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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장 숙명의 만남
푸른 물.
흰 바위…
그리고 천지(天池)를 휘감은 안개.
천지의 고요함과 백두의 웅자는 수천수만년을 두고 여전하고도 오연(傲然
)하다.
사람이 어떻게 되고, 민족이 어떻게 되더라도 백두는 그저 그렇게 위대하
게 버티고만 있다.
나라가 어떻게 되어도, 세상이 어떻게 되더라도 실제로는 별 다른 의미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 백두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냥꾼들이나 나무꾼들도 그러
한 부류에 속한다.
쿠콰아아…
저 멀리서 장백의 물줄기가 요란하게 들린다.
장구(張九)는 퉤! 손에다 침을 뱉았다.
긴장으로 인해서 손에 땀이 척척했다. 그 손을 쓱쓱, 허리춤에다 문지르고
나서 활을 잡기 위해서 다시 손에다 침을 뱉은 것이다.
이미 이틀을 쫓아온 놈이었다.
한번 본 적도 있었다.
덩치가 산(山)만한 놈.
아마도 그가 날린 화살도 하나쯤 몸에다 박고 있을 터이다. 놈이 남긴 발
자국 옆에 뿌려진 핏자국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장구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서 앉아 놈이 남긴 발자국을 만져보았다.
정말 컸다. 수백관은 나갈 놈이다. 그간 수많은 사냥꾼들이 노렸지만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교활하고도 흉포한 곰.
『내가 잡겠다. 잡고야 말겠어』
장구는 중얼거리며 눈을 들었다.
발자국은 숲으로 향해 있었다.
놈만 잡으면 누구도 자신을 백두제일의 사냥꾼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면 누구도 자신을 무시하지 않을 터이다.
그리고 한동안 편히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놈은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막 숲으로 한걸음 옮겨놓던 장구의 안색이 돌변했다. 숲을 헤치며 들어서
는 그 앞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는 거대한 물체.
맙소사!
그것이야 말로 바로 그가 뒤쫓던 그 거대한 곰이었다. 그것도 벌떡 일어선
채로 그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장구는 급히 뒤로 물러나면서 활을 겨누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곰이 호랑이도 때려죽인다는 그 앞발로 사정없이 후려패자, 화살은 퉁겨져
나가고 활도 허무하게 꺾어지고 말았다.
하얗게 질린 장구는 급하게 옆으로 물러났다.
등을 보이고 도주하는 것은 자살행위임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막 손도끼를 꺼내는 순간에 곰은 이미 그의 눈앞에 다가왔고
경악과 공포의 빛이 장구의 눈에 떠오르는 순간에 곰의 앞발이 그를 후려쳤
다.
캬악!
괴성, 비명과 함께 장구는 눈앞에 별이 번쩍임을 봄과 동시에 땅거죽이 세
차게 자신을 향해 튀어올라옴을 느낄 수 있었다.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정신을 놓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너무도 잘 아는 그다.
곰의 일격을 맞고 땅바닥에 쓰러진 그는 몸을 뒹굴어 일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얼굴에는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바위가 그를 가로막았던 것이다.
크아악!
곰이 그의 앞에서 흉포한 기세로 섬칫한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공포스럽게
고함치고 있었다.
『죽었구나!』
장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곰이 자신의 앞에서 그 거대한 앞발로 그를 내려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
다. 이처럼 흉포한 것을 볼 때 이미 그를 뼈에 사무치게 증오하고 있음을 직
감할 수 있었다.
그가 곰을 사냥함이 아니라, 곰이 그를 사냥하고 있었다. 그런데 괴이하다
.
한참을 기다려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참을 수 없어진 장구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믿지 못할 광경을
보아야 했다.
한 사람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백의인 듯도 하지만 허름하게 낡아
서 과연 원래 어떤 옷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그 옷을 걸치고서 조용
히 장구의 앞에 서있다. 그것도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장구를 내려치던
곰의 그 앞발을 한손을 들어 막고 서 있는 것이다. 그에게 등을 보인 채. 뿐
만 아니라, 장구가 막 눈을 떴을 때에는 믿을 수 없게도 그 거대한 곰이 그
손짓에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곰이 사람의 힘에 밀려나다니….
힘이라면 아직 누구에게도 밀려본 적이 없는 장구도 그런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 장구의 체구는 팔척이나 되지만 힘으로 곰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다른 놈도 아닌 저 거대한 곰은….
크워어!
밀려났던 곰은 어이가 없는 듯 멀뚱, 장구와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고 나선
불청객을 쏘아보더니 돌연 고함치면서 무섭게 달려들었다.
회오리 바람이 일 정도의 기세였다.
『사납구나』
나직한 꾸짖음이 그 사나이에게서 흘러나왔다.
동시에 사나이는 손을 뻗어 옆에 있던 키 작은 자작나무에서 가지를 하나
꺾었다.
그리고 슬쩍 몸을 틀면서 그것으로 달려드는 그 집채만한 곰의 어깨를 툭
, 쳤다.
장구는 너무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길을 막고 있던 그 사람이 피하는 바람에 거의 자신의 눈앞으로 달려든 그
거대한 체구의 곰이 그 사나이가 슬쩍 때린 것 같은 나뭇가지의 일격을 맞고
붕 떠서 나가떨어지는 것을.
쿠당…
긴 울림.
타격이 심한 것인지 곰은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사나이는 꺾어
들었던 나뭇가지를 간단히 버리고는 그 쓰러져 걸걸거리는 곰의 곁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웅담이라도 취하려는겐가?」
장구는 입맛을 다셨다.
자신이 노린 것이지만, 상대가 아예 차원이 다른 바에야… 더구나 그가 자
신의 생명을 구했으니 뭐라고 할 염치도 없었다.
그런데…
『많이 다친 것 같지는 않구나. 이 정도의 상처라면 온천에 가서 씻고 며
칠 정양하면 나을 것이다. 가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거라』
그 사나이는 장구가 쏜 화살, 지금은 곰의 왼쪽 다리에 박혀있던 화살을
간단하게 뽑아낸 다음에 곰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워어…
더 놀라운 것은 그처럼 흉포하던 곰이 풀죽은 소리를 흘리며 눈을 꿈벅이
더니 절름거리면서 그 자리를 떠난 것이다.
그리고 사내는 장구를 돌아보았다.
『괜찮소?』
의외로 맑은 음성이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과 텁수룩한 수염과는 달리,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듯 얼굴 가운데 자리한 눈은 맑고도 침착했다.
『괘, 괜찮습니다』
장구가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곰에게 얻어맞았으니 웬만한 사람이라면 엎어져 허우적거렸겠지만 장사라
는 칭호를 듣는 장구인지라 몸은 일으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움직이자 어
깨와 등쪽으로 찢어지는 통증이 엄습한다.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옷이 마
치 걸레처럼 너덜거렸다.
『뼈는 상하지 않은 것 같군』
사내가 그의 상처를 슬쩍 보곤 말했다.
『집이 어디요?』
『사, 산 아래의 수자촌에…』
『고려인이오?』
사내의 물음에 장구는 눈을 꿈벅였다.
『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조선사람이지요. 뭐 우리네야 고려인이건 조선
인이건 별 상관이야 없지만…』
장구가 머리를 긁적였다.
『상관이 없소?』
문득 사내가 물었다.
『그, 그럼요. 어차피 나라 이름이 바뀐다고 백성이 바뀌는 거야 아니잖습
니까? 이런 산골이야 더더욱 그렇지요…』
사내는 구름이 흐르는 산자락을 내려다본다.
무심히 흐르는 구름 한 조각.
산정의 바람에 휘몰려 그 구름은 이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리고는 제멋
대로 흩어진 구름은 묘한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어머님…』
문득 사내의 입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흐른다.
형용키 어려운 감회가 서린 중얼거림.
『그렇군요. 여기가 우리의 땅이로군요. 이 나라, 이 백성… 나라는 갔어
도 사람은 그대로 있군요. 변한 것은 나라의 이름뿐…』
사내는 덩치는 크되, 순박했던 그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사내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것
은 전과 다름없는 자연뿐.
* * *
신라는 당의 힘을 끌여들여서 백제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북방을 장악하고
있던 고구려마저 외세의 힘을 빌려 멸하고, 그 영토 모두를 당에 바치고는
반도 구석에 틀어박혀서 나는 삼국을 통일했노라고 자존자대(自尊自大)하여
희희낙락 술잔을 기울였다.
심복대환이었던 고구려를 멸한 당은 신라 따위는 아예 관심에 없었다.
말을 하기도 전에 쓸개를 내놓고 간을 빼드릴까? 하는 존재는 언제라도 쓸
어버릴 수 있는 법이다. 군을 키우지 않아도 망할 염려가 없다… 스스로 강하
지 않아도 보호할 존재가 있다. 그런 믿음은 필연코 나태를 가져온다. 그렇게
해서 후삼국의 성립은 필연이었고, 그 승리자는 고구려를 잇겠다는 일념으로
고려라는 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그의 힘으로는 거대한 중원을 넘볼 수 없었다. 후손에게 맡길 수밖
에.
그러나 한번 물러난 땅을 다시 수복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발해의 몰락 이후 무주공산(無主空山)으로 남았던
그 넓은 땅은 다시금 주인을 손짓했지만 위화도 회군으로 인하여 마지막 기
회마저 무산된다.
그리고 고려라는 이름 대신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의 나라가 들어섰다.
--海東 六龍이 일아샤 일마다 天福이시니 古聖이 同符하시니…
후일 세종이 만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첫구절이다. 육룡이 이성계의
선조를 의미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거기에서 나타나듯이 이성계는 함경
도 영흥, 북방 사람이다.
북방 사람들은 신라시대 이래로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강대한 지난
날의 고구려의 그늘 때문이다.
그 우려가 사실로 나타난 것은 말 잘달리고 활 잘쏘던 이성계가 고려를 무
너뜨린 것이고, 문약한 남방사람보다 강건한 북방사람들의 기질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성계는 즉위한 다음, 은연중에 스스로의 고향인 북방을 경계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해서 이조 오백년은 북방인들에게는 어둠의 세월일 수밖에 없었다
.
새들이 운다. 농부들이 밭을 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북방에는 너른 평야가 없다. 함경도라면 더더욱 그렇다. 표고(標高) 자체
가 높아서 밭이 많을 수밖에 없는 지형인 까닭이다.
척박한 땅.
농부 하나는 이제 겨우 열서넛쯤 된 사내아이와 함께 밭을 넓히기 위해서
옆의 산마루를 깎고 있었다. 조금씩 파들어가서 계단식의 밭을 만드는 것인
데, 갑자기 암석층을 만나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이런 망할 놈이 있나? 우째 이런 놈이 여기 박혀 있단 말여?』
농부가 투덜거리면서 곡괭이질을 했다.
하지만 바위가 단단한 데다 너무 컸다.
『망할… 이걸 못치우면 그새 일한 게 완전히 헛지랄이네. 퉤퉤! 그럴 수
야 없지!』
농부가 다시 곡괭이로 바위 옆을 팠다.
쨍!
금속성과 함께 곡괭이가 바위를 치며 퉁겨져 나갔다. 부러진 것이다.
『야아, 이거 동냥을 못줄망정 쪽박은 깨지 말랬다고 이눔의 바위가, 으갸
갸가아~!』
열받아서 바위를 들고 찬 농부가 죽는 시늉을 하면서 발을 움켜쥐고 깡총
거렸다.
아무리 열을 받아도 사람의 발이 바위보다 강할 수야 없다는 걸 증명해보
일 참이었던 모양인가. 어이없는 듯 아비의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꼬마가 이번
에는 제가 해보겠다는 듯이 바위에 달려들어 그 바위를 밀어댔다.
그런데 보라.
꿈틀꿈틀… 그 바위가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그 거대한 바위가
뿌리째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이제보니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박혀있는 바위
가 더 컸다.
『저, 저…?』
웃긴다고 피실피실 웃고 있던 아버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 않는다. 아니, 저 놈이 언제 저렇게 힘이 셌지?
『으랏차차아아!』
바위가 뿌리까지 빠져나오자 신이난 꼬마는 커다랗게 고함치면서 그 바위
를 밀어젖혔다.
쿠당탕… 바위가 비명을 지르며 뿌리째 뽑혀 아래로 굴러떨어져 내린다.
흙먼지가 구름처럼 일었다. 바위는 아이의 키보다 더 컸다.
『헤헤…』
한참 용을 쓴 꼬마는 자랑스러운 웃음을 머금고서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
아버지를 돌아보면서 입에까지 내려온 콧물을 훌쩍 들이마셨다.
『이젠 됐죠?』
그리고는 아주 태연하게 손을 탈탈 털던 꼬마는 아버지의 기색이 이상한
것을 보고는 부지중에 뒤를 돌아보았다. 바위가 뽑혀져 나간 곳.
방금까지 꼬마가 용을 쓰던 그 곳에 한사람이 미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서
있었다.
허름한 옷에 여우의 가죽으로 된 것을 걸쳐 사냥꾼처럼 보이는 텁석부리
대한이 그 꼬마의 뒤에 있었다.
『아저씨… 누구야요?』
겨우 눈만 남고 얼굴이 온통 수염으로 덮인 대한은 씨익, 웃으면서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꼬마는 기분이 나빠졌다.
공연히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햇살이 이글거린다.
그 햇살 아래, 나무 그늘에 꼬마와 아버지, 그리고 그 텁석부리 대한이 둘
러앉아 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힘을 가지신 것인지…』
농부가 감자를 권하면서 혀를 내두른다. 옆의 꼬마는 입이 퉁퉁 부었다.
자기가 힘써 뽑아낸 것으로 알았던 바위가 저 텁석부리가 뒤에서 밀어낸 것을
안 다음부터다.
아니라고 우기고 싶었지만 저 괴물 텁석부리는 그 다음에도 몇 개의 바위
를 간단히 뽑아내고 밭을 골라 그들 부자가 지난 열흘 동안 일한 거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한순간에 해치웠던 것이다.
『왜 소나 말을 쓰지 않습니까?』
감자 하나를 받아든 대한이 물었다. 쓴 웃음이 농부의 햇볕에 찌든 얼굴에
떠오른다.
『우리네 같은 소작이 무슨 소입니까? 말은 더더구나 어림도 없지요. 새끼
나 많으면 좀 나을건데, 달랑 이거 하나니…』
말을 하면서 농부는 옆의 아들 머리를 쥐어박는다.
『아얏! 왜 때려요?』
꼬마의 입이 더 튀어나왔다.
『살기가 많이 힘듭니까?』
텁석부리 대한이 물었다.
처음 볼 때는 나이가 많은 것 같더니 햇살 아래 드러난 얼굴은 그렇지 않
았다.
특히나 맑은 눈은 인상적이라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전보다는 낫지요』
『전보다는 낫다?』
『그럼요, 전에… 고려시절에는 뻑하면 벼슬아치들이 와서 이리 핑계 저리
핑계 하면서 있는 거 없는 거 다 빼앗아갔지요, 그나마 있던 논밭뙈기들은
무슨 사전(寺田) 어쩌고 하면서 절에서 다 걷어가서 우리네들은 정말 죽을 맛
이었었죠. 그래도 지금은 우리들에게도 밭을 좀 주고 이렇게 일궈먹을 수도
있거든요…』
그 말을 듣는 대한의 눈빛이 암울해졌다.
백성은 잣대다.
고려는 일이백년의 왕조가 아니었다.
불과 몇십년 전까지 수백년을 내려온 전통있는 왕조였다. 그런데 그런 왕
조가 무너진 다음에 그 왕조를 그리워하는 백성이 없다는 것인가.
얼마의 세월이 흘렀다고….
삼십대 후반의 농부는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그로서는 지난 왕조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가 어렸을 때
, 이미 고려는 망한 다음이었을 테니까.
대한은 농부가 내민 감자를 묵묵히 씹으며 생각한다. 결국 그날 일을 마친
그는 농부를 따라 마을로 갔다.
마을이라고 해봐야 가구수가 겨우 열두엇.
초가로 얽어놓고 흙벽을 발라 만든 중국과는 다른 모습. 내부는 불이 든다
. 침대 대신 그렇게 불이 들게 하고는 잠을 자는 것이 중국과 달랐다.
밤이 되기 전에는 싸리로 얽은 담이 있는 마당에서 이야기들을 하는 모습
이 정겹다.
그렇게 해서 그가 만난 사람은 그 마을의 어른이다. 나이 일흔. 이런 빈촌
에서 그런 나이를 가진 사람이라면 정말 장수한 것이리라. 나무토막과 같은
손으로 손자인듯한 아이를 토닥거려 재우고 있는 그 노인은 이 마을의 실질적
인 지주(支柱)와 같다.
이 하나도 남지 않은 입으로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노인의 얼굴은 주름살
투성이. 어스름한 저녁빛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세월의 힘든 여정이 너무도
뚜렷하다.
『흐흐… 그래도 전보다는 낫지. 고려 때라면 지금쯤 난 산속에 버려져서
늑대밥이 되었을 거야. 뼈도 못찾았겠지』
그 말이 고려장을 의미함을 알 수 있었다.
살기 힘들어 노인들을 산속에다 갖다 버리던 악습(惡習).
『중들이 땅을 다 차지하고 땅 붙여먹는 우리들을 개돼지 취급을 하면서
계집을 끼고 놀았으니… 흘흘… 망하지 않고서야 배길 수가 없었지』
노인은 지난날을 회상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대한의 얼굴에 그늘이 어둠보다 더 짙게 서린다. 바람이 서늘하게 얼굴을
훑는다.
아무렇게나 묶어 늘어진 머리카락이 그 바람에 너울거리며 얼굴로 흩어진
다. 수염을 깎지 않은 지도 오래. 이미 텁석부리 대한이 된지 얼마인지 모른
다. 아무래도 좋았다.
깨달음을 얻으면서 생각도 달라졌다.
하지만, 하지만… 아직 풀지 못한 염원이 하나 있었다.
찾아봐야만 할 사람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백두산을 내려와 지난날 고려의 땅이었던 이 땅을 밟았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 서넛이 몰려서 나뭇가지를 휘두르면서 싸우고 있었다. 싸움이 아니
라 전쟁놀이.
희미한 웃음이 대한의 얼굴에 떠올랐다.
저 아이들이야 말로 이 땅의 미래일 것이다.
저 아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나게 해줄 것인가가 바로 그 미래를 결정
할 것이었다. 그는 이제부터 그 미래를 결정하고자 했다.
-네가 무엇을 해야 할는지는 네 스스로 알게 되리라. 대한 수호신문의 정
통은 그렇게 이어질 것임을….
돌아가신 사조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는 수천년을 이어온 그 신비로운 문파를 이어 받고도 아직은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다. 마무리짓지 못한 일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까닭이다.
그렇게 하나하나 사람들을 만나고 정리를 하는 가운데 그는 함흥이란 곳을
향해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다.
말을 달린다.
아직은 늙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모든 것을 접어두고 이곳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어야 한
다는 것인가.
스윗!
세찬 파공음이 일며 화살이 난다.
앞에서 달리던 노루 한마리가 말 그대로 살을 맞은 듯 훌쩍 뛰어올랐다가
거꾸러졌다.
『과연 신궁(神弓)이십니다!』
찬사가 일었다.
나이 칠순을 바라본다.
당시라면 고희(古稀)이며, 보통 사람이라면 자리보전하고 누워 있을 나이
다.
하지만 이성계는 태상왕(太上王)이 된 다음에도 여전히 전과 다름없는 용
력(勇力)을 발휘했고 사냥에 나가서도 젊은이를 능가하는 힘을 보였다.
더구나 금상(今上)인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서 동북면 함흥으로 건
너온 그는 문을 닫아걸고는 병을 기르는 판이었다. 방원이 골육참살한 것을
뼈에 사무치게 미워하는 그는 어떻게 하건 방원을 때려죽여서라도 그를 왕위
에서 내쫓기 위해서 골몰하고 있었다.
그를 위해서 사냥을 하고, 말을 달린다.
단련을 늦추면 몸이라는 것이 금세 무너짐을 잘 아는 그인 까닭이다. 그러
나 오늘의 그는 정말 답답했다. 이지란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다음이었던
것이다.
이지란은 여진인으로서 청해군(靑海郡)에 봉해진 건국공신이다. 쿠란투란
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 원래의 그 이름은 그가 귀화하면서 이성계의 이씨
성을 따르면서 버렸다. 말 그대로 이성계의 수족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죽었다.
더구나, 그가 마지막에 그에게 보낸 편지는 그의 가슴을 치고도 남음이 있
다.
-신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혼백으로서 전하의 주위에 머물러
있을 것이오이다. 마지막으로 탄원을 드리니, 부자간의 정을 버리지 마소서
…
임금 부자분께서 화합하지 못한다면 그 본을 신하들이 받을 것이니, 신하
들이 수신제가(修身齊家)하지 못한다면 백성들은 또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디
이 늙은 신하의 마지막 소원을…
둥! 두둥둥…
북소리 고함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몰이꾼으로 나선 군사들이 앞에서 달렸
다. 그 소리에 놀라 다시 노루 한 마리가 숲속에서 튀어나왔다.
착잡한 감회에 사로잡혔던 이성계는 반사적으로 활을 겨누었다.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활은 아직도 강궁(强弓)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튀어나온 노루가 도망가
는 것이 아니라 쓰러진 노루에게로 달려가 그 몸에다 머리를 비비고 있음을
본 까닭이다. 작은 몸집으로 보건대 새끼임이 분명하다.
눈을 감지 못한 채 새끼를 보는 어미의 그 눈에는 분명히 생명의 빛은 없
다. 하지만 그 눈속에서 자식을 보는 어미의 따스함이 느껴짐은 왜인가.
스윗!
세찬 파공음, 이성계는 겁에 질린 노루새끼를 겨누고 있던 활을 놓았다.
일발필중(一發必中)!
발사되면 반드시 과녁을 뚫는다는 그의 활은 무방비 상태로 어미를 핥고
있는 새끼노루를 맞추지 못했다.
『으음…』
이성계는 활을 늘어뜨렸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편찮으십니까?」
곁에 있던 신하가 놀라 말고삐를 잡았다.
『괜찮다. 돌아가도록 하자』
이성계는 노루를 버려두고 말머리를 돌렸다.
호호탕탕, 기세좋게 달려나왔던 사냥놀이는 그렇게 끝이 났다. 저 멀리 그
모습이 사라질 무렵. 한 사람이 커다란 잣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는 기이한 빛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멀어져가는 이성계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
다.
그 손에 들린 것은 방금 전 이성계가 쏘았던 그 화살, 백우전(白羽箭)이다
. 그는 날아오는 화살을 맨손으로 잡아 챈 것이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텁
수룩한 구레나룻. 바로 백두산에서 이곳으로 당도한 그였다.
왕승고.
배움을 끝내고 백두산을 떠난 그는 마침내 그를 보았다.
원수.
비명에 가신 어머님이 그렇게 잊지 못하던 원수 이성계를 눈앞에서 목도한
것이다. 그에게는 힘이 있었다. 설사, 백만대군이 앞을 막아선다 할지라도
이성계의 목을 지켜주지는 못할 터이다.
푸른 하늘.
흰구름이 유유히 흘러간다.
왕승고는 그 구름의 흐름을 보면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싸아한 풀[草]기가 서린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우며 격동된 마음을 조금쯤 가라앉히는 것 같다. 그를 보는
순간, 백두산에서 이룬 모든 것들이 흩어지는 듯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없었을 그 사람. 길에서 만났다면 정말 관심도 없이
스쳐보냈을 그 사람이 이성계임을 자각하는 순간, 알 수 없는 어떤 느낌으로
왕승고는 전신이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손발이 싸늘히 식어오는 느낌이랄까.
백두산에 오르기 전이라면, 그를 보는 순간 그 앞에 나타났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당당하게 내가 고려의 왕자이노라, 네가 시역(弑逆)한 고려의 왕, 우왕의 아들이
너를
찾아왔노라고 외치면서 그에게 다가갔을 터이다.
그를 가로막는 자들은 아무런 장해가 되지 못한다. 그들로서는 결코 그를 막을 수
없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바라본 그의 눈에 비친 이성계는 이미
노인이었다.
다른 노인에 비해서 강건하다고는 하지만 그가 노인임은 부인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의 발길을 가로막은 것은 마지막에 노루새끼를 죽이지 못한 그 눈빛
때문이었다.
흔들리는 그 눈은 이미 지존의 것이 아니었다.
……
이미 이성계 일행은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국국…
낮은 신음이 들린다.
시선을 돌리니, 쓰러진 노루의 곁에서 새끼노루가 어미노루를 머리로 밀고
있었다.
일어나라고 보채는 것 같았다.
이성계는 노획물을 가져가지 않았다.
왕승고는 천천히 그 노루에게 다가갔다.
새끼노루는 겁먹은 눈빛으로 왕승고를 보았다. 왕승고는 고요한 눈빛으로
새끼노루를 보면서 손을 내밀어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머리를 맡겼던 새끼노루는 조금 지나자 안심이 되는 듯 왕승고의
얼굴을
핥았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던 왕승고는 어미노루가 이미 즉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백우전이 정확하게 목줄기를 꿰뚫고 있었다. 역시 신궁이라는 그의 이름은 헛된
것이
아닌 듯했다.
『네가 불쌍하게 되었구나…』
왕승고는 나직이 탄식했다.
주위가 붉어졌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장대한 구름이 하늘 전체를 덮고, 그 구름을 노을이 온통 붉게 물들였다.
새들이 집을 찾아 날고 있었다.
국국…
새끼노루가 길게 울었다.
* * *
『뭐라고 했느냐?』
이성계는 노안을 부릅떴다.
밝게 밝혀진 촛불이 흔들리며 방안을 흔든다.
『박순이 죽었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강을 건너지 않고 있어서…』
『으흐음』
신음이 절로 이성계의 입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함흥차사(咸興差使).
이성계가 다시 돌아오도록 태종 이방원이 사신을 보내면 이성계는 활을 쏴서
죽였다.
그러니 아무도 돌아오지 못해서 함흥차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와중에 박순은 자신이 함흥차사라는 신분을 숨기고 이성계를 찾아와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하고는 느긋하게 돌아가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내심 다시 권력의 정상에 복귀하기를 바라고 있던 신하들의 격한 반대에
이성계는 마음을 바꾸고 신하들을 보내 박순을 잡아오도록 했다. 용흥강을
건넜으면
그냥두고 건너지 않았으면 그의 목을 베어 오라고 했던 것이다.
일이 성공하자 느긋해져서 주변 경치까지 감상하면서 길을 가던 박순은 미처
용흥강을 건너지 못했고, 태조 이성계의 의향과는 달리 그는 목베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박순은 그가 아끼던 신하였다. 그의 죽음은 그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고굉(股肱)과도 같았던 이지란의 죽음에 이번에는 그가 아끼던 박순이 자
신의 영에 의해서 죽어나가자 이성계는 내심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
무리 강하다 해도 그는 이미 칠순의 노인인 것이다.
『물러가거라』
『전하!』
『물러가라지 않느냐!』
이성계가 손을 저었다.
신하들은 물러갈 수밖에 없다.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누가 봐도 명백했다.
신하들을 물리친 이성계는 홀로 안석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주위가 쓸쓸
했다. 고독(孤獨)이 물밀 듯 밀려왔다. 허전했다.
숨 가쁘게 달려온 세월이었다. 말을 달리고 활을 쏘고, 앞을 가로막는 것
을 모조리 검을 휘둘러 베어버리며 지나온 세월.
무엇도 그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심지어는 나라조차도. 그렇게 오백 년
, 정확히 475년을 이어온 고려왕조도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그는 조선이
라는 새 시대를 열었다.
누구도 그의 일생이 성공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을 터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왕위를 놓고 아들들이 골육상잔, 그는 왕위마저 버리고 이곳 함흥에 와서
절치부심(切齒腐心). 자신의 아들을 죽이기 위해서 칼을 갈고 있었다. 대학
(大學)에서 일러 수신제가 이후에 치국평천하라고 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는 수신에 제가는 하지 못하고 치국평천하만 한 셈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실패라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아졌다.
『이젠 나도 늙었는가……』
이성계는 정말 입 밖으로 내놓고 싶지 않은 말을 흘린다. 귀밑머리가 희어
지는 것을 본 지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머리 전체가 파뿌리와
같다.
윤기나던 얼굴에서 윤택이 사라지고 손마디가 나무등걸과 같아졌다. 긴 한
숨이 촛불을 흔들었다. 이성계는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깜박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누군가가 그를 흔들어 깨운 것이다.
눈을 떴다.
그 눈에 들어온 것은 창백하게 눈을 부릅뜬 젊은이의 얼굴. 그냥이 아니었
다. 목만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자신의 목을 받쳐든 목 없는 시신이 그
를 흔들고 있었다.
『누, 누구냐?』
이성계가 놀라 소리쳤다.
힘을 다해 소리쳤지만 소리는 목에서 잠겨 제대로 튀어나가지 않는다. 마
치 꿈에서 아무리 소리쳐도 소리가 나지 않을 때처럼…….
『누구냐고? 벌써 내 얼굴을 잊어버렸단 말이냐? 네 이노옴! 이성계야!』
목만 남은 젊은이가 눈을 부릅뜨고서 고함쳤다.
분노에 못이겨 부들부들 떨리는 그 젊은이의 얼굴, 피칠을 한 얼굴을 확인
한 이성계는 전신을 학질에 걸린 듯 떨었다.
『우, 우왕 전하……』
『네 이놈! 네가 아직도 나를 전하라고 부르느냐? 네 놈의 눈에 내가 아직
도 전하더란 말이냐? 네 목을 붙여내라!』
젊은이, 우왕이 불쑥 고함치며 피칠로 얼룩진 자신의 머리를 이성계의 얼
굴에다 들이박았다.
『으, 으아악! 사, 살려주시오. 우왕전하… 제발… 내, 내가 잘못했소……
』
이성계가 발버둥쳤다.
『……』
왕승고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 본다.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잠들었던 그를 단칼에 베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이성계는 원수이기 이전에 이미 병들고 나약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저 소리는…….
「꿈에서 아버님을 본다는 건가……」
왕승고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기억에도 없는 이름. 아니, 그 얼굴.
우왕이란 그 이름은 가장 밀접하지만 몇년 전까지만 해도 그와는 상관이
없었던 이름이었다. 간승(姦僧) 신돈의 자식이라는 오욕의 구렁텅이에 빠진
그 이름 아버지….
그 아버지를 원수인 이성계가 꿈속에서 부르고 있었다. 과연 어떻게 생긴
분인지도 모르는 그분. 무인지경이었다.
그가 이성계의 침소까지 들어오는 것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없는
것이 아니라, 숙위(宿衛)하는 자들로서는 그를 발견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진
실이었다.
백두산에 올라 대한 수호신문을 이어받기 전의 그라도 그러했을 것인데,
하물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컥컥…』
공포에 질려 허우적거리던 이성계는 미친 듯 팔을 저어대다가 벌떡 일어났
다. 식은땀이 비오듯 한다. 전에 없던 일이다.
『꿈이었나… 이렇게 생생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놀란 가슴을 추스르던 그는 갑자기 숨이 멎는 충격
에 눈을 부릅떴다.
근래에 들어 그는 자면서도 불을 끄지 않았다. 그런데, 그 불빛에 한 사람
이 드러나 있다. 우뚝 선 그는 별빛처럼 빛나는 눈으로 조용히 이성계를 바라
보고 서 있었다.
『누, 누구…?!』
갑자기 다시 목이 메인다.
꿈에서와 같다.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를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선 왕승고를 확인한
순간에 그의 눈은 더욱 커졌다.
『너, 너는… 당신은…?』
억눌린 신음이 이성계의 파랗게 질린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부릅뜬
눈에는 악연(愕然)한 공포가 알알이 떠올라 있었다.
왕승고의 얼굴은 수염으로 덮였다.
구레나룻이 무성하긴 해도 그렇게 수염이 얼굴 전체를 덮는 형국은 아니라
서 눈과 코 등 그의 윤곽은 여전히 선연했고 촛불에 드러난 모습은 더욱 그러
했다.
『우, 우왕… 저언하아…』
억눌리다 못해서 짓눌린 신음이 이성계의 입술을 뚫었다. 주춤, 주춤 이성
계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엉덩이를 바닥에 붙인 채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내 벽이 그의 퇴로를 가로막았다. 왕승고의 눈에 묘한 빛이 드러났다.
자신을 보고 아버지를 연상한다는 것인가?
문득 그제서야 왕승고는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임을 상기한다. 그런 모양이
다. 자신이 아버지를 닮았던건가. 그래서 아버지의 옛날 모습만을 기억하는
이성계가 자신을 아버지로 착각한다는 것인가….
왕승고가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자, 이성계는 자신이 헛것을 본 것인가 의
심이 드는 모양인지 잠시 숨을 몰아쉬면서 눈을 껌벅거렸다.
하지만 왕승고의 모습은 여전히 그의 앞에 있다.
『나는 그 분의 아들이오』
그때, 왕승고가 입을 열었다.
『아, 아들?』
믿을 수 없는 듯이 이성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사이에 그처럼 흐트러졌던 모습은 많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마
도 그것이 그의 본 모습이리라. 꿈에서 허해졌던 심기가 깨어나자 마자 왕승
고를 보았음으로 인해서 평소의 그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것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평생을 전장(戰場)에서 말 달리며 새롭게 나라를 일군 위인
으로서는 너무 용렬한 모습이기에.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네가 설마… 우왕의 아들이라고 지금 주장하는
게냐?』
『그렇소』
『이런 고얀 놈… 네놈이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고려의 역적, 이성계의 앞이오』
왕승고가 차분히 말했다.
『이…!』
호통을 치려던 이성계는 입만 벌리고 갑자기 말을 삼켰다.
마침내 두 사람이 만났다.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닮았다. 어딘지 여린 듯하면서 또 강인한 면이
있던 그 얼굴. 난세가 아니라, 태평성대였다면 영민한 군주가 될 수도 있었
던 자질을 가졌던 우왕. 자신의 앞에 선 이 낭인과도 같은 차림의 젊은이는
분위기가, 모습이 그와 흡사했다. 우왕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에게서 느껴지
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평범해 보였지만 두어마디를 나누지 않아서 어떤 기
운이 사람을 압박해옴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을 강하게 누르는 것이 아니라
묘하게 넓고 큰 어떤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정말인가?』
이성계의 물음에 왕승고는 답하지 않았다. 굳이 진부를 그에게 답할 이유
가 어디 있으랴. 그것을 느꼈음인지 이성계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때였다
.
『전하, 전하…!』
밖에서 다급하지만 낮은 부르짖음이 들렸다.
『전하, 아무 일 없으십니까?』
뭔가 기척을 들었나보다.
『……』
왕승고는 말없이 이성계를 본다. 어디에서도 긴장의 빛은 찾아볼 수 없었
다.
『아무 일도 아니다. 물러가거라』
『예…』
목소리가 멀어졌다.
『왜 부르지 않았소?』
『부른다 한들,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자네의 기도는 다른 사람과는 달
라. 아마도 무술도 평범한 무술이 아닌 선도(仙道)를 닦은 사람인 것 같이 보
이니…』
『……』
왕승고는 묵묵히 그를 노려보았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은 천부신공의 요
체(要諦)다. 부동심(不動心).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마음을 가지는
, 가져야만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이 바로 천부신공. 왕승고는 이미 그 천부
신공을 거의 완성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를 보자 마음은 흔들린다.
『믿기지 않는군, 정말 그에게 후사가 있었다는겐가? 그런데 어떻게…』
이성계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간 아무런 움직
임도 없다가 이렇게 불쑥 앞에 나타났는가라는 물음일 터이다.
『당신을 죽이고 고려를 다시 세우겠소』
왕승고가 조용히 말했다. 흠칫, 했던 이성계는 문득 허허 웃었다.
『그런가?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하나? 나를 죽이는 것은… 그래, 그건 가
능하겠지. 어차피 그냥 두어도 얼마나 더 살겠나? 하지만 다시 고려를 세우는
일이 가능할 것 같은가?』
『당신이 조선을 세우는 것과 뭐가 다르겠소? 더구나 아직은 옛 고려를 그
리워하는 충신들이 남아 있을 것이며…』
『그 충신들』
이성계가 말을 잘랐다.
『그들은 수구(守舊) 세력일 뿐이네. 자신들의 부귀영화가 남에게 넘어가
는 것을 원치 않는 자들. 그들을 백성들이 따를 거라고 생각하나? 이미 고려
는 사라진 왕조네. 조선은… 기틀을 잡…』
『당신 아들들의 피로 말이오?』
일순, 이성계의 얼굴이 아픔으로 물들었다. 그는 길게 한숨 쉬었다.
『역사는 피로 이루어졌네. 요순시대의 양위는 말 그대로 전설일 뿐… 어
느 왕조도 그냥 이루어진 왕조는 없네. 다 존재하고 있던 왕조를 밟고 일어난
정복자지. 정복당한 그 왕조도 실제로는 다른 왕조를 밟고 일어섰던 왕조였
고… 나의 조선도 그 역사의 흐름중 하나일 뿐이지. 나는…』
그는 다시 길게 탄식했다. 그렇게 길게 숨을 불어낸 이성계는 정색을 했다
.
『고려는 썩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무너질 수 있었겠는가? 백성
들이 그것을 원했기에 가능한 일일 뿐… 나는 그 소망을 등에 업고서 조선을
세운 것이다』
『사대(事大)를 국시(國是)로 말이오?』
왕승고가 코웃음쳤다.
『이민족에게 위대한 나라를 스스로 종으로 낮추어 허리를 굽혀 욕됨을 자
초하면서 말이오?』
『조선은 약소국가. 언제라도 명나라와 같은 대국이 마음만 먹으면 나라
자체를 보전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러면 나라도 백성도 다 없어지는 것이니
그것이야 말로 고육지책(苦肉之策)…』
이성계의 말은 왕승고의 차가운 웃음소리에 끊어졌다.
『그래서 대륙으로 진출할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고 자신에게 병권을 맡
긴 사람을 죽이고 그 나라를 빼앗았다는 것인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성계가 눈을 부릅떴다.
그 눈에는 신념이 이글거렸다.
『나는 당시에 요동정벌이 불가함을, 아니… 출정 시기를 가을까지 미루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그것을 듣지 않았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꼭 대계(大計)를 이루려 하시거든 곡식이 들에 덮여 대군의 식량이 족하
게 되면 그 때 북치며 진군하사이다. 지금 출사하여 요동의 일성(一城)을 빼
앗는다 해도 곧 우기에 접어들어 진군이 더디고 싸움을 오래 끌면 화를 자초
할 뿐입니다…』
그의 상소는 틀린 것이 아니었다.
전장을 누빈 장수의 말이 가장 적확한 것은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
는 일이다.
실제로 그 당시 고려의 난맥상은 과연 누구의 선택이 옳았는가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국시(國是)는 이 나라를
후퇴시켰음을, 이 나라의 자주 기상을 시궁창에 처박히게 만들었음을 부인하
기 어렵다.
사대를 국시로 내걸고 스스로 상국의 신하로 자처하면서 명에 올리는 국서
의 첫머리에는 늘 붙어 있는 것이 「대명조선국왕겸이부상서이○봉서(大明朝
鮮國王兼吏部尙書李○奉書)」였다.
위대한 민족의 우두머리인 왕이 아니라, 명의 이부상서가 되었음을 자랑하
는 치욕적인….
유교를 대학(大學)으로 받들면서 우리 고유의 신선도(神仙圖)라든지, 단군
신앙 등을 모두 말살하려고 시도한 것은 이 나라의 정신(精神)을 죽이는 일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탁상공론만이 이조를 풍미하였으며 실리추구는 속되다 하여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밭에 나가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선비라 하였었다.
그런 세월이 오백년.
위대한 장인(匠人)이었던 장영실 같은 인재가 다시 나타나지 못한 것은 바
로 그러한 기술천시 풍조가 만연하면서부터였다. 그렇게 해서 조선왕조 말기
에는 명나라에 바치는 조공만 일년에 4~7회나 되었고 그 물량은 실로 어마어
마했었다.
황금 일천근, 은 일천근, 쌀 일만섬, 비단 이천필, 목면 일만필, 한지 이
만장, 칼 이천자루, 황소뿔 일천개, 후춧가루 열자루, 색염료 이천자루, 호랑
이가죽 일백장, 노루가죽 일백장, 오소리가죽 사백장…
이런 가공할 물량을 한번도 아니라 일년에 몇차례나 바쳐야했고, 그러다
보니 물량이 모자라는 금·은 등은 아예 채집하지 못하게 하여 광업조차 근본
적으로 봉쇄당하고 말았었다.
그런 폐해가 어찌 한둘이겠는가.
『그런 것은 평화를 보장받기 위함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백성들이 받는
고통은 그 공물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것에 비한다면 그것은…』
왕승고는 냉소했다.
『당신은 이 민족을… 하늘의 자손인 이 민족을 다른 민족의 개[狗]로서,
그렇게 만족하면서 살라는 것이오? 그렇게 역사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긍지를
잃어버린 민족이 차후 그 옛날의 기상(氣像)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
한단 말이오? 당신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으로 이 나라의, 이 민족의 위대함
이 역사의 저편으로 흔적없이 묻혀버릴 것인데도?』
『그런 일은 없다』
이성계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강해지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이미 긍지를 잃어버린 민족이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오? 스스
로가 약소민족이며, 스스로가 못난 사람임을 자각하도록 교육하면서? 내 나라
, 내 민족이 소중화(小中華)라는 착각에 빠져 꿈에서라도 대국을 흠모하는 미
친 자들이 생길 것인데도?』
왕승고는 이성계를 질타했다.
그의 질타는 잘못되지 않았다. 그의 꾸짖음은 후일 모두 사실로서 나타났
던 것이다.
한 사람의 행보(行步)는 별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대표하는 행보를 할 때에는 그 한 사람
의 판단으로 말미암아 역사가 바뀌어지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이성계는 비난을 받아 마땅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백년, 허리 부러진 천년을 양반타령에다 기자조선(
箕子朝鮮)을 자랑스럽게 외치던 그 썩어빠진 정신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그인
까닭이다. 그나마 영명했던 세종때에는 진취적인 기상이 살아난 적도 있었지
만 현실에 안주하던 나머지 왕들은 구토(舊土)의 회복을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영주(英主)라고 일컬어지는 영·정조 시절에도 당파싸움을 혁파(革罷)하고
각종 제도를 정비하여 내치(內治)에 힘쓸 뿐, 명이나 청(淸)을, 그렇듯 신주
단지처럼 섬기는 대국(大國)을 감히 넘볼 수는 없었다.
그렇듯 다른 무엇보다도 정신을 피폐(疲弊)하게 하는 사대주의야 말로 지
탄받고 또 지탄을 받아도 모자람이 없을 터였다.
그처럼 떠받들던 중국에서 우리 사신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했던가.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개돼지를 대하듯 했다.
황제는 주변국의 사신을 만날 때는 반드시 자금성의 첫번째 문에서부터 기
어오도록 했었다. 문과 문 사이는 삼백장(三百丈;900미터) 가량. 그러한 문이
사신을 접견하는 태화문까지 모두 일곱개다.
그 엄청난 거리를 기어 가야만 한다.
그나마 국력이 큰 주변국에는 대우를 해주지만 그 대우라는 것이 몇번째
문에서부터 기어오게 하느냐만 다르다. 태국의 경우에는 국력이 미약해도 그
야말로 말썽꾸러기인지라, 함부로 다룰 수가 없어서 다섯번째 문에서부터 기
어올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지극정성으로 명을 섬겼던 조선은 언제나 특별히 첫 번째 문에서부
터 기어들어가야만 했다. 아무렇게나 대해도 늘 황공무지로소이다이니까….
$)C 거리는 이천장(7킬로미터)이 넘으니 기어들어가는 데에만 사흘이 넘게 걸
릴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황제폐하를 배알하게 되면 황
제는 간단히 말한다.
『잘왔다. 네 임금에게 전해라. 앞으로도 대국을 잘 섬기도록』
단 세마디. 사신이 그 말을 듣고는 황은(皇恩)이 황공무지로소이다를 연발
하면서 돌아오면 초조하게 기다리던 조정은 사신 일행이 전하는 그 가소로운
말을 듣고는 안도하고 기뻐하여 잔치를 벌였다.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사, 살아남기 위해서다!』
이성계는 왕승고의 추궁에 소리쳤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 이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다』
그는 노안(老眼)을 부릅떴다.
『네가 감히 나를 추궁하려는 것이냐? 나는 이 나라의 상왕(上王)이다! 고
려는… 고려는 이미 사라진 나라이니라! 나를 죽일 테면 죽여보아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금 고려를 일으킬 수는 없을 것이야!』
이성계는 갑자기 고함치면서 옆에 있던 촛대를 잡아 왕승고에게 던졌다.
필연코 불이 꺼짐은 당연한 일.
『저, 전하!』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다급한 외침과 함께 신하들이 들이닥쳤다.
불이 밝혀졌다. 가슴이 터질 듯 격한 숨을 몰아쉬면서 이성계는 헐떡거리
고 있었다. 눈을 부릅뜨고서 앞을 쏘아보고 있는데, 그 눈길이 향하는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 전하…』
그 순간, 이성계는 마치 허물어지듯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풍선에서 바
람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신하들이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보, 보지 못했느냐? 여기 있던 자… 우, 우왕의 아들이라는 자를?』
이성계가 마구 팔을 휘저으면서 소리쳤다.
어둠.
이성계의 침궁은 그 어둠 속에서 소란스러웠다.
갑사(甲士)들이 갑자기 이리 뛰고 저리 뛰었고 관솔을 든 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왕승고는 그들의 모습을 이성계의 침궁 지붕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많은 망설임.
하지만 그는 그 자리를 그냥 벗어났다.
머리를 들어 밤하늘을 본다.
아버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처럼 절치부심, 목메어 왕조의 수복(收復)을 바라던 어머님의 염
원(念願), 이국땅에서 그처럼 동분서주하면서 이 땅으로 돌아올 그 날을 기다
리던 그 어머니의 모습….
자신을 위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한많은 생을 던져버린 어머니의 마
지막 모습이 아프도록 생생하게 눈을 찔러온다.
『어머니…』
왕승고는 나직이 어머니를 불러본다.
효도했던 자식은 아니었다.
자애(慈愛)했던 어머님도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그를 사랑했을 어머님이었을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
다. 다만, 다만… 그 지닌 한이 너무도 커서 다른 어머니처럼 그를 돌볼 수가
없었을 뿐일 터이다.
『잊지 말거라, 내 아들아! 고려를… 우리의 고려를 반드시 다시 일으켜다
오…』
그 피맺힌 외침.
어머니의 마지막 외침을 그는 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성계를 눈앞에 두고도 죽이지 않고 돌아선 것은 그가 이미 평
범한 일개 무인(武人)이 아닌 까닭이다.
백두산에서의 지난 일년은 그를 또다른 세계로 인도했다. 이미 천기(天機
)를 읽을 수 있고 욕망을 초월하는 어떤 깨달음이 그와 함께 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이성계의 천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그를 죽일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이 아니었다. 그를 죽인다 할지라도 다시 고려를 찾을 수 없음
을 알기에 그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리라.
민심(民心)이 이미 고려를 떠나 있었다.
백두산에서부터 이곳까지 그는 빠른 걸음으로 오지 않았었다. 보통사람처
럼 걸어오면서 백성들과 함께 했었다. 그들의 생각이 곧 천의(天意), 하늘의
뜻임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는 그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
이미 망해버린 고려를 백성들은 누구도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이성계를 만나기 전에 이미 살기가 거의 사라졌다고 해
도 좋았다.
백성이 원하지 않는 나라….
비록 그 출발이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백성이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나라
를 세운다는 것은 그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다시금 전쟁을 일으켜 백성들을
괴롭히겠다는 욕심일 뿐이었다.
죽여도 소용없다.
그리고 죽이지 않아도 몇해를 살지 못할 노인.
더구나 그가 이미 쇠약해져 있어 악몽까지 꾸고 있음을 본 터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손 한번 드는 것으로 이성계는 세상을 버려야만 할 터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나라를 되찾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돌아가신 양친이 다시 그의 앞에 살아올 것도 아니었다.
문득, 모든 것이 다 부질없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리고 사조이신 백두선옹이 왜 고려왕실의 부흥이란 책무를 진 그를 아무
런 망설임없이 대한 수호신문의 후계자로서 선택하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사
물의 관념(觀念)을 초월하여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존재.
그러한 존재가 된 다음에는 자연히 복수라는 일념에서 벗어나 더 큰 세계
를 볼 수 있을 것임을 백두선옹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讐)라고 하는 부모의 원수인 이성계
를 눈앞에서 보면서도 죽이지 않았다. 몇해 일찍 죽인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
의 분을 푸는 것 외에, 실제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잘 아는 그였기
에….
그 일이 있은 다음, 이성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함흥을 떠나 태종 이방원
, 그가 그처럼 증오하던 아들에게로 돌아갔다.
표면적인 이유야 어찌 되었건 그 내면의 일이야 당사자가 아니라면 누가
알 것인가.
* * *
쏴! 처얼썩…
바다가 세차게 몸을 부딪는다.
바위에 부딪혀 푸르게 멍든 몸을 뒤채며 허옇게 부서져 버리는 파도….
저 멀리 육지가 바라보이지만 실제로 이곳까지 건너오려면 그 또한 만만치
가 않다.
천하를 휩쓸던 몽고도 저 바다를 건너지 못해서 그렇게 오랜 세월을 끌었
었다. 무인정권(武人政權)의 영욕(榮辱)도 이 강화와 더불어 누렸었다. 어쩌
면 고려는 이 강화도에 천도하면서 이미 그 수(壽)를 다했다고 할 수도 있을
터이다.
왕승고는 철썩이는 파도를 내려다보면서 길게 한숨 쉬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마리산(摩利山).
강도(江都)라고 불리던 강화의 중심을 이루는 곳이며 또한 제일봉이다. (
후일 일제(日帝)가 강점하면서 민족말살의 정책과 더불어 그 이름을 마니산(
摩尼山)이라 개칭하였었다가 으뜸 최고를 뜻하는 마리라는 원래의 이름을 되
찾았다)
그 마리산 중에서도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냈다는 참성단(塹星壇)에 왕승
고는 서 있었다.
상단 한변의 길이는 채 일장이 되지 않는다. 하단 원형의 지름이라고 해도
이장도 아닌 일장 반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초라한 소규모.
『이곳을 일러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곳이라는 건가?』
왕승고는 어이가 없는 듯 중얼거렸다. 이제 이 나라의 내력에 있어 그 보
다 더 많이,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라는 바뀌고, 사람은 죽었지만 대한 수호신문은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라
를 지켜보고 사람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그 오랜 세월의 기록이 대한 수호신
문에는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한 기록은 또한 대한 수호신문을 잇는 계승자의
의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참성단을 일러 조작이라고까지 말할 필요가 없을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참성단이 강화에 있는 이유는 오로지 단군조선의 그 거대한 강
역(彊域)을 이 한반도 내로 끌어들이기 위함이니, 그 조성 이유는 자연히 따
져보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니, 따질 가치가 없기도 했다.
천하를 순수(巡狩)하면서 잠시 들렀다면 몰라도 이곳에서라면… 말이 되지
를 않으니까.
잠시 쓴 웃음을 머금었던 왕승고는 문득 눈길을 돌려 산 아래를 본다.
파도가 부서지는 가운데, 자리한 산자락이 아스라히 보인다.
파라락---
문득 그의 옷자락이 세차게 펄럭였다. 그의 신형이 산 아래로 마치 독수리
가 토끼를 보고 떨어져내리듯이 그렇게 급박하게 떨어져내렸다.
누가 봤다면 투신자살이라도 한다고 했을 모습.
찰나간에 그의 신형은 사라졌다.
쏴아아, 쏴아아아…
세찬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린다.
왕승고는 그늘진 얼굴로 주위를 돌아본다.
해송(海松) 몇그루가 바람을 못이기고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구불구불하다
. 그리고 그 아래로 몇기의 무덤이 보인다. 그리 오랜 무덤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 무덤을 보는 왕승고의 얼굴은 아픔으로 그늘이 진다. 어머니는 중
원으로, 중국 땅으로 건너가 자리를 잡자 아버지의 유해를 모시러 은밀히 사
람을 보냈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아버지가 묻혔던 그 간이무덤마저 훼손된 다음이었다
. 유해조차 모실 수 없게 된 어머니는 더욱 한을 품었었다.
그런 자리. 그의 아버지, 우왕이 처음 묻혔다는 그 자리에 왕승고는 서 있
었다. 그곳이 맞든 아니든 이제와서 무슨 의미가 있으랴.
중요한 것은 그가 아버지를 찾아 여기에 섰다는 것이며, 영령(英靈)이 참
으로 존재한다면 그의 아들이 여기에 선 것을 아시고 크게 기꺼워 하실 것이
라는 점이었다.
『아버지……』
곽대장군을 제외하고는 불러본 적이 없었던 그 낯선 단어가 왕승고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 꿇어앉은 그는 조용히 흙을 움켰다.
흙이 손가락 사이에서 부스러져 흘러내린다.
그렇게 흙이 바람에 날린다.
왕승고의 머리카락이 날려 그의 얼굴을 덮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이제
날려보내리라. 모든 것을. 내 마음 속에서……
역사(歷史)의 수레바퀴를 거슬리는 일은 한번으로 족했다.
그것이 잘못된 일이며, 심한 후유증이 생긴다는 것은 이미 사조의 행적으
로 증명이 되었으니 이렇게 모든 것을 날려 버리리라.
이제는 거둘 일만 남았다.
사조를 대신하여……
금곡노야를 대신하여……
***세상이 바뀌었다.
자금성의 주인이 바뀌었다.
역사는 승자의 편이다.
졌다면 역적으로 기록되었을 연왕 주체는 승자가 되면서 황제가 되어 천하
를 굽어보게 되었다.
그는 천자로서 즉위를 앞두고 그 조서(詔書)를 기초할 사람을 고심 끝에
결국 방효유로 할 것을 결정했다.
그 어떤 사람도 그의 학문을 능가한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리끼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일전에 그를 입궐 시켰지만 소복을 입고 그의 앞에 나와서 통곡을 한 바가
있어서 그를 하옥시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왕 앞에 재차 불려간 방효유는 그 계하(階下)에서 다시 통곡을 했다.
연왕은 친히 층계를 내려가서 그를 위로했다.
『선생은 너무 상심마오. 나는 주공(周公)을 본받아 성왕(成王)을 보좌하
려할 뿐이니.』
『성왕은 어디 계십니까?』
『그는 스스로 분사하고 말았소.』
『그럼 왜 성왕의 아들을 세우지 않으십니까?』
『나라는 장군(長君;어른)에게 맡겨야 하는 법이오.』
방효유는 다시 물고 늘어졌다.
『그렇다면 왜 성왕의 아우를 세우지 않으십니까?』
연왕은 미간을 암암리에 찡그렸다.
『그것은 짐의 집안 일이오.』
말을 마친 그는 지필묵을 대령케 했다.
『천하에 조서를 내리고자 하니, 부탁하오. 선생이 아니면 누가 그럴 자격
이 있겠소?』
연왕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고 은근한 어조로 그를 설득했다.
잠시 눈앞에 있던 붓을 바라보고 있던 방효유는 이윽고 그 붓을 잡았다.
아연 긴장이 흘러갔다.
붓을 쥔 방효유는 일필휘지, 단숨에 넉 자를 써내려가고는 붓을 내동댕이
쳤다.
<연적찬위(燕賊簒位).>
연의 도적이 제위를 찬탈하다.
그 넉 자를 보는 순간 연왕 주체는 불처럼 노했다.
『너는 죽는 것이 두렵지도 않더냐?』
『목이 잘린다 할지라도 조서만은 쓰지 않겠소!』
『너는 그렇다 할지라도 죄가 구족(九族)에 미칠 것인데도 말이냐?』
연왕이 노해 소리치자 방효유는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로 답했다.
『구족이 아니라, 그 화가 십족에게 미친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는 법이오.』
구족이란 아버지의 일족 4대, 어머니의 일족 2대.
그리고 아내의 일족 2대를 일컫는데, 이때부터 친구와 문하생을 포함하는
십족(十族)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노한 연왕은 정말 방효유의 문하생까지 다 잡아들여 죽였는데, 그 참혹함
은 가히 목불인견이었다고 명사 방효유전에서는 적고 있다.
그가 마지막 남긴 시 한 편만이 구구절절 그의 일편단심을 담고 있을 따름
. 그렇게 그는 역사 속으로 스러져 갔다.
천강난리혜숙지기유(天降亂離兮孰知其由)
간신득계혜모국용유(奸臣得計兮謀國用猶)
충신발분혜혈루교류(忠臣發憤兮血淚交流)
이차순군혜억우하구(以此殉君兮抑又何求)
오호애재혜서불아우(嗚呼哀哉兮庶不我尤)
하늘이 난리를 내리니 그 뜻을 모르겠어라.
간신이 흉계로써 나라를 빼앗으니 충신은 분하여 피눈물을 흘리노라.
이제 주군을 위하여 죽으니 또 무엇을 바랄 것인가.
아아, 슬프다. 바라건대 나를 나무라지 말라.
방효유의 일족은 그렇게 해서 몰살했다. 문하생과 친구들까지 화를 입었으
니, 그 수효가 팔백칠십삼명이며 제태나 황자징 등 연왕에 반기를 들었던 사
람들로서 죽임을 당한 수효는 수만이 넘었다.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피의 보
복이었다.
『뭐라고?』
보고를 받던 연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서를 기초한 누련(樓璉)이… 집으로 돌아가 목을 매고 자결 하였습니
다』
『이런 고약한 놈들 같으니!』
연왕은 앞에 있던 안석을 집어던졌다.
그의 힘은 과인하여 안석이 날아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말
았다.
앞에 있던 대신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놈의 일족도 모조리 몰하거라!』
연왕이 소리쳤다.
그의 눈은 살기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폐하, 내일이면 정식으로 황제에 등극하시게 됩니다. 조서를 칙한 사람
의 일족을 몰살하시면 경사스런 일을 앞두고… 통촉하시옵소서!』
대신들이 그의 앞에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으으음…』
가쁜 숨을 내쉬던 연왕이 이윽고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손을 저었다.
나가라는 뜻이다.
모두 물러남을 보고 연왕은 미간을 찡그린채로 이마를 짚었다. 그 얼굴에
는 고뇌와 짜증, 불안과 초조 등이 한데 어울려 있었다. 너른 성품을 지닌 그
$)C였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서는 전과 같지 않았다. 성질이 조급해지고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면 누구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왜 이런 일이…』
신음하던 연왕은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이유가 있었다.
연락이 없었다.
경사에 입성을 하면서부터 연락이 끊어졌다.
무슨 이유일까?
『제위에 오르면 찾아오겠다고 하더니, 즉위식까지 기다렸다가 오겠다는
것인가?』
연왕은 중얼거렸다.
그는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철통같이 갑사들이 숙위(宿衛)하고 있어도 그는 내집 찾아들 듯이 소리도
없이 그를 찾아왔다.
그 광명회주를 보지 못하자, 연왕 주체는 그답지 않게 불안하고 초조했다
. 뭔가에 억눌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인지 알 수가 없다.
그로서는 알 수 없음이 당연했다.
그가 어찌 마공대법이 그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는가.
광명회주에게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가 지금껏 살아있지도 못했을 것임
은 더더욱 짐작조차 할 수 없음이 당연했다. 세상에는 황권(皇權)보다 더욱
무서운 것이 있음을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가 나타나는 순간이 바로 자신이 죽는 날임을 연왕 주체는 아직 알지 못
하는 것이다.
* * *
『으악!』
또 한 사람의 위사가 피를 뿌렸다.
진영이 무너지자 검은 그림자가 바람과 같이 날아들었다.
『어딜 오느냐?』
앙칼진 고함과 함께 검이 그를 맞았다.
긴 머리카락이 부채살처럼 펼쳐지면서 승복의 여인은 두 사람의 흑의인을
물리친 서슬에서 그대로 몸을 날려 그녀의 뒤에 숨어 있는 청년을 덮쳐가는
흑의인에게로 검을 휘둘렀다.
검기가 달무리처럼 일었다.
첫댓글 즐감~~
감사합니다
잘~감상~~고맙습니다~~~
즐~감 하고 갑니다.
감사...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