불로 남아 있었다.
밭뚝(어덕)이나 야산에는 뽕나무나 산뽕나무가 종종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누에를 쳤던 뒷끝이라서 더 이상 뽕나무를 재배하지 않고는 톱으로 베어냈고, 실뿌리를 완전히 다 캐어내지 못했기에 이따끔씩 뽕나무 뿌리에서 새순이 올라와서 저절로 번식되었다.
뽕나무 열매 오디는 검은 빛깔이다. 오디를 많이 따 먹으면 입안이 검게 물이 들었다. 감칠난 단맛에 입안과 혓바닥 그리고 손가락이 온통 검으죽죽 물들어도 이를 마다할 아이들이 아니었다.
가을철 야산에는 맹감나무(청미래덩굴) 열매가 열렸다. 붉은 색깔의 열매를 조금씩 따서 맛을 보았으나 많이 먹지는 않았다. 맛이 떫고 또 껍질뿐이기 때문이었다.
변변찮은 누더기 옷을 입고 땟국물과 흙먼지 그리고 뽕나무 열매인 오디-물과 벚나무 열매인 버찌-물로 얼굴이 더러운 아이를 발견한다면 그게 오십 년 전의 내 모습이다. 그러니 여행을 하다가 좀 어리숙하며 뚱한 표정을 지닌 村 아해를 본다면 무조건 귀여워해 주기를 당부한다. 그 아이가 바로 오십 년 전의 나(眞我)이며, 순수함 순박함 순진함이 물씬나는 진아(眞兒)이기 때문이다.
2001. 5.
삐비 : 삘기가 표준어 : 풀 띠의 새로 나는 어린싹
삐비(삘기)
사진은 인터넷으로 검색.
어떤 식물인지를 회원들한테 소개하려고 퍼 왔기에 용서해 주실 게다.
위 글은 .... 21년 전에는 내가 중국 한자말을 많이 썼다는 증거이다. 그 당시의 내 글 솜씨가 별로였다는 증거로 그냥 놔 둔다.
아련히 기억이 난다. 밑구멍이 터진 바지 하나를 입고(응가하기 편하려고...), 집에서 세모시로 만든 베옷을 입고, 콧물 줄줄 흘러던 어린아이가 생각이 난다.
첫댓글 어렴푸시 아니 생생
하게 기억나는 삐비
주먹으로 한줌식 뽓아
먹어거든요
달자지근 향도나면서
무척 먹었답니다 ㅎ
삐자만기억이 확실히
추억 재생더듬시간주셔 감사합니다
글 읽어주셨군요.
고맙습니다.
엄지공주님은 '삐비'를 아시는군요.
서해안 산골마을에 있는 제 텃밭.... 오래 방치한 탓으로 '띠' 풀 뿌리가 자꾸만 번지대요.
왕대나무를 포클레인으로 다 캐냈는데도 또다시 벋어내려오고,,, '띠'풀도 덩달아서 번지고....
띠는 실뿌리가 무척이나 많아서 흙덩어리를 감싸쥐지요.
가난한 사람이 초가집을 지을 때에는 삽으로 '띠'풀을 사각형으로 깊게 파서 뜨대요.
하나의 벽돌마냥.... 이것으로 흙벽을 쌓아올려서 집을 짓대요. 흙집!
제가 기억하는 1950년대... 정말로 가난하고, 후지고, 무지하고...
2020년대인 지금은 세상이 너무나도 크게 변해서... 천지개벽한 듯한 느낌이지요.
한국전쟁이 터진 뒤... 7년간 가믐으로 폐농하고는 밥 얻어먹으러 다녔다는 동네사람들...
그들한테는 자연에서 뜯고, 캐는 식물이 모두 소중한 먹을거리가 되었겠지요.
'삐비'가 무엇인지를 잘 아시는 엄지공주님. 댓글 고맙습니다.
참 그때는 왜그리도 먹을께 없었지요 진짜루 보이는데로 먹었다고 하면 맞을겁니다
예
댓글 고맙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1950년대, 60년대...
산골의 다랑이논에서는 벼농사를 지으면 논 한 마지기 200평당 쌀이 2가마 살짝 넘었지요.
논 경지정리가 안 되었기에 빗물이나 시냇물에 의존했으며... 가믐이 심하면 논에 모를 심는 게 아니라 메밀씨앗이나 뿌렸지요. 그것이라도 심어서...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는 논 한 마지기당 쌀이 5가마 정도는 나옵니다.
벼 종자도 개량되었고, 논은 경지정리되었고, 시냇물이 없는 지역에서는 지하수를 개발하여 전기 모터로 물을 뽑아올려서 논에 넣고...
그당시 머슴(일꾼)은 주인집에서 먹고 자면서 일년간 농사 지었지요. 가을에 쌀 8 ~12가마니를 1년 새경으로 가져 갔지요.
쌀 한 가마니(80kg)... 2022년인 지금은 쌀 한 가마니 가격이 19만 원도 채 안 되지요. 머슴의 일년 품값이 고작 쌀 8 ~12가마니였다니....
무척이나 곤궁한 삶이였을 터... 과거로 되돌아가면 백성들은 오죽이나 힘이 들었을까요?
2022년인 지금 쌀은 너무나 흔하디 흔하지요. 먹을거리도 천지에 가득 찼고...
저는 옛일을 얼추 기억하고 있으니... 저는 아직껏 가난한 사람인가 봅니다.
'삐비(삘기)', 제 고향에선 삘기로 통했지요.
저도 어릴적 풀숲에서 뽑아 먹은 적 있어요.
저 역시 오디와 버찌로 허기진 배를 채운다고
들로 산으로 쏘다니기도 했구요.
망개나무'(청미래 덩굴) - 내 고향에서 사투리로 멍개나무라 하더군요'에 열리는 열매가
파랄 때는 연해서 아작아작 씹어 먹고
빨갛게 익으면 입안에서 우물우물하다가 씨를 뱉어내곤 했지요.
저는 올해 오산천 뚝방길의 찔레나무에서 찔레순을 꺾어 껍질을 벗겨내고
아작아작 씹어보기도 했어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그 시절, 어린 우리들은 기껏해야 산이나 들에서 나는 열매나 뿌리, 줄기 등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려 무진장 애를 썼지요.
쌀은 고사하고 보리쌀, 밀가루도 없는(부족한) 집에서는
고구마, 감자는 김치와 함께
주식으로 먹다시피했지요.
60년 전의 제 모습이었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박민순 선생님은 망개나무를 잘 아시는군요.
충남 보령지방에서는 '멍감나무'라고 하지요.
인터넷어학사전에는 '멍감'이 안 나오기에 망개나무로 표현했지요.
저도 찔레순 많이 꺾어서 먹었지요.
2022년인 지금도 제 텃밭에는 찔레줄기가 자꾸만 번지대요. 주인이 객지로 떠났으니...
일전 산소 벌초하려고 시골에 내려갔다가 텃밭을 보고는 놀랬지요. 찔레나무가 너무나도 번져서....
고구마. 감자...
저는 감자를 '북감자'로 말하지요. 북쪽지방에서 전래된 감자이기에 '북감자'라고 하지요.
고구마... 제 시골집에서는 고구마 농사를 많이 지어서... 구루마., 나중에는 트럭으로 넘겼지요.
그만큼 구호식품이었지요.
박 선생님 댓글을 보고는 많은 생각과 글감이 떠오릅니다.
삘기의 달착지근한 맛이 기억 납니다~~
어린시절 제 모습도요~~
댓글 고맙습니다.
삘기...
그거 시골 아이들의 입정거리가 되지요.
가을철이면 삘기(삐비)의 하얀 털이 부수수 벌어져서 바람에 휘날리지요.
고들빼기 님도 그런 추억이 있군요.
제 고향에서는 삐삐라고 했어요.
하굣길에 산속을 헤매면서 참꽃이랑
삐삐를 찾아서 따먹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산속을
헤매고 다녔답니다.
이런 글은 참 귀한 글입니다
잊혀져 가는 추억이니까요.
잘 읽고 갑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삐삐...
참꽃은 혹시 진달래꽃이 아니던가요?
오래 전 산들이 벌거숭이었을 때에는 참꽃(진달래)가 무척이나 많았지요.
시골사람들은 부엌짝에서 땔 나무를 마련하려고 산에서 나무를 베어내고... 헐벗은 산에는 키 작은 진달래가 마구 번창했지요.
제 어린시절에도 사방공사를 다니던 사람들이 생각이 나는군요. 헐벗은 산에 묘목을 심고... 송충이를 잡으러 학교에서는 단체로 몰려다니고...
어린 송순을 꺾어서 먹기도 했지요.
다 시골 산골에서 살았던 시절의 옛날 이야기 같군요.,
@최윤환 맞아요, 참꽃이 진달래더군요.
나무를 베서 땔감으로 사용하다 보니
산은 벌거숭이가 되곤했지요ㅠ
학교에서 송충이도 잡으러 다녔고
솔방울도 따러 다니곤 했지요
@이베리아 댓글 고맙습니다.
진달래꽃잎에 술을 부어서 발효시키면 제법 독하지요.
예전... 폐병 등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들은 진달래-주를 만들어서 조금씩 홀짝거렸지요.
지금은 참꽃이 조금은 귀해졌지요.
산에는 울창한 숲으로 조성되었기에.
내년 봄에 고향 산에 가서 참꽃을 조금만 따서 냠냠해야겠습니다.
어린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삐비 ?그렇게 맛이 있었나요
어릴 때 회상이 화수분 처럼 분출 되는것 같습니다
동년배 님들은 많이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신나게 사시면 젊어진답니다 ^^
그러믄요. 며칠간 굶었다가 풀잎을 뜯어먹으면 맛이 기막히게 좋겠지요.
배고픈 시절에....
곡식이 떨어지는 오뉴월... 설익은 보리를 베어서 뜻뜻한 불길 위에 설익은 보리를 후이 후이 내저어서 보리를 익혀서 먹었지요.
쌀은 오래 전에 떨어졌고....
배가 고팠기에 삐삐 풀의 줄기를 뽑아먹고, 송순(소나무의 어린 새순)을 꺾어서 먹고...
칡뿌리도 캐서 먹고.. 먹고.. 먹고..를 해야 했지요.
예. 그럴 게요.
자꾸만 등허리가 굽어가는 세월에 와 있지만서도 마음으로 신나게 살아야겠습니다.
이렇게 댓글도 쓰면서...
소풀이라고 쏙 뽑으면 밑이 하얀 부분을 잘라 먹었던 그리고 송기 벗겨 먹고 돼지 감자 캐 먹고
댓글 고맙습니다.
송기 벗겨 먹고,
* 송기 : 봄철에 물이 오른 소나무의 속껍질
돼지감자는 지금도 제 텃밭에 있지요.
품종은 2종류....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땅 속에서 캐다가 그런대로 국 끓여서 먹지요.가마니로 가득 채울 만큼 많이 재배했는데도 지금은 제가 서울에 올라왔기에 조금만 재배하지요.
운선님은 강원도에서 자라났기에 이런 추억과 기억이 많겠군요.
돼지감자.....지금도 재래시장에서는 팔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