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는 대전 C고등학교 출신 동창생 여럿이서 서대문구 안산(295.9m)에 올랐다.
안산(무악산)에 오르는 산길은 잘 정비되었고, 산책로에는 나무판재로 평평하게 만들어서 걷기에 아주 좋았다.
판재로 등산로 길을 조성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였을 것이다.
65살 이상은 지하전철료 무료로 독립문역에서 내려 5번출구로 나온 뒤 산책을 시작했다.
입산료도 없는 무료 산행.
남의 소유의 산에서 천천히 걸으면서 안산자락길을 천천히 즐겼다.
안산 황토길에서 맨발로 황토를 밟으며 걷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안산자락길에는 심은 지 오래된 고목 아카시나무가 무척이나 많았고, 산길 바로 위 빈 터에는 종경화로 심은 꽃무릇이 많았다.
붉은 꽃잎은 이미 다 져서 없고, 길게 내뻗은 줄기(대)가 곳곳에 많았다.
서해안 산골 아래에 있는 내 텃밭 안에도 꽃무릇이 조금은 있다.
산행이 끝난 뒤 영천시장 거리에 있는 '석교식당'으로 들어섰다.
순대국밥집이다.
돼지곱창, 비게살 등을 삶아서 투백이 그릇에 내놓은 국밥을 맛있게 먹었다.
정말로 오랜 만에 먹는 서민 음식이다.
서울 용산구 삼각지역 인근에도 국밥집이 있었다.
나는 이 지역에서 30년 넘게 근무했기에 퇴근 뒤 허름한 국밥집에 들락거렸던 기억도 떠올랐다.
정년퇴직한 지도 만16년이 더 된 지금껏 순대국밥을 먹은 기억은 거의 없다. 퇴직하지마자 그참 충남 보령지방에 있는 산골 고향집으로 내려가서 그때까지 혼자서 살던 어머니, 아흔 살 가까워지는 어머니와 둘이 수십년 만에 만나서 둘이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서민 음식인 순대국을 먹을 기회가 없었다.
어제 고교동창생과 함께 서대문구 영천시장 내 '석교식당'에서 한 그릇 10,000원짜리 밥을 먹과 한 병에 4,000원 하는 막걸리 여러 병을 사서 뿌이연한 술을 함께 나눠 마신 기억이 오래 남을 게다. 술 잘 못하는 나도 막걸리잔을 부딪치며 마셨다.
'석교식당'은 별로 크지도 않는데도 국밥집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독립문역 인근에는 '독립문'이 있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은 서재필이 독립문을 세웠던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역 이름이다.
인근 옛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독립공원이 있다.
* 오래 전에 독립문 형무소에 견학갔던 시절도 잠깐 떠올렸다.
- 유관순 열사가 1919년 4월 1일 천안 병천면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가 체포되어 위 서대문형무소에 영치되었고, 숱한 고문 특히나 치욕적인 고문을 받다가 살해되었다.
시신은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가 훗날 이 지역이 개발되면서 유관순 시신은 자연스럽게 멸실되었다. 유관순 열사의 묘소는 없다. 있다면 허묘/가짜이다.
오늘은 2024. 10. 5. 토요일.
하늘이 맑다.
어제 피곤이 채 가시지 않는다.
2.
인터넷으로 과거 이씨조선조의 의상(한복)을 검색한다.
* 2020년대인 한복과는 전혀 다른 의상이다.
청해 이씨 집안의 노비가족(일제강점기). 조선은 부모 중 한명이라도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제’를 유지했다.
‘일천측천제’는 노비증가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 [국립중앙박물관]
1904년에 촬영한 사진.
오늘은 2024년 10월.
불과 120년 전의 시대상과 120년 뒤인 2024년의 시대상을 비교하면 '천지가 개벽한 것처럼 많이도 변했다'라고 나는 말한다.
1949년 1월생인 내가 기억하는 1950년대, 1960년대의 시대상과 2020년대인 지금 세상과 비교를 하면 '2020년대인 지금은 정말로 사람살기 좋아졌다'라고 거듭 말한다.
나보다 1세대 이전에 앞선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
왕족, 양반한테는 엄청나게 신이 나는 세상이었을 것이고
백성인 서민(노비 등)은 정말로 살기 힘든 세상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노비들은.....
여성의 한복은 2000년대인 지금의 한복과는 큰 차이.
위 사진에서 여성의 한복 저고리의 길이는 아주 짧고, 젖통을 그대로 내놨다.
내가 기억하는 1950년대 충남 보령군 웅천면 산골 마을에서도 부녀자의 한복은 젖통을 훤히 내놓았다.
베옷, 광목으로 만든 한복....
1) 1663년(현종 4) 작성된 <강희이년 계묘 식년 북부장호적(이하 북부장호적·北部帳戶籍·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을 통해 17세기 서울 백성의 개략적인 신분구조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북부장호적>에는 한성부 서부(마포·영등포) 총 16계(契·마을), 681가구의 거주지, 나이, 직역 및 신분, 가족구성원 등이 기재돼 있다.
신분별 가구의 점유율은 양반층 16.6%(113호), 중인층 0.6%(4호), 상민층 29.5%(201호), 노비층 53.3%(363호)이다.
15세기 말 자료인 <이애 남매 화회문기>와 큰 차이가 없다.
2) 이에 반해 <단성현 호적대장(단성향교 소장)>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인 1678년(숙종 4) 경상도 단성현(산청)의 신분별 비율은 양반층 6.2%, 중인층 0.6%, 상민층 60.3%, 노비층 32.9%다.
3) <대구부 호적대장(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에 의하면, 1690년(숙종 16) 대구부의 신분별 비율도 양반 9.2%, 상민 53.7%, 노비 37.1%였다.
ㅋㅋㅋ. 거짓 짝퉁이다.
1800년대 구한말에 가짜 족보를 만들고, 당시에도 성씨가 없고 이름만 있었던 천민들은
가짜 성씨를 만들었고, 가짜 족보를 만들어서 양반족보에 끼어들어서.... 신분세탁을 했다.
때문에 2020년대인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의 조상들은 다들 양반 후손이겠지.....
나중에 보탠다.
위 사진은 인터넷으로 검색.
용서해 주실 게다.
1.
'한국 국보문학' 문학지 2024년 11월호에 나도 참가했으면 싶다.
내 글 하나를 골라서 위 '국보문학' 협회에 전송해야 되는데도 나는 자꾸만 게으름만 피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