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절초
♧ 청추수제(淸秋數題)는
'청추수제'는 중학교 시절 1학년 2학기 국어 책에 나왔던 글로, 어른이 된 후에도 가을이면 몇 번씩 읊조리게 되는 글이다.
국어를 사랑하며 연구하고 시와 수필에도 일가를 이룬 분의 글이어서 그런지 글이 매끄럽고 이미지가 톡톡 튀는 듯하다.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
선생님은 시집으로 '박꽃', '심장의 파편', 수필집으로 '벙어리 냉가슴', '소경의 잠꼬대'를 낼 정도로 작품 활동도 꽤 활발했던 분이다.
'청추수제(淸秋數題)'는 그 이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을을 대표하는 몇 가지 소재를 선택하여 각각의 느낌을
피력한 글인데, 벌레와 달, 이슬, 창공, 독서에 대하여 평소에 가졌던 짤막한 느낌을 늘어놓고 있다. 그러면서 가을은 독서하기에 좋은 계절임을
밝히는데, 5가지의 소재를 글감으로 삼고 있으나, 특히 독서에 비중을 두고 있는 수필이다.
* 제주 특산 한라부추
♧
벌레
낮에는 아직도 90 몇 도의 더위가,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의 숨을 턱턱 막는다. 그런데, 어느 틈엔지 제일선에 나선 가을의 전령사가 전등빛을 따라와서, 그 서늘한 목소리로 노염에 지친 심신을 식혀 주고 있다. 그들은 여치요, 베짱이요, 그리고 귀뚜라미 들이다.
물론, 이 전령사들이 전초역을 맡아 가지고 훨씬 먼저 온 것으로 매미, 쓰르라미가 있지마는 그들은 소란한 대낮에, 우거진 녹음 속에서 폭양에 항거하면서 부르는 외침이라, 듣는 사람에게 '가을이다'하는 기분을 부어 주기에는 아직 부족한 무엇이 있었다. 그렇더니, 이 저녁에 들리는, 정밀 속에 전진하여 오는 소리야말로, '인젠 확실한 가을이로구나!' 하는 영추송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오게 한다.
* 흰색의 한라부추
♧ 달
전등을 끄고 자리에 누우니 영창이 유난히 환하다. 가느다란 벌레 소리들이 창 밖에 가득 차 흐른다.
'아!' 하는 사이에, 나는 내 그림자의 발목을 디디고, 퇴 아래 마당 가운데 섰다. 쳐다보아도쳐다보아도 눈도 부시지 않은 수정덩이가, 도시의 무수한 전등과 네온사인에 나 보아란 듯이 달려 있다.
저 달이 생긴 뒤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를 어루만지고 주무르고 꼬집고 하였을까? 원망인들 오죽 쌓였을라고. 그의 얼굴은 따뜻한 듯 서늘한 듯, 쌀쌀하면서도 다정도 하다.
성결한, 숭고한, 존엄한 그의 위력에 나는 다시 내 자리로 쫓겨 들어왔다.
* 구름송이풀
♧ 이슬
이슬은 가을 예술의 주옥편이다. 하기야 여름엔들 이슬이 없으랴? 그러나 청랑(晴朗) 그대로의 이슬은, 청랑 그대로의 가을이라야 더욱 청랑하다.
삽상한 가을 아침에 풀잎마다 꿰어진 이슬방울들의 영롱도 표현할 말이 막히거니와, 달빛에 젖고 벌레 노래에 엮어진, 그 청신한 진주 떨기야말로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할 뿐이다.
* 좀처럼 보기 힘든 흰가시엉겅퀴
♧ 창공
옥에도 티가 있다는데, 가을 하늘에는 얼 하나 없구나! 뉘 솜씨로 물들인 깁일러냐? 남이랄까, 코발트랄까, 푸는 물이 뚝뚝 듣는 듯하구나!
내 언제부터 호수를 사랑하고, 바다를 그리워하고, 대양을 동경하였던가? 내 심장은 저 창공에 조그마한 조각배가 되어, 한없는 항해를 계속하여 마지않는, 알뜰한 향연을 이 철마다 누리곤 한다.
* 곰취꽃
♧ 독서
'서중 자유 천종록(書中自有千鍾祿)'*이란, 실리주의에 밝은 중국 사람에게 있을 법한 설법이렷다. 그러나, '속대 발광 욕대규(束帶發狂欲大叫)'**한 형용이 한 푼의 에누리도 없는 삼복 더위에, 만종록(萬鍾祿)이 당장 무릎 위에 떨어진다기로서니, 독서 삼매에 들어갈 그런 목석연한 사람이 있을라고. 지나친 자아류의 변설인지는 모르나, 그러기에 나는 60일 휴가 동안 제법 독서 줄이나 하였다고 장담할 뱃심을 가지지 못하였다.
먼 산이 불려나온 듯이 다가서더니, 아침저녁으로 제법 산들산들한 맛이 베적삼 소매 속으로 기어든다. 벌레가, 달이, 이슬이, 창공이 유난스럽게 바빠할 때, 이 무딘 마음에도 먼지 앉은 책상 사이로 기어가는 부지런히 부풀어오름을 금할 수 없다.
* 서중자유천종록(書中自有千鍾祿) - 학문을 많이 연구하면 큰 재물이
생긴다는 말.
** 속대발광욕대규(束帶發狂欲大叫) - 찌는 듯한 더위에 관을 쓰고 띠를 매니까(정장 차림을 하니까) 그 괴로움에 발광이
나서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다.
* 물매화
♬ 나는 홀로 있어도 / 유심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