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제1독서
<나는 여러분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였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2,1-5
1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2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3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4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5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16-30
그때에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말씀을 듣고 화가 난다면?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가난은 겸손입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키웠기에 안다고 착각합니다.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을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결국 거북한 말을 하는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이려 합니다.
우리도 이처럼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말씀이 듣기에 거북하여 성경을 먼지가 쌓이도록 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거북할 때 더욱 그래야 합니다. 부모의 말씀이 거슬려도 아이들은 잘도 배웁니다.
며칠 전 제가 아는 세실리아 자매가 자기 경험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직속 상사와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누가 들어봐도 직속 상사가 문제였습니다. 자기 명예가 깎이는 것처럼 느껴지자 세실리아 자매의 사람들에게 소리를 치며 야단을 쳤습니다. 집에 돌아와 기도했습니다.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그건 네 탓이야!”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말은 듣기에 거북했습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덮어버리고 기도도 끝내지 않은 채 잠을 자버렸습니다.
다음 날 주님께 그렇게 한 것이 마음에 걸려 다시 말씀을 잡았습니다. 어떤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있는데, 그 신부님은 방 안으로 빛이 들어오면 먼지가 보이는 것처럼 나에게 잘못이 보이면 그게 빛이신 주님과 가까워졌다는 뜻이라고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나의 탓도 있다고 인정이 되니까 나도 그리스도와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는 기분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상사에게 전화하여 차나 한잔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일이 잘 풀렸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듣기 거북하다고 예수님을 절벽으로 던져버리려고 하였습니다. 세실리아 자매는 말씀이 듣기에 거북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머물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은총이 왔습니다. 말씀을 주시는 분은 그것을 실현할 힘도 주십니다. 힘을 받기 위해서는 거북한 말씀과 오래 머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말씀은 은총과 결합할 때 진리가 됩니다. 진실해라. 누구나 다 아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말했을 때는 그것이 내 삶을 변화시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생명을 주었으니까 말씀도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저도 어머니가 거짓말하는 게 제일 싫다고 하셨을 때부터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계속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말씀은 거북합니다. 그러나 은총을 기다리면 언젠가 옵니다.
그러나 만약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면 어떨까요? 말씀의 전례는 가볍게 여기고 성찬의 전례만 중요하게 여기면 성찬의 전례에서도 어떤 은총도 받지 못합니다.
김범석 교수에게 찾아온 70세의 노인 암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살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의사로서 볼 때 6개월 이상은 힘들 거 같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환자는 담대하게 그것을 받아들였고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고 떠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정말 매주 하나씩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들어본 바로는 거창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아내와 바닷가로 여행 가서 해산물 요리 먹기, 종일 바다 보기, 좋아하는 노래를 모아 자식들에게 선물하기, 손주들에게 편지 쓰기, 고향 친구들에게 밥 사주기, 예전에 싸웠던 친구에게 연락하기 같은 일상적이면서도 소소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고 사는 게 즐거워졌는데 얼마 남지 않아서 몹시 아쉽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내며 떠났습니다.
또 다른 노인 환자도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기대수명을 듣고는 딱 10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물었습니다.
“10년 더 사시면 뭘 하고 싶으세요?”
“...”
침묵이 흘렀고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가고 싶다거나, 손주가 학교 들어갈 때 교복 한 벌 해 주고 싶다거나, 아니면 고향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뭐 그런 거요.” “...”
여러 번의 질문에도 그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막연히’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는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여러 번 의사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아무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사실 6개월이란 시간은 은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말씀이 있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없었습니다. 말씀이 있는 사람은 6개월이 은총의 시간이었고 말씀을 거부한 사람에게는 마지막 6개월이 불만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전례가 먼저 있고 성찬의 전례가 오는 것입니다.
말씀의 전례는 거북합니다. 강론이 길고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씀을 통해 내가 변해야 하는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을 잡고 살려고 하면 은총을 주십니다. 제가 사제가 되려는 말씀을 잡으니 “다 주었다!”라는 은총으로 힘을 주셨던 것과 같습니다. 매일 말씀으로 삶을 변화시킬 결심을 합시다. 그러면 은총도 따라옵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앤절라 더크워스의 ‘그릿’이라는 책을 보면, 세 벽돌공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길을 걷다가 세 명의 벽돌공이 일하는 현장을 지나갑니다. 그는 세 명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각자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 번째 벽돌공은 “벽돌을 쌓고 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생존을 위해 노동을 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두 번째 벽돌공은 “교회를 짓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 역할을 인식해서 ‘벽돌 쌓기’라는 직업적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벽돌공은 “하느님의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자기 일에 관한 목표와 가치를 갖고 이에 따른 실천을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 명의 벽돌공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태도와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것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따른 성과는 어떨까요? 어떤 태도와 관심에 따라 성과에 분명히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기가 하는 일이 의미 있고 큰 목표와 가치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하면, 자기 스스로 더 큰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단순히 생존을 위한 일로? 아니면 그저 자기 역할이라는 이름으로 직업적 행위를 해야 할까요? 아니면 의미를 부여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셔서 회당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이는 우리 삶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더 힘차게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고, 실제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좋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면서 그 의미를 퇴색하게 만들려는 사람도 가득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잔뜩 나서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몹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의미를 주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예수님과 함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지금 우리의 모든 일은 예수님을 통해 더 큰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 의미를 찾아야 우리가 되어야 분명 지금과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데 여전히 과거에 머물면서 생존만을 또 직업적인 선택만을 하려고 합니다. 주님 안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은 입맞춤과 같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어야만 한다(디어도어 루빈).
사진설명: 나자렛에서 강론하시는 예수님, 에기노 바이너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