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프로그램 '세계의 역사'에서 미국의 5성장군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 ~ 1964)와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 ~ 1969, 후에 제34대 미합중국 대통령)편을 시청했다.
- 미국 역사상 5성 장군은 위 두사람을 포함 모두 7인이다 -.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 작전'과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아이젠하워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비교하면서 한국전쟁에 대한 대강의 브리핑도 함께 방영했다.
-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의 연합군의 승리는 나치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서유럽 해방의 첫 발걸음이 되었고,
이후 서부 전선에서의 연합군 승리와 나치 독일의 패망에 크게 기여한 전투로 평가된다.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1950. 6. 25. – 1953. 7. 27.)
미국이 이기지 못한 최초의 전쟁,
미군 180만 명이 참전, 37,000명이 전사.실종되고, 10만3284명이 부상당한 이 전쟁을 미국인들은
‘잊혀진 전쟁’이라고 부른다. 기억하기 싫은 전쟁이라는 의미이다.
2011년 7월26일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전쟁 기념일을 지정, 선포하며
'한반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고, 숨진 모든 이에게 한없는 감사를 표한다.
그들의 용기와 희생이 대한민국을 반세기 동안 강하고 번영한 나라로 만들었' 다고 치하했을 때,
이국 땅 한반도에서 죽고 다친 그들 20살 젊은이들은 이미 80이 넘은 후였다.
앙카라의 '한국공원'
튀루키예 수도 앙카라 중앙역(Ankra Gari)에서 도보로 약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한국전쟁 당시의
튀르키에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한국공원(Ankara Kore Şehitleri Anıtı)이 있다.
공원은 서울시가 1971년 8월 앙카라시와 자매결연 후,
튀르키예가 한국전쟁 당시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목숨을 바친 희생자들을 기리며 조성한 공원이다.
서울시는 1973년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 50주년에 맞춰서 이곳에 한국공원을 조성하여 앙카라시에 헌정했는데,
매년 6월 25일 튀르키예 주재 한국대사관과 튀르키예 참전용사협회에서 한국전쟁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트루키예는 한국전에 참전한 16개 UN군 중 미국, 캐나다, 영국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1만5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1950년 10월 17일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전 때까지 2만 1212명의 병력을 파병하여,
경기도 용인시 김량장리 전투와 판문점 동북부 네바다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튀르키예 병사들은 다른 외국군 희생자들과 함께 부산의 UN군 묘지에 안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앙카라에 한국공원 조성 후 유골들 일부를 채취하여 앙카라의 한국공원으로 이장했다.
전쟁 동안 전사자 756명, 부상자 2147명, 실종 175명, 포로 346명이 희생되었다.
전쟁이 끝나가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가 가까워왔음에도 튀르키예 군은 한국에 대한 걱정을 거두지 못하고,
고아원을 지어 전쟁에서 홀로 남은 아이들을 자식처럼 돌보고, 그 중 몇 명은 입양도 했다고 한다.
앙카라의 한국공원 입구,
한국과 튀르키예 국기 모양을 차례로 새겨놓았다.
우리가 한국공원을 찾았을 때 화단에는 정성들여 가꾼 꽃들이 피어 있고,
이른 저녁인데도 청사초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입장료는 무료이고, 3,000여평 부지에 팔각정과 공원 가운데에 4층 석가탑이 있었다.
한국식 팔각정 건물은 관리사무소로 사용되고 있는 듯 했다.
한국공원을 밝히는 청사초롱
석가탑을 형상화한 위령탑
공원 한가운데에 석가탑 모형의 위령탑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튀르키예 전사자 임시 무덤의 흙이 돌 상자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념물 양 옆으로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756명의 트루키예군 병사의 이름이 석판에 새겨져 있었다.
공원에 세워진 석판에는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756인의 튀르키예
군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석판에는 지구의 어디에 있는지도, 누가 사는지도 모른 채,
단지 자유를 지키라는 명령 하나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756명의 이름과
전사할 당시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었다.
19살, 20살, 21살!
남의 나라의 참혹한 전쟁터에서 죽기엔 너무 아까운 젊음 아닌가 ?
그들의 영혼이 애달퍼서였을까? 그들의 희생에 몸둘바를 몰라서였을까?
숙연해지며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한동안 석판을 쓰다듬으며 울었다.
그들의 젊음! 그들의 부모! 그들의 연인! 젊은 그들의 눈부신 희생..!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튀르키예가 한국에 지원군을 보낸 것은 나토에 가입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 동기가 어떻든 20대 전후의 젊은 이들이 이름도 생소한 이국의 참혹한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젊은 피가 한국 땅에 뿌려졌다.
가눌 수 없는 마음으로 공원을 나오며 방명록에 몇자 적었다.
'감사합니다, 우리땅을 지켜주셔서'...
나의 진심이 영혼이 되어 떠돌고 있을 756명 전사자의 마음에 가 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여행에서 우리는 튀르키예의 많은 곳을 보고 느끼고 맛있는 음식도 먹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그들은 ‘형제의 나라’에서 왔다며 어디서나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하지만 튀르키예의 아름다운 자연이나 유서깊은 유적지보다 여행내내 마음을 울린 곳은 바로 앙카라의
'한국공원'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한 동안 그곳에서 마주한 젊은 튀르키예 전사자들이 마음에 남아 가슴이 저릿했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으로 튀르키예를 더 아름다운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생존한 튀르키예 퇴역 군인들의 방한 인터뷰를 TV에서 본적이 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눈부시게 발전한 대한민국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그들은 눈물을 쏟았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가며 '폐허가 된 이 땅이 앞으로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는데,
잘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흘린 눈물이었다고 했다.
시간은 흐른다.
역사도 흐른다.
그것은 멈추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그 기억도 소멸되고 잊혀질 것이다.
튀르키예 강진, 금세기 최악의 지진 중 하나로 기록될 듯
6일 새벽 4시 17분 튀르키예 동남부에서 발생한 규모 7.8 강진이 일어난 직후 규모 7.5 강진이 또 발생했고
500여 차례의 대규모 여진이 계속 이어졌다.
이번 지진으로 최소 10개주 58개 마을이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20만여 채의 건물이 붕괴 되었다.
현재까지 이재민 3,000여만명, 사망자 수는 인접국 시리아까지 합쳐 53,000여명,
피해액은 120조에 이른다.
세계보건기구 WHO는 최악의 경우, 이번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20만 명을 넘을 수도 있다고 전했다
영국 BBC는 지진발생 24시간이 사실상 골든타임이고, 48시간이 지나자 저체온증으로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