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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주실
아운의 맞은편엔 하영영이 앉아 있었고, 옆에는 북궁연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운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하영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동안 수고했다."
하영영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덕분에 재미있었어요.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것은 가슴이 아프지만, 그동안 방안에 틀어 박혀 배운 고리타분한 학문을 실전에 써 본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보상을 받았답니다. 물론 사전에 오라버니의 도움이 컸지만요."
아운의 옆에 있던 북궁연이 하영영을 보며 말했다.
"아가씨답지 않게 겸손을, 세상에 아가씨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완벽한 맹주 대행을 할 수 있었겠어요, 제가 봐도 정말 대단했어요."
북궁연의 하영영에 대한 태도가 무척 정중했다.
그녀들은 이미 서로 언니 동생 하며 말을 놓는 사이로 발전하였지만, 아운 앞에서는 시누이올케로서 예의를 지키는 중이었다.
"고마워요. 언니 그리고 오라버니!"
"말해 봐라!"
"제가 작은 공을 세웠다고 생각하면 후에 제 부탁 하나면 들어 주세요."
"내가 들어 줄 수 있는 부탁이면 들어 주마."
"지금 약속하신 것이죠?"
"물론이다."
"언니 앞에서 한 말이니 믿겠어요, 하긴 오라버니가 다른건 몰라도 약속은 잘 지키는 편이긴 하죠."
그렇게까지 나오자 아운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대체 무슨 부탁이냐?"
"그건 나중에 말할게요, 그건 그렇고 이제 어쩌실 것인가요? 대전사와의 결투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요?"
대전사와의 결투 이야기가 나오자 북궁연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그녀는 얼굴에 표 나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지만, 내심을 전부 감출 순 없었다.
하영영 역시 긴장한 표정이었다.
아운은 북궁연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
"무림맹의 일을 간단하게 처리한 후, 개인 수련을 가지려한다. 그리고 연누이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내 꼭 이기고 돌아와 석 달 안에 우리 아이를 만들고 말 것이오."
북궁연의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가가, 그런 말씀 하시면 아가씨가 흉봅니다."
"흉, 아니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아기를 만드는 것도 흉인 거요?"
북궁연은 고개를 숙이고 어잴 줄 몰라 하고 있었으며, 하영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운은 태연하기만 했다.
야율초와 엄호 그리고 능유환과 사마정이 하나의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능유환은 비록 팔 하나가 잘렸지만, 조금도 기가 죽지 않은 모습이었다.
"사제, 대군사의 비밀함은 열어 보았나?"
"물론입니다."
엄호가 야율초를 바라보았다.
이미 야율초가 대군사의 유지를 확인했다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내용을 묻진 않겠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던 자네가 잘 알아서 하리라 믿겠네."
"감사합니다. 사형."
"이제 광전사는 몇 남지 않았네. 그렇지만 우린 아직 충분한 힘이 남아 있으니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닐세."
"물론입니다. 하지만 만약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놈은 언제나 골칫거리입니다. 그래서 전 그 만약이란 것조차 없애려고 합니다. 그래서 몇 가지 조치를 취하려고 합니다."
야율초의 말에 엄호와 능유환 등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엄호가 물었다.
"대군사의 비밀함과 관련이 있는 말인가?"
"그것도 있지만 저 역시 따로 준비를 하는 중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우선 동심맹의 살아남은 자들과 손을 잡을까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지금 동심맹은 완전히 와해가 되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핵심 장로들은 모두 세 명에 불과 했다. 그들은 어차피 더 이상 무림에서 어떤 행세를 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리고 아운의 성격으로 보아 그들을 그냥 둘리도 없었다.
살아남은 동심맹의 장로들도 그것을 알 것이고, 동심맹의 회원들 역시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 쪽과 손을 잡으려 할 것이다.
이미 썩을 대로 썩은 자들이라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할 것이다.
사마정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들과 손을 잡아서 무슨 도움이 되겠나, 어차피 권왕이 그들을 그냥 두고 보지도 않을 것이고, 현재 무림맹에서의 위치도 거의 없을 텐데."
"그들 중 천개 몽화는 다릅니다. 다른 자들은 몰라도 그자만은 쉽게 처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선 개방에서 몽화의 위치가 워낙 견고하고 개방의 정보조직이 막강하기 때문입니다. 몽화를 함부로 건드리면 그 정보조직에 문제가 생깁니다. 지금 같은 전시에 그것은 아주 치명타가 될 것입니다. 권왕이 바보가 아닌 이상 몽화를 처리를 한다고 해도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일 것입니다. 제가 가장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몽화입니다."
"그 자와 손을 잡으면 정보마저도 우리 손에 쥐겠군."
"그렇습니다. 그는 우리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쯤 아운이 무서워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능유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좋은 방법이군. 언제쯤 그에게 접근할 셈인가?"
야율초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 미소를 보고 사마정이 놀라며 말했다.
"벌써?"
"동심맹의 세 장로들이 먼저 다가왔습니다. 사실 그들로
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린 그를 대우해 주고 중
원의 무사들에게 본보기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중원인이라도 충성만 하면 우대한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어차피 살아남은 광전사들이 많지 않아 나중을 위해서도 그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엄호가 조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네. 그 부분은 자네가 알아서 하게."
무척 못 마땅한 목소리였다.
배신자인 몽화를 우대한다는 것이 천생 무골인 엄호에게 있어서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야율초의 말에도 일리가 있기에 마냥 반대만은 할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사형. 사부님께 보고를 한 후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광풍사 한 조를 사막으로 보낼 생각입니다."
"사막?"
"사라신교를 공격하려고 합니다."
"사라신교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권왕의 또 다른 세력이 사라신교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린 비록 휴전을 했지만, 그것은 중원과의 휴전일 뿐입니다. 사막의 사라신궁은 제외라 할 수 있습니다."
결전에 앞서 사라신교를 침으로 아운을 흔들려는 계략이었다.
능유환과 사마정은 충분히 이해를 하였고, 엄호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아서들 하게, 나는 이만 가보겠네."
그는 내심 대전사와 아운의 정정당당한 대결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사들의 대결을 흐리는 야율초의 계략이 싫었다. 그렇지만 지금 같은 전시에 그것을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엄호가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자 야율초는 묵묵히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사형, 엄사형은 너무 강직하단 말이오. 전사인 것은 좋지만, 전시엔 이기는 것이 우선이란 것을 알아야 하오.'
엄호가 완전히 밖으로 나가자 야율초는 능유환을 보고 말했다.
"사라신교는 근래 쌍지도라는 곳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쌍지도?"
"도적 떼들이 있던 녹주라고 합니다. 제가 그 위치를 대략 알아 왔습니다."
"알았네, 이는 자네가 알아서 하게, 우린 못들은 것으로 하겠네."
"감사합니다."
야율초는 아운을 제거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기로 이미 결심을 단단히 하였다.
'권왕, 생각할수록 불안하고 나를 답답하게 하는 인물이다.'
아운과 대전 사와의 결전을 앞 둔 무림맹은 분주했다.
새롭게 무림맹을 정비하였고, 동심맹의 인물들은 완전히 도태가 되었으며 동심맹의 핵심 전력이 사라진 문파들은 개혁이 한참이었다. 사실상 걸림돌이라 할 수 있었던 동심맹의 고수들이 사라지고 나자 그들의 개혁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단지 청성과 사천당문만 미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대정회와 일부 선은들이 힘을 합치고 무림맹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개혁파는 그들 문파들 안에서도 갈수록 힘을 키워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회오리 속에 소씨 가문만은 온전한 힘을 그대로 지닌 채 가문의 미래를 위해 힘을 모을 수 있었다.
맹주 집무실,
아운이 세 명의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노인과 장년인 그리고 한 명의 청년이었다.
노인이 공손하게 포권지례를 하고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맹주님."
아운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소씨가문의 전대가주, 맹룡철각 소현.
그것이 노인의 이름이었다.
시실은 소현이 아니라 오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바로 아운의 이사부인 오칠의 후인이었다.
소씨세가의 인물들은 이미 아운으로부터 모든 사연을 들은 다음이었기에 아운을 웃어른으로서 깍듯이 대하고 있었다.
"이것을 주고자 불렀습니다. 이는 오사부님의 진전으로 소씨세가의 가문 비전으로 쓰십시오."
소현이 놀라서 아운이 준 두 개의 책자를 들어 보았다.
하나는 선풍팔비각의 모든 것이 들어가 있었고, 또 하나는 원래의 내공심법에 아운의 심득이 합해진 내공운기법, 그리고 연환금강룡의 권법등이 적인 비급이었다.
소현이 감격에 겨운 시선으로 아운을 바라보았다.
"소씨 세가가 이를 계기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는 이 사부님이 후인들에게 용서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용서라는 말은 가당치 않습니다."
아운은 짐 하나를 덜어 놓은 듯한 홀가분함을 느꼈다.
"이번 몽골과의 결전에 살아남게 되면 제가 직접 시연을 보이고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천하제일고수가 가르침을 주겠다는데 싫다고 하는 무인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모두 일어서서 다시 한 번 아운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아운은 사부에게 진 빛 일부를 갚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들이 오고 있습니다."
보고를 받은 황룡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결국 오고 있는 것인가? 역시 대형의 에측은 대단하구나."
옆에 서 있던 벽룡이 그 말을 받았다.
"드디어 풍운십팔령이 세상에 이름을 걸 날이 왔군요."
"신중해야 한다."
"그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쌍지도의 무서움엔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작전에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자만은 금물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황룡과 벽룡의 뒤로 남은 풍운 십팔령들이 각자 무기를 들고 여유 있게 서 있었다. 건덕의 뒷골목 시절부터 싸움에는 이골이 난 자들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움 그 자체를 즐기는 자들이었다.
마침 무림맹에 갔던 풍운령들도 소설과 함께 돌아와 있는 중이었기에 그들의 사기는 하늘까지 올라가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수련만 해 왔다. 이제 그 수련의 대가를 확인할 시간이 온 것이다.
황룡이 뒤를 돌아보며 다시 한 번 일침을 가했다.
혹시라도 해이해진 마응으로 일을 그르칠까 두려웠던 것이다.
"아무리 쌍지도라고 해도 신중해야 한다. 그들은 사막의 신이라는 광풍사라는 것을 명심하라!"
황룡이 정색을 하고 말하자 풍운십팔령의 형제들은 자세를 바로하고 일제히 복명을 하였다.
"명."
"모두 자신의 위치로."
풍운십팔령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이미 아운으로부터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을 전해들은 다음이었다.
쌍지유사도(雙池流砂島).
사막의 섬이라고 할 수 있는 쌍지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쌍지호가 따로 섬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유는 쌍지도 주위 십리 밖을 흐르고 있는 유사 때문이었다. 폭 오십 장의 유사는 쌍지도 주변을 호위라도 하듯이 원을 그리며 흐르고 있었다.
그걸 모르고 접근했다간 모두 모래 속으로 수장 되고 말것이다.
쌍지도로 들어가는 길은 단 한 곳 밖에 없었다.
바로 유사가 흘러와서 쌍지도를 돌아 나가는 곳.
즉 유사의 줄기가 쌍지도 근처로 와서 쌍지도를 돌아서 다시 나가는 사이로 폭 십장 정도 넓이의 입구뿐이었다.
원래 유사란 항상 그 흐름이 바뀌게 마련인데 쌍지도를 도는 유사만큼은 변하지 않고 항상 그대로였다.
그 원인은 원래 이곳의 주인이었던 혈랑왕조차 모르고 있었다.
덕분에 그 입구만 지키고 있으면 쌍지도는 철옹성이라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런 쌍지도에 풍운 십팔령은 아운에게 배운 환혼진을 가미하였다.
암혼살문에서 안가를 지을 때 사용하는 기본적인 진법이지만, 그 진법이 유사와 만나면 그 위력은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더군다나 유사 지역은 그게 아니어도 뿌연 모래먼지가 성벽처럼 둘러쳐진 곳이었다.
그 모래먼지는 환혼진을 더욱 보강해 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사라신궁을 공격하는 광풍사의 대부령은 아르특이었다.
그는 이전에 사막에서 아운과 싸운 광풍사의 대부령인 타미르의 사촌 동생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아운에 대한 원한이 많은 자였고, 사막에서의 전투 수행도 상당히 능한 편이었다.
그는 쌍지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그 곳이 어떤 곳인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보통 쌍지도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대한 먼지 구름속에 약간의 물이 있는 녹지가 있고 두 개의 호수가 있으며 마적단의 총 본부라는 정도가 전부였던 것이다.
아르특은 먼지구름이 가득한 쌍지도를 보면서 대자연의 위대한 조화에 다시 한 번 놀라고 있었다. 그 뿐이 아니라 그의 수하들 역시 몹시 놀란 표정들이었다.
무려 수십 장에 달하는 먼지로 이루어진 지대는 하나의 성곽처럼 쌍지도를 감싸 안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일대 장관이었다. 바람이 회오리치면서 그 지대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생기는 현상인 것은 알겠는데, 어째서 바람이 그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는지는 세상의 누구도 모르는 수수께끼였다.
"말은 들었지만 지금 보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아르특의 감탄어린 말에 그의 옆에 말을 타고 있던 대군령 오르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대부령. 저 안이 어떤 곳인지 빨리 보고 싶습니다."
"서두를 것 없네. 저 먼지 속에 적이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 해야 할 것일세."
"명."
"그럼 일단 수색조를 먼저 보내게."
"명."
잠시 후 광풍사의 척후조가 앞장서고 그 뒤를 남은 광풍사들이 천천히 뒤따르며 쌍지도를 향했다.
황색의 모래 먼지 속으로 천천히 잠입해 들어가는 광풍사들은 두건으로 얼굴을 거의 가리다시피 하고 있었지만 모래 먼지들이 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긴 어려웠다.
한참을 앞으로 걸어가던 선두의 수색조가 갑자기 자리에 멈추었다. 그들 중 한 명이 고함을 질렀다.
"유사다."
수색조들이 얼른 뒤로 물러섰고, 그들 중 한 명이 줄을 던져 유사에 빠진 동료를 구해 내었다.
아르특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황사 담벼락에 유사가 흐르는 지역이라, 숨어들기엔 최적의 장소구나. 이들이 이곳에 숨어든 연유를 알 것 같군.
하지만 광풍사는 사막의 전사들이다. 이 정도로 우릴 막을 순 없지, 길을 찾아라!"
아르특의 명령을 받은 십여 명의 척후조가 사막의 지형을 천천히 조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먼지구름 속에서도 유사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어 내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진이 흐른 후 그들은 쌍지도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아 낼 수 있었다.
멀리 어렴풋하게 쌍지도 내의 푸른 녹주가 보이고 있었다.
아르특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감돌았다.
"돌격."
대부령 아르특의 고함에 대군령을 비롯한 두 명의 소군령들이 자신의 수하들을 이끌고 녹주를 향해 달려갔다. 특히 두 명의 소군령들은 서로 공을 다투려는 듯 전력으로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속도에 비례해서 녹주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약 반각을 달려가던 선두의 소군령은 갑자기 자신의 말이 허우적 거리면서 밑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끼고 기겁을 하였다. 그는 얼른 아래를 내려다보고서야 자신이 유사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유사다. 모두 뒤로 후퇴."
그러나 그의 외침은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어느새 그들은 유사의 가운데까지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사실을 알고 필사적으로 물러서는 중이었다. 다행히 말을 타고 있었기에 상당수의 광풍사들은 말을 발판으로 신법을 펼쳐 유사를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그것은 한계가 있었다. 삼백 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꺼번에 유사 지역을 벗어나려고 난립했기 때문이었다.
대부령 아르특은 살아남은 자신의 수하들을 돌아보았다.
겨우 백오십여 명.
절반이 죽은 것이다. 특히 두 명의 소군령이 죽었다. 그리고 그들이 타고 온 말은 전부 죽고 말았다.
유사에서 빠져 나오며 말까지 구할 순 없었던 것이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대군령인 오르목이 다가와 보고를 하였다.
"진법입니다. 간단한 진법으로 우리를 함정에 빠트렸습니다."
아르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왜 당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유사와 모래먼지를 이용한 진법이라. 이들은 유사의 흐르는 경로까지 정확하게 알고 우리를 유사의 중앙으로 끌어 들인 것이다."
오르목이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유사라면 우리가 중앙에 도착하기 전에 알았어야 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그 곳에 당도하자 갑자기 그 지역 전부가 유사로 변한 것 같았습니다."
아르특은 겨우 빠져 나온 유사 지역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우리가 속은 것이다. 일단 우리가 전진했던 지역은 유사 지역이 아니었다. 선두가 갑자기 유사 지역으로 들어가면서 당항 했고, 그 순간 진법이 바뀌면서 우린 모두 유사 지역에 빠진 듯한 착각을 한 것이다. 그렇게 허우적거리면서 우리도 모르게 진짜 유사 지역으로 이동을 하며 전체가 전부 유사에 빠진 것이다."
오르목은 그제야 이해를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특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우린 절반이 살았고, 정확하게 길을 찾아내었다.
이제부터 형제들의 복수를 하러간다."
"명."
남은 백오십의 광풍사들이 조심스럽게 쌍지도를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유사로 인해 혼줄이 난 다음이라 접근이 무척 조심스러웠다.
약 반각 정도 앞으로 전진 하였을 때였다.
"크악!"
비명과 함께 선두의 광풍사들이 발목을 잡고 쓰러졌다.
광풍사들이 제자리에 멈추고 놀라서 선두를 바라볼 때, 갑자기 모래 속에서 풍운령과 사라신궁의 전사들이 나타나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전혀 예측 못한 상황이었다.
"당황하지 말고 상대를 공격하라!"
아르특의 고함이 아니더라도 광풍사의 전사들은 용감했다.
처음엔 당황한 듯하더니 곧 반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모래 속에서 나타난 풍운십팔령들과 사라신공의 전사들은 미리 만들어 놓았던 진법을 이용해 이리저리 숨어 다니면서 그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만들어진 진법에 풍운십팔령과 사라신교의 전사들이 미리 정해진 방위를 차지하면서 진법이 가동되었고, 사방은 깜깜한 어둠과 안개 속에 묻히고 말았다. 광풍사가 자랑하는 광풍멸사진을 발동조차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싸우다 불리하면 진속에 숨어 버리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진법이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서서 대항하라!"
아르특은 광풍사들에게 명령을 내려놓고 진법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풍운십팔령들이 그것을 두고만 보지 않았다.
황룡을 비롯한 몇 명의 풍운령들이 아르특과 오르목을 향해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여기저기서 혼전이 벌어졌는데, 아운의 특훈을 견디어낸 풍운령들의 공격은 무서웠다. 약 일각동안의 시간이 지나면서 광풍사들 오십여 명 이상이 죽어갔던 것이다.
대부령 아르특은 당장이라도 사라신궁의 고수들을 몰살시키고 싶었지만 그는 황룡을 비롯한 네 명이나 되는 풍운령을 상대로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는 이 네 명을 상대로 충분히 이겼을 것이지만 풍운령들의 교묘한 절진과 협공은 그의 손발을 묶어 놓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광풍사들은 진법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사라신궁의 무사들이 여기저기서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정상적인 실력에서 차이가 많이 나기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황룡은 대충 상황을 보고 고함을 질렀다.
"모두 후퇴 하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사라신궁의 무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쫓아라!"
이미 절진은 거의 파괴된 상황이었다.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아르특은 이번만은 하는 생각에 자신 역시 신법을 펼쳐 앞장을 서며 겨우 유지되고 있는 진법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다행히 그 틈을 타 사라신궁의 전사들과 풍운령들은 어느 정도 뒤로 물러 설 수 있었다.
그들을 따라 쌍지도로 들어선 백여 명의 광풍사들은 갑자기 펼쳐진 그림같이 아름다운 광경에 감탄하였다.
양쪽으로 제법 큰 호수가 있었고, 그 호수 중 큰 호수 하나엔 호수 중앙을 가로지르는 큰 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 다리 건너편에는 돌을 쌓아 올린 성이 있었는데, 사라신궁의 전사들은 모두 그 곳으로 도망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아르특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모두 잡아라!"
아르특은 명령을 내린 후 자신이 앞장서서 달려 나갔다.
그의 수하들도 아르특의 뒤를 따른다.
호수의 다리를 향해 돌진한 광풍사들은 가장 뒤에서 후퇴하고 있는 풍운령들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
도망치는 속도가 더욱 빨라진다.
사라신궁의 무사들이 필사적으로 도망칠 때 어느 덧 풍운령들이 호수의 맞은편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으며 광풍사들도 호수 깊숙한 곳까지 쫓아 와 있었다.
이제 거의 따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풍운령들이 갑자기 호수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사라신궁의 수하들 역시 호수 속으로 뛰어 들고 있었다. 다급해서 호수 안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역력했다.
"네 놈들이 그런다고 살아 날 수 있을 것 같으냐?"
아르특이 비웃으며 활로 풍운령들을 공격하려 할 때였다.
멀쩡하던 다리가 갑자기 무너졌다. 광풍사들 역시 호수 속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무공이 강한 몇 명이 등평도수를 펼치며 멋지게 물위로 착지를 하였지만 물을 차고 뛰어오르려 할 때 그들은 기겁을 하고 말았다. 그냥 물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이‥‥이게."
대부령 아르특은 기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물속에서 빠지고 나서야 호수가 다른 물하고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땐 이미 늦은 다음이었다.
풍운령과 사라신궁의 전사들이 사방에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쌍지도의 흡중수에서 훈련을 해온 전사들이었다.
호수 밖이라면 모르되, 흡중수 안에서는 제 아무리 광풍사라 해도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보통 물보다 몇 배나 밀도가 높아 함부로 움직이기도 어려웠고, 요령을 모르면 물 위로 떠오르고 싶어도 떠오를 수가 없었다.
그들 중 가장 무공이 고강한 아르특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한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황룡이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머금고 아르특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오르목은 벽룡을 비롯한 십여 명의 풍운령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난도질을 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건덕의 건달들.
뒷골목의 법칙대로 아주 확실하게 확인사살을 하였던 것이다.
다른 광풍사들은 돌아 볼 것도 없었다.
흡중수에서 물 위에 떠오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잘 훈련된 사라신궁의 전사들은 달랐다.
그들은 흡중수를 다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풍운십팔령을 제외하면 겨우 흡중수에서 벗어날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정도만으로도 살아남는데 문제가 없다는 점이었다.
야율초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모‥‥몰살?"
"그렇습니다."
말을 전한 밀각의 각주도 전달하기 민망한 표정이었다.
이제 새롭게 밀각의 각주가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좋은 소식을 전해준 기억이 별로 없었다.
마치 자신이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특히 이번일의 경우는 보고를 하면서도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사라신궁을 공격 하러 간 삼백의 광풍사들이 한명도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알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그들이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정도였다.
야율초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쌍지도에 무엇인가가 있는 것인가? 결국 권왕은 내가 사라신궁을 공격할 것이라 생각하고 함정을 파 놓았단 말이군."
중얼거리는 야율초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권왕에 대한 자신의 대처 방안들이 조금씩 틀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겹치면서 야율초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조금씩 틀어진 것이 합쳐지면 모든 상황이 완전히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었다.
'흐름이 바뀌고 있다. 성할 뻔 무엇이든 잘 되지만 그 흐름이 바뀌면 되던 일도 안 되게 마련이다. 이 흐름을 바꾸어야만 한다. 순리가 안 되면 강제로라도 바꾸어야 한다.'
야율초는 군사였다.
그는 세상을 읽는 눈을 가진 자다.
모두들 무공에서 위에 있는 대전사가 권왕을 이길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강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것이다. 목숨을 걸고 겨루는 결전에서 변수는 의외로 많다. 그리고 대전사에 비해서 권왕의 발전 속도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더 이상은 안 된다. 그냥 이렇게 두어서는 안 된다."
책사인 자신이 권왕과의 머리싸움에서도 졌다는 생각이 들자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는 그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권왕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야율초였기에 사막의 패배는 더욱 크게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가까스로 다스린 그는 결국 자신이 대군사의 절대고독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사부님께는 죄송하지만, 결국 대군사님의 말이 옳다. 결국 그 분의 권고를 따를 수밖에 없다. 권왕 기다려라! 네놈은 상상도 못할 재앙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야율초의 눈동자에 한광이 어렸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그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나자 밀각의 각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황자님은 어떠신가?"
"한동안 고민을 하시는 것 같더니 오늘 오전에 혈궁을 떠나셨습니다. 아무래도 혈궁을 떠나 마음을 다스리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대전사님께서는 그 분이 어떤 행동을 하던지 일단 놔두라고 하셨습니다."
"많이 혼란스러우시겠지. 하지만 잘 이겨내시리라 믿는다."
야율초는 검혼을 생각하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싫던 좋던 그는 몽고의 하나 남은 후계자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족이라 생각하고 살아온 사람이다. 많은 혼란과 아픔이 있었을 것이다.
야율초는 검혼에 대한 생각을 당분간 접기로 하였다. 우선 급한 것은 대전사인 사부의 결전이었던 것이다.
'이 일은 나 혼자 하기옌 벅찬 부분이 있다. 일단 능사형에게 부탁을 하자.'
야율초는 결심을 굳히자, 밀각의 각주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는 나와 능사형이 혈궁을 떠날 채비를 하라! 그리고 너와 가장 믿을 수 있는 수하 몇 명만 추려 우리 뒤를 따르라. 따로 할 일이 있다."
"어디로 가시려는 것입니까?"
"무림맹으로 간다."
밀각의 각주 표정이 굳어졌다.
"이미 준비된 것이 있어 수확을 걷으러 가는 것뿐이다.
너는 그리 알고 준비하되 혈궁 내의 다른 누구도 모르게 은밀해야 할 것이다."
"명."
밀각의 각주가 고개를 숙였다.
대전사와 아운의 결전이 임박하면서 강호의 전 무림인들이 종남산의 군야평을 향해 대 이동을 시작하였다.
군야평은 한순간에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로 변하였고, 강호 무림은 두 사람만 모이면 권왕과 대전사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러나 군야평으로 온 무인들 중 상당수는 실망을 해야만 했다.
만약을 대비하여 무림맹은 군야평으로 올라가는 무인들을 스스로 정한 기준에 맞추어 제한하였기 때문이었다. 결전의 결과에 따라 자칫하면 그 자리에서 몽골의 전사들과 대 혈전을 벌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많은 무인들이 내심 불만은 가졌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군야평을 올라가는 대신 군야평 아래서 권왕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아운은 천천히 눈을 떴다.
미세혈관까지 흐르는 무극신공의 기운이 그의 기분을 더 없이 상쾌하게 만들었다.
'이제부터 시작인가?'
아운이 수련장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북궁연이 비단천을 들고 다가왔다.
"많이 기다렸소. 연매."
북궁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 정도의 기다림은 행복이랍니다."
아운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떠나야 하오."
"반드시 돌아 올 것을 저는 믿고 있습니다."
"걱정 마시오."
아운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북궁연은 더욱 믿음이 갔다.
반드시 이기고 돌아 올 것이라 그렇게 믿었다.
둘은 손을 마주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밀각의 각주가 바람처럼 날아와 무릎을 꿇고 말했다.
"권왕이 금룡단 전원과 함께 출발했다 합니다."
야율초의 유리알 같은 눈이 반짝거렸다.
"드디어 줄발했는가? 북궁연도 함께 출발했는가?"
"북궁연 낭자는 무림맹에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검왕 북궁손우는?"
"그 역시 자신의 딸 옆에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내일 쯤 북궁세가의 인물들과 함께 출발할 것 같습니다."
야율초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그런가? 그렇다면 상황으로 보아 대전사님과 결전 이전까지 검왕과 권왕이 만나지 못할 수도 있겠군."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아무래도 권왕은 금룡단과 움직일 테고 검왕은 무림맹의 원로들과 움직일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군,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책을 쓰는 수밖에, 북궁연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무림맹의 지근에 있는 태실봉으로 향했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태실봉?"
"아무래도 떠나는 권왕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기 위해서 인 것 같습니다."
야율초의 눈에 기광이 어렸다.
"일을 더욱 쉽게 해주는구나. 탕룡광마 우칠도 권왕과 함께 출발하였는가?"
"그는 무림맹에 남아서 북궁연을 호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태실봉으로 오르는 무리 중에 그가 있다는 보고입니다."
"그건 유감이군. 하지만 그 정도는 쉽게 처리할 수 있지. 자네는 무림맹의 동태를 계속 살펴라! 그리고 나와 능사형은 따로 할 일이 있으니, 반 시진 동안은 이 근처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도록."
"명."
밀각의 각주가 허리를 숙이며 복명을 한 후 바람처럼 사라졌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던 능유환이 야율초를 바라보았다. 야율초 역시 능유환을 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사형이 나서 주셔야겠습니다. 지금 무림맹에 고수가 없는 상황이니 움직이기 유용할 것입니다."
"알았네."
둘은 이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능유환은 절대고독에 대한 이야기도 들은 다음이었다. 차선 책 또한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야율초가 원한 자신의 역할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노리고 있는 기회는 의외로 쉽게 왔다.
무림맹의 근교 섬서성으로 떠나는 대로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태실봉 자락에 북궁연과 소홀, 그리고 옥룡이 서 있었다. 북궁연은 지금 떠나고 있는 아운의 모습을 산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와 옥룡 그리고 소홀의 뒤쪽엔 우칠이 철봉을 어깨에 메고 서 있었고 그의 곁에는 매화단의 여무사 두 명과 호난화가 나란히 서 있었다.
금룡단이 모두 아운과 함께 출발했지만, 우칠은 북궁연을 호위하기 위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소홀이 북궁연을 보면서 말했다.
"결국은 말하지 못했네요."
북궁연은 한 손으로 자신의 배를 가리며 말했다.
"돌아오시면 좋은 선물이 될 거라 믿어."
"아기씨도 자신의 아버지를 응원 할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옥룡은 놀란 표정으로 북궁연을 바라보았다.
"아이를 가지신 것인가요?"
북궁연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해요, 언니."
북궁연이 엷은 미소를 머금고 옥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마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었다.
옥룡은 진심으로 그녀를 축하해주고 있었다.
사랑은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받아 주고 그 사랑을 나누어 주기로 한 언니였다.
검왕이 자신에게 와서 말을 했을 때, 이미 북궁연과 많은 의논을 한 다음이었다는 것을 북궁연과 만나고 나서야 알았었다.
"축하드립니다. 주모님."
나직하지만 쩌렁한 목소리로 우칠이 축하를 하자, 호난화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아기씨가 놀라잖아요."
북궁연이 아기를 가졌다는 말에 싱글벙글하면서 축하를 했던 우칠은 찔끔해서 호난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그게 제일 작은 목소리였단 말이요."
"흥, 목소리만 커가지고 눈치도 없는 바보, 여하튼 조용히 해요."
"아... 알았소."
우칠은 호난화에게 쩔쩔매고 있었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우칠이었지만, 이상하게 호난화 앞에서는 주눅이 들고 있었다. 특히 얼마 전 강제로 호난화의 방에 끌려갔다 나온 후부터 더욱 심해졌다.
그때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우칠이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둘만 아는 비밀이었다. 단지 우칠이 그날 방에서 나온 다음 이틀간 멍하니 넋이 나갔었다는 것을 매화단의 호위무사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여우같은 호난화에게 곰 같은 우칠이 완전히 먹힌 것이다.
우칠이 쩔쩔 매는 모습을 보면서 소홀과 북궁연, 그리고
옥룡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천하 최고의 고수 중 한 명이라는 우칠이 호난화에게 꼼짝 못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잠시지만 아운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 있을 때 검왕 북궁손우가 그녀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모두 여기 있었군."
"조부님 오셨어요."
북궁연이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하자, 뒤이어 모두들 검왕에게 인사를 하였다. 검왕은 조금 침중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은 뒤 우칠에게 서신 한 장을 주면서 말했다.
"자네는 이것을 가지고 지금 당장 권왕에게 달려가게. 중요한 문서니 간직하고 있다가 대전사와 겨루기 직전에 주도록 하게,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네."
검왕의 표정을 보고 그 문서가 얼마나 중요한 문서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들 궁금한 표정들이었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구천혈맹에서 목숨을 걸고 구한 문서일세. 반드시 대전사와 겨루기 직전에 전하도록 하게, 어서 출발하게."
"반드시 명대로 하겠습니다. 어르신."
우직한 우칠의 말은 믿음성이 있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주모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북궁연에게 인사를 하고 주춤거리던 우칠이 호난화를 보고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화누이 다녀오리다."
호난화가 조금 삐친 목소리로 말했다.
"흥, 그러던지."
우칠은 호난화가 삐진 것 같자, 우물쭈물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대체 자신이 뭘 잘못한 것인지 몰라서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화난 거요?"
"화 안 났어요."
더 화나 보인다.
"나... 나 가도 되겠소?"
버벅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호난화의 입가에 달콤한 미소가 걸렸다. 남자는 이렇게 한 번씩 길을 들일 필요가 있었다. 사실 지금 그녀가 우칠에게 화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단지 지금 헤어지면 오래도록 만나지 못할 텐데, 너무 덤덤하게 헤어지려는 그가 조금 얄미웠고, 마치 자기 자신만 헤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같아서 손해 보는 느낌이 들었기에 다소 화가 났을 뿐이었다.
그게 어디 우칠의 잘못인가?
잘못은 잘못이다.
여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죄.
그래서 짐짓 토라진 척 한 것뿐이었다.
남녀 관계라면 아이 수준인 우칠이 당황한 것은 당연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모두 즐겁게 웃으면서 우칠을 바라본다.
우칠은 괜히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시 한 번 호난화의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나 가도 되오?"
호난화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이리 와 보세요."
"헉, 뭐 ‥‥ 뭐가 문제 있소?"
"이리 와보시라니까요."
우칠이 엉거주춤 다가서자, 호난화가 달려들어 그의 입술에 냉큼 뽀뽀를 하였다.
쪼옥!
"잘 다녀오세요."
"헤헤..."
우칠이 풀어진 웃음을 머금었다가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민망한 표정으로 얼른 돌아서며 말했다.
"갔다 오겠소."
쌔앵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신법을 펼치던 우칠이 가로 누운 나무에 걸려 곤두박질하면서 그 앞에 있던 큰 나무에 충돌하였다.
"쿵" 소리가 나더니 제법 큰 나무가 뿌리 채 뽑아지면서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더욱 당황한 우칠이 허겁지겁 신법을 펼치면서 사라져 갔다.
"어머, 어머, 저걸 어째. 어디 안 다치셨을까?"
호난화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지켜보던 북궁연이 조금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보기에 나무만 심하게 다쳤을 것 같은데."
그 말을 듣고 모두 크게 웃자, 그제서야 호난화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모두들 웃고 있을 때 검왕만은 굳은 표정으로 우칠이 사라진 방향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우칠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북궁연은 검왕 북궁손우를 바라보았다.
"조부님?"
우칠이 가지고 간 서신이 혹여 아운에게 불리한 일일까봐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말거라! 내 너와 긴히 할 말이 있구나?"
북궁연은 갑자기 심각해진 검왕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그 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모두들 검왕의 말뜻을 알아듣고 조용히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옥룡은 자리를 뜨기 전에 검왕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 그를 바라보다가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그의 시선.
북궁연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깊숙한 곳의 초점이 흐려져있었다. 마공을 익히고 있는 그녀는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이 스쳤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그녀는 이상힌 느낌에 더 이상 인사를 못하고 돌아섰다.
모두 물러선 다음 검왕 북궁손우는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북궁연은 무슨 일인가 궁금한 표정으로 검왕이 말하길 기다렸다.
북궁연의 옆에 서 있는 검왕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무슨 일인가?'
문득문득 정신을 차렸다가 다시 기억을 잃으면서 또 다른 인성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맞아 북궁연, 권왕의 연인을 납치해야지.'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인성을 잃은 채, 목적성만 가진 또 하나의 검왕으로 차츰 변해가고 있었다.
검왕이 조금이라도 정신이 들 때, 절대고독을 조종하고 있는 야율초의 얼굴에 힘줄이 돋아났었다.
반각 정도의 시간이 더 흘렀을 때였다.
검왕이 갑자기 돌아서서 북궁연을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고 시선엔 초점이 없었다.
절대고독의 독성이 그를 완전히 잠식한 것이다.
"조부님."
북궁연은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검왕의 손이 북궁연의 혈을 점하려고 뻗어 나왔다. 북궁연이 가까스로 옆으로 피하며 물러서자 검왕의 감정기복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지마라! 이리 오너라!"
북궁연은 그 목소리를 듣고 검왕이 제 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대체 할아버님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이지?'
강한 의문이 들었지만, 그 의문을 해결하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당장 급한 것은 검왕의 공격을 피하는 것이었고, 아이를 지키는 일이었다.
북궁연이 다급하게 검을 뽑으려는 순간 검왕의 손이 매서운 기세로 그녀의 완맥을 잡아 왔다.
너무 눈에 익은 기술.
북궁세가의 대라구환수(大羅九幻手)였다.
한 번 펼치면 일수유에 아홉 번을 공격할 수 있는 금나수이자, 장법이었고 지법인 무공이었다.
북궁연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면서 왼 손으로 공격해 오는 검왕의 손을 후려치면서 다른 한 손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검왕은 자신의 조부이자, 십사 대 고수 중 한 명.
북궁연이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검왕의 손이 기묘하게 산개하면서 북궁연의 검을 낚아챘고. 뒤이어 발로 북궁연의 복부를 차 갔다. 북궁연은 다른 곳도 아니고 복부를 공격해 오자, 본능적으로 두 손을 휘둘러 배를 막아갔다.
'퍽 '소리와 함께 북궁연의 양 손이 검왕의 발과 충돌하였고, 그녀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해 뒤로 주르륵 밀려나고 말았다. 모성본능으로 인해 검왕의 발길을 막긴 했지만 그녀의 한 쪽 팔은 충격으로 인해 거의 부러질 정도로 크게 다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검왕은 북궁연에게 빼앗은 검을 버리고 자신의 검을 뽑아 든 채 벌써 그녀를 공격해오고 있었다. 북궁연은 다친 손을 생각하지 않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대라구환수를 펼치며 보법으로 검왕의 공격을 겨우 피해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 삼 합을 넘기기도 전에 위태로운 지경까지 몰리고 말았다.
북궁연의 시선이 절망으로 흔들릴 때 갑자기 검왕이 뒤로 물러섰다, 둘 사이로 옥룡이 뛰어 들었다.
마교의 무공을 익히고 있는 그녀는 검왕의 시선 깊은 곳에서 동질의 기운을 느끼고 혹시나 해서 뒤돌아왔던 것이다.
북궁연은 옥룡의 등을 마주하자 떨리는 가슴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옥룡이 뒤돌아보지 않은 채 소리쳤다.
"언니 여긴 제가 감당할 데니 얼른 피하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옥룡이 검왕을 향해 자신의 최고 무공인 적봉옥령신공을 펼쳤다.
북궁연은 그래도 성한 한 손으로 자신의 조부가 빼앗았다가 땅에 던져 놓은 자신의 검을 잡으며 말했다.
"지금 조부님은 제 정신이 아니지만 절대 고수 중 한 분이야. 내가 피하면 혼자서 막기엔 불가능해."
옥룡은 대꾸 할 사이가 없었다.
검왕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자칫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을 상황이었다.
옥룡은 입술을 깨물고, 자신만의 비전인 적봉옥령신공에 금기마공인 잠력대법까지 전부 끌어 올렸다.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붉은 기운이 어리면서 날카로운 기운이 검왕의 검기를 향해 밀려갔다.
"퍽" 두 개의 기운이 충돌하면서 옥룡의 신형이 뒤로 다섯 걸음이나 밀려갔다. 하지만 검왕은 뒤로 주춤거리며 겨우 두 걸음 물러 섰을 뿐이었다.
"크윽" 무리한 때문에 피가 식도를 타고 넘어오는 것을 억지로 집어 삼킨 옥룡은 상황이 다급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자신이 아무리 마공을 익혔고 잠력대법까지 펼쳤다고 하지만 절대고수 중 한 명인 검왕을 상대하기엔 벅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얼른 북궁연을 보고 고함을 질렀다.
"언니, 어서 피하세요. 그래야 나도 피할 수 있어요!"
북궁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우선 피하고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그녀도 마음 놓고 도망이라도 갈 것이다.
"으아아."
그녀는 전 내공을 모아 날카로운 교성을 지르며 신법을 펼쳤다. 그녀는 자신의 고함을 듣고 누군가가 와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고함은 그리 멀리 퍼져가지 못했다.
검왕과 또 한 명의 절대자가 공력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북궁연은 불과 십장을 가기도 전에 자신의 앞을 가로 막은 능유환을 만나야 했다.
검왕을 상대로 악전고투를 하고 있던 옥룡은 능유환이 나타난 것을 보고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순간 옥룡이 주춤하는 사이 검왕은 대라칠정검법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칠성연환좌(七星連環座)를 펼치며 옥룡을 공격했다.
일곱 가닥의 검기가 북두칠성의 방위를 점하며 옥룡의 사혈만을 노리고 공격해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절대고독으로 인해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펼쳐서인가 조금 초식이 아주 정교하지는 못했다.
옥룡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제 아무리 삼무룡 중의 한명이었던 옥룡이지만, 칠성연환좌는 대라칠정검법의 최고 정수였고, 그것을 펼치는 인물은 십사 대 고수 중 한 명인 검왕이었다. 초식이 조금 거칠다고 그 위력까지 아주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은 그저 굳어갈 뿐이었다.
막 그녀의 전신사혈을 유린하려던 검기가 씻은 듯이 사라지며 검왕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어느새 검혼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옥룡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처 ‥‥철 공자님."
검혼이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 모르지만, 여긴 내게 맡겨 놓고 우선 치료부터 하시오."
옥룡은 검혼의 말에 대꾸할 여유도 없이 신형을 날렸다.
능유환을 만난 북궁연이 위험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북궁연을 사지로 몰아가던 능유환은 갑자기 검혼이 나타나자 다소 당황한 기색이었다. 처음부터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작전이었지만, 그래도 이왕 시작한 것 임무는 완수하고 돌아가야 할 터였다.
'할 수 없다. 빨리 북궁연을 제압하여 돌아가자.'
능유환은 결심을 굳히며 검에 내공을 더욱 끌어 올렸다.
처음 북궁연을 막아서면서 칠절탈명검법의 은광섬과 팔황문의 절기로 그녀를 단 한 번에 제압하려 했었다. 하지만 북궁연 역시 대라칠절검법의 절초로 마주공격하면서 자신의 검초를 상대하였다. 강호무림에서 정과 사를 대표했던 두 개의 검초가 엉켜 들었었다.
한데 북궁연의 무공은 능유환이 생각한 것보다 강했다.
비록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대라칠정검법은 정교했고, 내공의 깊이도 소문 이상이었다.
그녀는 아운으로부터 불괴수라기공을 전수받고 내공까지 얻은 이후 많은 무공의 발전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십사 대 고수 중 한 명인 능유환을 이길 순 없었다. 능유환이 팔 하나가 없지만 북궁연 역시 왼팔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능유환은 단숨에 북궁연을 제압하지 못하자, 호승심이 크게 일어 자신의 최고 절기를 연이어 펼쳐 내었다.
"차르릉" 하는 쇳소리와 함께 북궁연은 자신의 검초가 풀어지면서 능유환의 검기가 자신의 목줄을 향해 찔러 오는 것을 느끼고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능유환의 검은 마치 북궁연의 목과 줄이라도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그녀가 움직이는 괘적을 타고 쫓아왔다.
겨우 세초를 막아 냈을 땐 이미 기진맥진하고 있었다.
힘이 풀어지고 검을 놓치기 직전에 옥룡이 능유환을 향해 달려들었다. 만약 조금만 늦었으면 북궁연은 변을 당했으리라.
능유환을 공격하는 옥룡은 적봉옥룡신공과 잠력대법을 극성으로 끌어 올린 상태였다. 제 아무리 능유환이라고 해도 한 손이 없는 상황에서 옥룡의 전 힘을 다한 공격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북궁연 또한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언제부터 자신이 후진들의 협공을 부담스러워 했단 말인가?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화가 났다. 자신의 팔을 가져간 아운에 대한 분노가 일었고, 그 분노는 바로 북궁연과 옥룡에게 이어졌다. 아직까지 북궁연을 사로잡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자격지심까지 생기는 능유환이었다.
능유환은 북궁연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빨리 제압을 한 후 데려가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북궁연의 무공은 적당히 상대하기엔 너무 강했다. 잠력대법까지 펼친 옥룡의 무공은 상상이상이었다.
북궁연을 공격하던 그의 검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탈명진천의 초식으로 옥룡을 공격하였다. 비록 왼팔로 펼쳤지만, 칠절탈명검법의 여섯 번째 초식인 탈명진천은 그가 알고 있는 무공 중 두 번째로 위력이 강한 비기였고, 왼팔로 펼치는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가장 위력적으로 펼칠 수 있는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옥룡의 손에서 펼쳐진 붉은 기운과 능유환의 검기가 스치듯이 비켜갔고, 그 사이로 다시 북궁연의 검이 질러갔다.
마치 갑자기 세상이 정지된 것처럼 세 사람의 그림자가 멈추었다가 빠르게 물러섰다.
북궁연은 겨우 검을 들고 서 있었는데, 어깨에 검상을 입고 피를 흘리는 중이었다. 능유환 역시 배꼽 위쪽으로 옷이 찢겨지며 제법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그를 습격했던 옥룡은 어깨와 배 쪽에 상처를 입었지만, 의연한 자세로 서서 무서운 투기를 뿜어내며 능유환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능유환을 공격해 들어갈 것 같았다.
북궁연 역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서서히 검을 들어올렸다.
능유환은 두 사람을 보고 더 이상 지체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특히 옥룡의 무공은 그로서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북궁연의 무공 또한 만만하지가 않았다.
두 손이 다 있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이미 한 손을 잃고 적응 훈련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지금은 빠른 시간에 두 사람을 제압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검왕의 내공 수준으로 보아 절대고독을 사용 할 수 있는 시간도 많지 않았고, 잠시 후면 무림맹의 고수들도 들이닥칠 것이다. 갑자기 허탈한 생각이 들었다.
손 하나를 잃고. 두 명의 후기주수조차 제대로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도 서러운데 무인답지 않게 암계를 펼치고 있었다. 당당한 무인으로서 세상을 풍미하던 칠사의 일인인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허허 팔을 잃었으면 명예라도 잃지 말아야 하는데, 조국과 민족이 무엇인지, 그도 역시 나에겐 족쇄가 되는구나.'
능유환은 옥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교의 무공인가? 대단하군. 역시 무사는 무예로써 당당하게 겨루어야 하는 것인데, 선배로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 하지만 나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서 어쩔 수 없었네. 이제 그 흉측한 암계는 깨졌으니 나는 이만 물러서겠네."
능유환은 그 말을 남기고 갑자기 사라졌다.
능유환이 사라졌지만, 옥룡은 그 자리에 묵묵히 서서 능유환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북궁연은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옥룡에게 다가와 말했다.
"동생 고마워.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어."
옥룡이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언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에요, 그 보다는 검왕 어르신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아요."
옥룡의 말에 북궁연은 검혼과 검왕 북궁손우의 대결을 바라보았다. 둘의 대결은 아주 치열했다. 하지만 흐름이 유연한 검혼의 초식에 비해 검왕 북궁손우의 검초는 매우 불안하고 매끄럽지 못했다.
이미 정상이 아닌 검왕이 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가 갈수록 심해지는 중이었다. 그 상황에서 북궁연과 옥룡이 힘을 합하자. 검왕은 십여 합을 견디지 못하고 제압당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고독의 힘이 약해지면서 희미하게 정신이 들기 시작한 검왕이 초식을 순간적으로 멈춘 것도 결전을 쉽게 끝낼 수 있는 원인이 되었다.
검혼은 검왕의 혈도를 점한 다음 다급하게 옥룡을 바라보았다.
그때 옥룡의 전음이 들려온다.
- 저를 걱정하지 말고 조용히 이곳을 떠날 수 있게 해주세요.
검혼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그는 옥룡의 평온해 보이는 표정 안쪽에 숨어 있는 그녀의 희미한 생명력을 본 것이다.
옥룡이 북궁연을 보고 말했다.
"언니 이곳은 언니에게 맡길게요. 저는 검혼 소협하고 잠시 갔다 와야 할 곳이 있답니다. 그리고 그와 할 이야기도 많고요."
북궁연은 옥룡과 검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검혼이 옥룡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가 몽고의 황족이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조금 걱정되는 표정으로 옥룡을 바라보자, 옥룡이 밝은 미소를 짓고 전음을 보냈다.
- 언니도 알다시피 검혼 공자는 저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는 지금 자신이 몽골의 황족이란 사실로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가 저를 찾아온 것은 할 이야기가 있어서겠지요. 그래도 그간의 정리가 있고, 제 생명의 은인이신 분이에요. 제가 잠시 시간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같이 가서 해결해야 할 일도 있고. 다녀와서 자세히 말해줄게요.
북궁연은 옥룡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슬프게 들려왔다.
분명히 말 못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물어 볼 수가 없었다.
북궁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옥룡이 검혼을 바라보자, 검혼이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장소저."
"알고 있습니다. 일단 이곳은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기엔 합당한 곳이 아니니 다른 곳으로 가죠. 이제 곧 무림맹의 무사들이 오면 서로 불편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검혼이 북궁연에게 예를 취하며 말했다.
"제가 장소저에게 불리한 일을 하거나 무례한 일을 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 공자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럼."
검혼의 말이 끝나자, 옥룡이 앞장서서 신법을 펼쳤다.
검혼이 그 뒤를 따른다.
달리던 검혼은 갑자기 날아온 물방울을 느끼고 안색이 굳어졌다.
옥룡은 단숨에 십여 리를 달린 후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검혼이 다가 온 순간 천천히 그녀의 신형이 쓰러지고 있었다.
놀란 검혼이 그녀를 안았다. 그녀의 입가로는 피가, 눈가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금 전 자신에게 날아온 물방울은 앞서서 달리던 그녀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장소저!"
장무린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검혼이 얼른 그녀의 맥을 잡고 그녀의 상태를 살피려 할때, 옥룡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내 몸은 제가 안답니다. 잠력대법은 나의 생명력을 담보로 펼치는 무공. 더군다나 계속해서 환환대법을 풀어 놓고있는 상태에서 너무 지나치게 사용했어요. 능유환의 마지막 검은 제 오장육부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제 내가 살수 있는 날은 얼마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습니다."
검혼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모습을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말하고 혹시라도 그녀가 함께 해준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산속에 묻혀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에도 그녀의 가슴엔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였다.
그녀가 그곳에서 쓰러지지 못했던 이유는 북궁연과 검왕에게 부담을 주기 싫었던 것이고, 그것은 결국 권왕 아운을 위한 배려였으리라. 그래서 당장 쓰러질 정도로 큰 내상을 입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으리라.
가슴이 아파온다.
그녀가 권왕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단 한번만이라도 자신을 봐주길 원했다.
"잘하시었소, 바보같이."
장무린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철공자님 말씀대로 제가 바보긴 한가 봐요.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 분 생각만 나니."
그 말을 듣는 검혼의 마음은 맥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철공자님, 염치없는 말이지만 죽기 전에 부탁이 있습니다."
검혼 철위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 의연하자, 의연해야 한다.'
"말하시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주리다."
무척 의연하고 담담하게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눈이 흐릿해지는 걸까?
"아운 공자님의 마지막 결전을 보고 싶습니다. 내 눈으로 직접 지켜보고 싶습니다.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 주세요."
"그러리다. 그러니 내가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견디시오."
검혼의 말을 들은 옥룡 장무린의 입가에 희미하게 웃음이 걸렸다.
'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살려놓으리다. 꼭 그렇게 하리다. 그러니 쉽게 죽지 마시오. 아운, 그렇지 권왕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도 제발 살아 있으시오.'
철위령은 기어코 떨어지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검혼은 그녀를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시간은 모자라지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달리지 않으면 자신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당장 초조해 하는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을 주고 싶었다.
지금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는 검혼의 모습은 그의 고통에 찬 비명과도 같았다.
전후사정을 들은 하영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인의 사정은 무인이 잘 아는 법이라고 들었어요, 마침 나군명 대협께서 아직 무림맹에 계시니 그 분에게 검왕 어르신의 상태를 살피게 하고, 빨리 사람을 보내 우칠 아저씨를 찾으라고 하세요. 그 서신은 오라버니에게 심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을 거예요. 다행히 결전 직전에 주라고 했으니 아직 시간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림맹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영영이나 북궁연 입장에서 보면 일이 이정도에서 마무리 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하영영은 무림맹의 맹주대행도 아니고 어떤 직책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무림맹의 무사들은 그녀의 말을 자연스럽게 따르고 있었다.
이는 그녀가 맹주대행을 하면서 보여준 능력으로 인해 많은 무인들에게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고, 또한 맹주인 권왕의 동생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첫댓글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1
잘봅니다^^
줄독
ㅈㄷㄱ~~~~~~~~```````````````````
즐감하고 갑니다.
두뇌싸움 정말 무섭다
ㅎㅎㅎ
사랑
감사합니다
즐감
잘 읽고 갑니다.
ㅈㄷㄳ
즐독...감사...꾸벅...빵끗...^^.
즐감하고갑니다
즐독...감사...
감사합니다
즐독요
감사...
권왕무적
즐감요~
사랑이 뭐길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