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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능력으로 십자가를 따르라 (고전3-4)
2026년 7월 8일 (수요일)
찬양 : 부름받아 나선 이몸
본문 : 고전4:1-21절
☞ https://youtu.be/g7bTi1A6NWU?si=Q3Yg_MZlC_guD7io
어제는 컨디션을 조절하는 시간을 가졌다. 장마로 인해 무덥고 습한 날씨에 컨디션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지만 평안함으로 주님께 나를 맡긴다.
오늘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나누는 시간을 갖고 제작한 성경공부 교재를 최종적으로 다듬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모든 시간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본문 4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1-2절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1절의 '일꾼'으로 번역된 <휘페레테스>는 일반적인 종을 의미하는 '둘로스(doulos)'와 다르다. 고대 갤리선(노를 젓는 배)의 맨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하급 노예’ 혹은 ‘선장의 명령을 수행하는 보조자’를 뜻하는 단어다.
고린도 교인들은 사역자들을 자신들이 선택하고 자랑하는 '지적인 지도자' 혹은 '영적인 우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는 너희의 파벌을 이끄는 우상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명령만 수행하는 하급 노예일 뿐이다"라고 선언하며, 지도자를 향한 그들의 과도한 숭배와 파당적 시각을 차단한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하급 노예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려는 사실은 사역자의 권위는 ‘그가 무엇을 맡았는가(복음)’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맡은 '비밀(그리스도)'을 주목해야 하고 그 비밀을 신실하게 전달했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사역자는 탁월함이 아니라 신실함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고 전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인간적 지혜로 사역자를 판단하는 것은 결국 분열을 초래할 뿐이기에 판단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5절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바울은 외치며 오직 주님이 판단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우리가 소유한 것은 모두 은혜로 받은 것으로 자랑의 이유가 될 수 없음을 드러낸다. 7절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바울은 지금 <너희가 가진 은사나 지식마저도 다 하나님께 받은 것인데, 어찌하여 그것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우열을 가리는 도구로 쓰느냐>고 책망하면서 함께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서로 연합하여 나아가야 함을 주장한다.
여기서 바울은 이렇게 살아가는 자신들의 삶을 이렇게 드러낸다. 9절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1-13절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여기서 바울은 사도의 정체성을 이토록 치열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도는 세상이 보기에 아무런 가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부정을 닦아내는 '걸레'나 '쓰레기' 같은 존재로 취급받았다고 한다.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왕 노릇' 하며 특권을 누릴 때,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하셨던 것처럼 세상의 모든 오물을 뒤집어쓰는 희생양으로 살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교인들에게 보내는 준엄한 표지판이다.
'너희는 스스로 지혜롭고 강하다며 왕 노릇 하고 있는데, 정작 그 복음을 전한 우리 사도들은 왜 이렇게 비참한 길을 걷고 있느냐?'
사도들이 고난받는 것은 그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다. 십자가를 따르는 길은 본래 세상에서 낮아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복음을 믿는 너희가 오히려 세상에서 높아지려 하고, 자기 자랑과 판단의 삶을 살고 있느냐는 것이다.
바울은 왜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권면하는 것입니까?
그는 그 이유를 14절에서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는 것'이라 밝힌다. 일만 스승은 많으나 아비는 적은 시대, 바울은 복음으로 이 교회를 낳은 '아비의 심정'으로 이 아픈 편지를 쓰고 있다.
이 모든 권면의 종착지는 20절의 선언이다. 20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이 고백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고 오직 성령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의 마음을 살아내는 그 삶의 현장,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능력의 현장'이라는 뜻이다. 결코 인간의 말솜씨나 교묘한 논리로는 살아낼 수 없는, 오직 십자가를 통과한 성령의 강력한 능력으로만 가능한 삶 말이다.
하나님 나라는 능력에 있다는 말의 핵심은 말로 판단하며 인간의 지혜를 자랑하거나 인간의 탁월한 능력을 나타내는 삶이 아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길을 따라 세상의 찌꺼기같은 삶을 비방속에도 당당히 걷는 삶이다.
소망하기는 나를 드러내려는 교묘한 속임에 빠지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당당히 걷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삶을 살기 원한다.
주님, 소망하기는 나를 성령의 능력으로 붙들어 주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종이 되게 하시고, 주 안의 평안만을 따르고자 애쓰는 주의 백성들에게 아비의 심정으로 증거하게 하소서.
한줄 묵상 :
<복음은 세상의 화려한 말이나 효율적인 방법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과한 성령의 능력으로 누군가를 낳고 기르는 아비의 사랑입니다.>
적용질문 :
1. 오늘 나는 '스승'인가 아니면 '아비의 마음'으로 포기할 수 없는 자녀를 대하고 있는가?
2. 내가 기대하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사람들의 인정과 사역의 화려한 결과물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비방과 오해 속에서도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가는 인내의 삶입니까?
3.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는 '판단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하급 노예(휘페레테스)'로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신실하게 전달하는 통로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