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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25,6-10ㄱ
6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7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8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9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10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 4,12-14.19-20
형제 여러분,
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13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14 그러나 내가 겪는 환난에 여러분이 동참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19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20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2,1-1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1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대는 혼인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연중 제28주일입니다.
우리는 전 주일에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그 전 주일에는 ‘두 아들의 비유’를, 오늘은 ‘혼인잔치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세 비유의 배경은 모두 동일합니다.
곧 이 비유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을 정화하시자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권위에 대해 따져 추궁하자 들려주신 비유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수석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에게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잔치’에 대한 말씀입니다.
‘잔치’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더구나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혼인잔치’는 성경에서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기쁘고 결정적인 일치의 상징으로 쓰이며(마태 15,1-12), 구원과 그 기쁨을 의미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벌리시는 이 ‘혼인잔치’에 신랑은 그리스도이시며, 신부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교회입니다.
이 잔치에 차려진 메뉴는 평화와 자비, 사랑과 기쁨, 봉사와 순명, 정의와 진리 등으로 차고 넘쳐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주님께서 특별히 마련하시는 잔치와 그 풍성함을 드러내줍니다.
곧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벌어지는 이 잔치는 음식과 술이 풍성할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들의 너울이 벗겨지고, 죽음은 영원히 사라지고, 모든 사람에게서 눈물과 수치가 치워지는 잔치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 풍요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필리 4,19)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이상하게도 이 천상의 잔치에 초대받고도 응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심부름꾼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사실 그들은 하느님을 믿는 충실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렸던 종교지도자들이었으며 유대백성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초대에 응답한 이들과 응답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응답하지 않은 이들에는 또 다시 두 부류가 있으니, 자신들의 생업을 핑계 삼아 응답하지 않은 이들과 심부름꾼들을 붙잡아 때리거나 죽이기까지 하는 박해자들입니다.
이들 모두는 먼저 하느님께 초대를 초대받았으나 응답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선택받았으나, 세속적인 탐욕과 진리에 대한 곡해로 하느님의 초대를 거부하고 박해하였습니다.
비유에서 임금은 말합니다.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는 흔히 하느님을 임금으로 말합니다.
“혼인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이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
(마태 22,8-9)
이는 하느님의 초대에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으며, 누구든지 응하기만 하면 잔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구원은 인간적인 기준으로서의 선악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혜와 그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설령 초대에 응답했다 하더라도, 그에 합당한 예복을 갖춰 입지 않으면 잔치에서 쫓겨난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잔치를 베풀 때 반드시 대문에다 예복을 미리 준비해두었고, 이렇게 손님들이 예복을 입고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주인에 대한 각별한 예의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감은 주인을 모독하는 태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초대에 응했다 하더라도 예복을 갖추어 입지 않으면 다시 쫓겨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초대받은 자가 입고 들어가야 하는 예복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그러니 ‘아버지 뜻의 실행’이라는 예복입니다.
그것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거룩한 덕행의 예복이요,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말씀의 실천’이라는 예복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늘나라는 먼 훗날의 나라가 아니며, 하늘나라에로의 초대 역시 먼 훗날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초대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의 잔치 역시 먼 훗날의 벌어지는 잔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말씀의 잔치인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말씀의 옷을 입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오늘의 삶 한가운데서 말씀의 실현이라는 이 잔치가 구체화되고 실현되고 증거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의 예복을 갈아입고 이 은혜로운 잔치에 참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마태 22,12)
주님!
잔치에 합당한 자 되게 하소서.
찬미와 감사의 거룩한 예복을 갖추게 하소서!
행동하는 신앙, 실천하는 사랑, 꺾이지 않는 희망으로 당신의 갑옷을 차려 입게 하소서!
당신 진리의 옷을 입고, 빛을 살게 하소서!
기쁨의 옷을 입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관심과 무관심>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을 위해 잔치를 베푸시리라.”
오늘 독서는 주님께서 산 위에서 잔치를 베푸시고 민족들을 초대하는 얘기입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오늘 복음은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비유입니다.
이 둘을 하나로 묶으면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혼인 잔치를 산 위에서 차리고 모든 민족의 사람들을 초대하신다는 얘기인데, 복음에서는 이 잔치에 먼저 정중히 초대받은 사람은 오지 않아 벌을 받고, 길거리에서 불러온 뜨내기는 예복을 입지 않아 벌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오늘의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이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와 죽음을 앞둔 늙은이가 있는데 누가 이 잔치에 응하고 누가 거절할까?
이런 상상을 하다 보니 또 제가 자주 하는 질문이 생각났습니다.
천당 가고 싶으신 분 있으면 손드시라고 하면 모두 손을 드는데, 지금 당장 가고 싶으신 분 있으면 손을 드시라는 질문 말입니다.
이때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창창한 젊은이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 중 누가 손을 들고 누가 선뜻 손을 들겠습니까?
젊은이일까요?
늙은이일까요?
오늘 마태오 복음과 같은 내용의 루카 복음을 보면, 초대에 거절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방금 장가들어서 갈 수 없다고 하는데, 지금 자기 연애 사업이 한창인 젊은이가 남의 결혼 잔치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앞으로 행복하게 살려면 취직해야 하고 그래서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데, 이미 취직하고 결혼도 하는 다른 사람의 행복한 결혼 잔치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자기는 취직 못해서 결혼도 못하고 있고 그래서 이미 화가 나 있는데 다른 사람의 행복한 결혼 잔치에 오라고 하면 더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남의 행복한 결혼 잔치에 관심이 없고 오히려 화가 나는 젊은이는 늙은이보다 하늘나라의 임금님 아들 결혼 잔치에는 더욱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젊은이가 이런 것은 그래도 이해해줄 수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젊은이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초대받은 늙은이가 관심이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초대가 아직도 달갑지 않고, 아직도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들 걱정도 좀 더 하고, 손주도 좀 더 봐줘야 하고, 나는 아직도 이 세상에서 쓸모가 있으니 더 일해야 하고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문제지만 초대에 응하려고 해도 준비가 안 된 경우도 문제입니다.
갑자기 초대받고 얼떨결에 거절하지 못하고 가긴 갔는데, 혼인 잔치에 갈 예복이 준비되지 않아 그냥 간 경우입니다.
부조금은 없더라도 예복은 걸치고 가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하늘나라 혼인 잔치의 예복입니까?
돈입니까?
공로입니까?
이 세상 업적입니까?
제 생각에 마음입니다.
무관심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관심이란 무엇에 관한 마음인데 하늘나라에 관한 무관심이 아니라 관심입니다.
그래서 초대에 감사하는 마음이고, 더 나아가서 사랑과 갈망입니다.
하느님을 늘 사랑하고 하늘나라를 늘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초대받음을 기뻐하십시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십니다.
그리고 모두를 당신 구원의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구원에 이르는 문은 좁지만.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구원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합당한 준비로 초대에 응한 사람이라야 잔치의 기쁨을 나누게 됩니다.
이 시간, 부르심과 응답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로움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어렸을 때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도깨비 방망이’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금 나와라 와라, 뚝딱! 은 나와라, 와라 뚝딱!’ 하고 방망이를 두드리면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방망이지만 두드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요술감투’도 있었습니다.
그것 역시 쓰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재능이 많아도 끄집어내어 쓰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소용이 있게 됩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좋은 마음이 있어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라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런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구원으로 초대받았지만, 결코 아무나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초대에 합당히 응하는 사람이라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복음은 하느님 나라를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왕이 종들을 보내 초대받은 사람들을 잔치에 불러오게 했습니다.
소와 살진 짐승도 잡아 넉넉하게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그러나 초청받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초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또 어떤 사람은 종들을 때려주며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마음을 표현하기까지 했습니다(마태 22,5)
다시 말하면, 자기 살기에 바빠서 남의 집 잔치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불러준 사람의 호의를 무시하고 자기의 일상에 바빠 잔칫상을 외면했습니다.
이제 처음에 초대된 사람의 빈자리를 다른 사람이 채우게 됩니다.
그런데 나중에 초대받은 사람 중에도 예복을 입지 않아 꾸중을 듣게 됩니다.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마태 22,12)
결국은 그도 바깥으로 쫓겨났습니다.
여기서 예복이란 깨끗한 마음의 준비를 말합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은 잃었던 아들에게 새 옷을 입혀주심으로 방탕에서 벗어난 새 삶을 축복해 주십니다. (루카 15,22)
바오로 사도는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갈라 3,27)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을 통해 새 삶을 요구하고 계시는데 옷의 표현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마르코 2,21)
묵시록 7장 11절 이하를 보면 옥좌에 앉은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는데, 원로 가운데 하나가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묻자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하고 말합니다.
22장14절에서도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빠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권한을 받고, 성문을 지나 그 도성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복은 거룩한 마음을 지니는 것입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레위 11,44)
결국 초대에 응한다는 것은 그만한 마음의 준비가 따라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면 또 그만한 자비를 체험케 됩니다.
그러므로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부름에 응답하십시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했는데 이 핑계 저 핑계 대지 말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십시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마르 14,38)하신 예수님의 한탄이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합니다.
마음으로는 영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주님을 체험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위한 수고와 땀은 외면하는 게 현실입니다.
미사참례, 성체조배, 레지오 마리애, 성령기도 모임, 빈첸시오, 신심단체 모임등이 있지만 참석하지 않으면 그만한 은총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정말 은총은 풍부한데 담을 그릇이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잔치를 준비하고 초대하지만 역시 밭으로 가고, 장사하러 가고, 주일이나 지키면 되지 뭐 그런 것이 필요하냐고 하시는 분들은 은총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은총의 순간을 은총으로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실 믿음은 무엇을 우선순위에 놓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은총을 입기를 희망하면서도 신앙모임보다는 친목단체 모임을 더 소중히 생각하고 그것을 챙깁니다.
세상의 바쁜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앞세우면 주님은 그만큼 뒷전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내 것을 먼저 챙기고 그다음에 주님 것을 챙기려 한다면 도깨비 방망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두드리지 않는, 요술 감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쓸 줄 모르는, 재능이 있으면서도 쓸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마음은 있는데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게 하는 방해꾼이 있다면 그 장애물을 거두어 주십사 기도해야 합니다.
참으로 신앙생활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마태 22,14)
이 말씀은 구원의 문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지만 분명코 모두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추수 때에 알곡은 곳간에 쌓여지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지듯, 마지막 날에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누가 구원의 문에서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그 잔치에 들어가지 않아서 그 풍요로운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대에 응하는 단호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답하면,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필리 4,19)
또한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이사 25,8) 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일상 안에서의 부르심에 응답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성 베르나르도의 고백에 함께 하고 싶습니다.
“내 행복은 오직 주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뿐입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자크가 채워진 성경 안에 갇힌 예수님께서 열어주세요! 열어주세요! 하고 외치십니다.
뽀얀 먼지에 덮여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성체께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가운데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걸음마를 멈춘다는 말은 인간이 되기를 포기한다는 말과 같다>
세례를 받고 보통 1년 정도 뒤에 견진 성사를 받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며 견진 성사를 미루기도 합니다.
세례와 견진을 마치 별개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으면 견진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 예식에 이미 이마에 기름을 바르는 견진 성사 예식이 들어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것을 설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임금은 아드님의 혼인 잔치에 아무나 초대합니다.
처음 초대했던 이들은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우선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으려 하지 않고 그분을 죽였습니다.
이에 이방인들이 초대받게 됩니다.
그러나 혼인 잔치에 초대 받아 세례를 받은 이들 가운데서도 쫓겨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혼인 예복을 갖추지 않은 사람입니다.
혼인하는 날 잠옷 바람으로 왔다면 그것이 혼인 준비가 안 된 것을 증명해줍니다.
옷은 그 자리에 합당한 준비와 노력을 했음을 알려주는 표징입니다.
혼인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성체 성사를 의미합니다.
그 성체 성사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은 세례 받은 이들입니다.
세례 받은 이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몸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도 하나가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면 자신도 뛰어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믿음이 혼인 예식에 참여하게 합니다.
그러나 기어 다니는 아기가 자기도 부모처럼 두 발로 걸을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바로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과의 오랜 싸움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견진의 과정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는 세례를 받고 40년의 견진을 거칩니다.
그들은 이전의 파라오를 섬기기 위해 노예살이 했던 본성인 소유욕, 성욕, 지배욕을 포기하고 청빈과 정결과 겸손의 열매를 맺는 자신과의 싸움을 평생 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하지 않는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의 신부를 찾으라고 종을 하란 땅에 보낸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 부르심에 응답한 여인이 레베카입니다.
레베카는 착한 여인이었고 그래서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었지만, 또한 그의 종이 주는 옷과 장신구로 몸을 꾸며야 했습니다.
이사악은 레베카의 얼굴을 몰랐지만, 아버지 아브라함이 준 옷과 예물은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자기 처소로 맞아 들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종이 선물한 옷과 장신구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는데 피는 세례를 주며 물은 견진을 상징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죄를 끊을 결심을 하고 견진 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에 합당한 옷을 입습니다.
이 과정 안에서 수없는 넘어짐이 발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뱀에 물렸습니다.
파라오의 종살이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하느님께 불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들에게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방법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상징하는 구리뱀을 장대에 달아 그들이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들도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덴젤 워싱턴은 “앞으로 넘어지라”라고 말합니다.
대학에서 퇴학 당하고 군대에 들어가려고 생각하며 어머니 미장원에서 앉아 있을 때 한 손님이 종이에 이런 말을 적어줍니다.
“소년이여, 넌 세계를 돌아다닐 거야. 그리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거야.”
덴젤 워싱턴은 이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이루어질 때까지 수없이 넘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끝을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목적지를 정하는 것은 세례와 같습니다.
그리고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서는 견진의 과정을 거치며 자신이 세례 받은 사람임을 증명합니다.
그 다음은 자신에게 그러한 믿음을 준 이와 결국 하나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체 성사입니다.
같은 죄로 수천 번 고해 성사 하십시오.
이것이 세례 받았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혼인 예복을 만들어 입는 견진 성사를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걸음마를 멈춘 아기는 인간이 되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인간이 위대한 이유>
고단한 하루 일과를 끝낸 어느 저녁,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 안에서 빅터 플랭클이 겪었던 체험입니다.
죽도록 피곤한 몸으로 막사에 돌아온 수인들은 막사 바닥에 앉아 영양가라곤 기대할 것이 전혀 없는 멀건 수프 한 그릇씩 받아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뒤늦게 막사 안으로 들어온 동료 한 사람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빨리들 먹고 운동장으로 나가보세요. 지금 석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동료의 말에 다들 먹던 스프 그릇을 옆으로 밀쳐두고 운동장으로 나갔습니다.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조금씩 소멸되어 가는 태양의 장엄함 앞에 다들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적대자가 육체를 가두어도 영혼의 소유자인 인간을 그 어떤 열악한 환경 안에서라도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도 왕자처럼 누릴 것 다 누리고 행복하게 살아온 빅터 플랭클의 삶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극복하고 초월해서 하느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몸은 비록 부스러지기 쉬운 흙덩이처럼 나약하지만, 정신이나 영혼을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고 언젠가 하느님과 충만하게 합일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바로 그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는 것,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
그래서 마침내 하느님 가까이 다가서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이런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십니다.
친히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한상’ 잘 차려놓으셨습니다.
잔치를 손수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길거리로 나가셔서 이 사람 저 사람을 초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때로 두려워서, 때로 부끄러워서, 때로 얼굴을 들 수 없어서 어둡고 깊은 동굴 안으로 꼭꼭 들어가 숨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조차 다가오십니다.
애써 찾아오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애야, 괜찮다. 빨리 나오거라. 음식 다 식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영원한 생명의 잔칫상을 거나하게 잘 차리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당신이 총애하시고 애지중지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하느님 측의 열렬한 초대 앞에 이스라엘 백성 측의 반응은 냉랭합니다.
정면으로 대놓고 거부한 것입니다.
거절의 이유가 너무나 허무맹랑해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맨날 반복되는 밭일, 장사였습니다.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제1차로 선택받은 민족, 민족들의 으뜸이자 장자였던 이스라엘의 운명은 끝장나버렸습니다.
하느님 초대에 대한 거듭된 거절의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리는 이민족들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잘 차려진 잔치의 좌석에 앉은 사람들의 면면은 우리 인간들의 상상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100퍼센트 거기 앉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대사제들, 율법의 전문가들, 바리사이들은 단 한 명도 앉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정통 신앙인으로 자처했던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이신 포도나무의 원줄기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포도나무에는 이교 민족의 가지가 접목되어 기대하지도 않았던 포도 열매가 왕성히 열리게 된 것입니다.
먼저 불림받은 사람들,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 정말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월감 갖지 말고, 내가 1등이라는 의식도 갖지 말고 늘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노력할 일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혼인 잔치의 비유>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는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이고, ‘혼인 잔치’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 나라에서 누리게 될 행복과 기쁨을 상징합니다.
‘어떤 임금’은 하느님이고, ‘임금의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신랑이시라면 신부는 누구일까?
바로 우리, 또는 바로 나, 즉 신앙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요한 3,29)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
그러나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2코린 11,2ㄴ-3)
신랑이 예수님이고, 신부가 바로 ‘나’이기 때문에 그 혼인 잔치는 ‘남의 잔치’가 아니라, ‘나의 잔치’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 잔치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공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버지의 집’이고, 아버지의 집은 자녀의 집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는 우리나라이고, 우리 집입니다.
우리는 남의 집에서 벌어지는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에서 벌어지는 잔치를 가족으로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신앙인들이 ‘손님’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비유의 내용에 맞춘 표현일 뿐입니다.
‘초대’ 라는 표현도 뜻으로는 ‘신부가 되라는 부르심’입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신랑이신 예수님의 신부가 되라는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입니다.
응답한 사람은 신부로서 신랑과 함께 잔치의 주인공이 되지만,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은 잔치의 주인공이 될 수 없고, 아예 그 잔치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자기가 응답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비유의 전반부에 나오는 ‘잔치에 가려고 하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 또 하느님 나라와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현세의 삶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살다가 허무하게 사라질 사람들입니다.
비유의 후반부에 나오는 “길거리에서 갑자기 초대받아서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 하느님 나라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비유의 표현만 보고서,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유대인들로, 나중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이방인들로만 생각하면, 뭔가 많이 이상해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유대인들의 ‘대타’인가? ‘대역’인가?
만일에 유대인들이 응답했다면 이방인들은 부르심을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이고, 복음을 선포하신 것도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일입니다.
비유에는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우리는 ‘아무나’가 아닙니다.
그 표현은 ‘사람들을 모두’ 부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유를 단순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부르셨는데, 어떤 사람은 응답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응답했다고.
부르심과 응답의 순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는가?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버려지는 처지가 되었는가?”의 차이만 중요합니다.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혼인 예복’ 이야기는(11절-14절) “믿는다면 믿는 사람답게 살아라.”, “응답했다면 응답한 사람답게 살아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믿고 응답하는 일은 한 번 하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그리고 끝까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은 더 이상의 기회가 없는가?”
‘혼인 잔치의 비유’는 종말의 심판 상황에 대한 비유를 겸하기도 하니까, 비유 안에서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 말씀을 읽고 있는 ‘지금’이라는 시점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믿고, 응답하면, 그리고 신앙인답게 살면, 누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신랑과 함께 그 나라의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늘 나라 잔치에 초대 받은 삶 - "하느님의 자녀답게!">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시편 23,1)
오늘은 연중 제28주일. 전례력을 봐도 이제 한해가 서서히 저물어 가는 듯 싶습니다.
삶은 저물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물어가는 것이요, 노화의 여정이 아니라 성화의 여정이란 말이 고맙게 떠오릅니다.
“준비가 다 되었으니 잔치에 오라고 초대 받은 사람들에게 전하여라.”
어제 저녁기도 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이자 오늘 아침기도 성무일도 즈카르야의 노래 후렴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 잔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언젠가 죽어서 가는 하늘 나라 잔치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초대 받은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석관동 성서 백주간 공부하는 팀 23명이 오전 피정을 하고 떠났습니다.
미사중 퇴장 성가는 애국가 1절을 청했습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가사 내용이 있어 부를 때 마다 기도와 같고, 성가와 같은 느낌입니다.
또 예외없이 내 삶의 여정을 일년사계로 압축했을 때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점검톡록 해봤습니다.
거의 예외없이 가을 인생에 걸친 분들이었습니다.
이런 확인이 하루하루 선물같은 인생을 소중히, 환상이나 거품을 걷어내고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 잔치의 삶을 살게 합니다.
자주 즐겨 고백하는 예닮기도 중 한 연이 생각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그렇습니다.
눈만 열리며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하늘 나라 잔치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으로 시작되는 복음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바로 임금이 상징하는 바는 하느님이고 그의 아드님의 혼인잔치가 상징하는 바, 이 거룩한 미사잔치입니다.
이미 하늘 나라 잔치를 앞당겨 살라 선물로 주어지는 성체성사 미사잔치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일상의 평범한 삶의 자리에서 하늘 나라 잔치의 삶을 살게 합니다.
“고해인생” 중에도 “축제인생”을 살게 합니다.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하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을런지요.
셋으로 나눠 묵상했습니다.
첫째,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오늘 지금 내 삶의 자리가 하늘 나라요 초대받은 삶임을 자각하여 초대에 응답하여 기쁘게 감사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기 달랐습니다.
새삼 하늘 나라 잔치의 행복은 초대에의 응답이자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갑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임금이 보낸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니 무지의 극치입니다.
정말 무지에 눈먼 사람들이요 그 좋은 절호의 기회를 선택하지 못하고 놓쳐 버립니다.
그대로 무지한 인간의 실상을 보는 듯 합니다.
초대 받았다 하여 구원이 보장된 것은 아닙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참으로 감사하고 은혜롭게도 주님께 초대받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초대 받은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요?
둘째, 늘 하늘 나라 꿈을 희망을 생생히 지니고 사는 삶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를 사는 이들은 꿈의 사람들이요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모든 예언자들이 성인들이 바로 하늘 나라의 꿈과 희망을 생생히 앞당겨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실현하며 살았던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하늘 나라 꿈의 정체를 보여줍니다.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차려주신 하늘 나라 잔치이니 세상 모든 의인들에게 활짝 열려 있는 구원의 하늘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풍성한 하늘 나라 잔칫상의 모습입니다.
이어지는 묘사도 얼마나 고무적이요 위로와 힘이 되는지요!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 치워 주시리라.”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하늘 나라를 앞당겨 실현시켜주십니다.
무지의 너울을, 덮개를 치워주시고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회개한 우리의 수치를 치워주십니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든 성전에서 미사드릴 때 마다 다음 이사야 예언자의 가르침대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주님의 손이 여기 머무르신다.”
얼마나 멋진 고백인지요!
오늘 지금 여기 하늘 나라 삶의 자리에서 앞당겨 희망의 하느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하늘 나라 꿈의 실현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하늘 나라의 꿈이, 희망이 우리 삶의 원동력입니다.
셋째, 늘 깨어 하늘 나라 잔치에 맞같는 삶을 사는 노력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있는 삶입니다.
한두번 초대가 아니라 날마다 죽을 때까지 초대에 응답하는 삶이요 늘 예복을 갖춰입은 삶입니다.
초대받았다 하여 구원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선한사람 악한사람이 함께 공존하는 우리 삶의 자리요 하늘 나라 잔치의 교회 공동체입니다.
판단은 주님의 몫이고 우리는 각자 하늘 나라 잔치에 맞같은 삶의 예복을 입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던 자는 불행하게도 쫓겨납니다.
이는 자업자득 스스로 자초한 재앙이니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지요!
유비무환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내 삶의 예복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무슨 삶의 예복입니까?
진선미眞善美의 예복이요 신망애信望愛의 예복입니다.
산상수훈의 모든 가르침입니다.
죽을 때까지 늘 깨어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전우애戰友愛를, ‘주님의 학인’으로 학우애學友愛를, ‘주님의 형제’로서 형제애兄弟愛를 발휘하며 경천애인敬天愛人과 지구사랑의 삼중계명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멋진 모범이 제2독서 바오로입니다.
참으로 언제 어디서나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늘 나라를 앞당겨 살았던 참 멋진 대자유인 바오로가 우리의 영원한 하늘 나라 삶의 롤모델입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바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살만한 세상입니다.
주님이 계시고 교회 공동체가 있고 매일미사 하늘 나라 잔치가 있고 좋은 도반들이 있으니 살 만한 세상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하늘 나라의 행복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의 초대에 응답해 하늘 나라 잔치의 예복을 갖춰입고 다시 새롭게 하늘 나라 천국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시편 23,6)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며칠 전에 ‘하느님의 침묵’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북유럽의 어느 성당에 예수님 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상 앞에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상을 찾았습니다.
예수님 상에는 성당을 지키는 문지기가 있었습니다.
문지기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나는 매일 문지기로 있는데 하루만이라도 사람들이 기도하는 예수님 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문지기의 기도를 들은 예수님은 문지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오늘 나와 자리를 바꾸자.
너는 예수님 상이 되고, 나는 문지기가 되겠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사람들이 어떤 기도를 하던지 응답하지 마라.’
문지기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문지기는 예수님 상이 되어서 사람들의 기도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어느 부자가 돈 가방을 들고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는 도박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오늘 도박에서 큰돈을 벌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한 후에 돌아갔는데 그만 ‘돈 가방’을 놓고 갔습니다.
문지기는 가방을 가져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예수님과 한 약속이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에는 가난한 농부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아내가 아파서 병원에 가야하는데 치료비가 부족하다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데 ‘돈 가방’을 보았습니다.
농부는 그것이 예수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가져갔습니다.
문지기는 그 가방은 주인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예수님과 한 약속이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농부가 간 뒤로 한 청년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청년은 곧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야 했습니다.
청년은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다녀 올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청년이 막 나가려는데 부자가 돌아왔습니다.
부자는 청년이 돈 가방을 가져갔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자는 가방을 달라고 하였고, 청년은 자신은 가방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부자는 청년에게 경찰서로 가자고 하였습니다.
청년은 시간이 없어서 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참지 못한 문지기는 부자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가방은 가난한 농부가 가져갔습니다.’
부자는 농부에게 가서 가방을 찾았고, 청년은 바다로 나가 배를 탔습니다.
그렇게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화를 내시면서 문지기에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모든 일을 망치고 말았다.’
문지기는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내가 약속을 어긴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잘못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평화를 이루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문지기에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결국 돈 가방을 가지고 도박했고 가진 모든 돈을 탕진하였다.
농부의 아내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서 죽고 말았다.
청년은 결국 배를 탔지만 큰 풍랑을 만나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부자는 도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내는 치료를 받아 건강을 회복했을 것이다.
청년은 바다로 가지 않아서 목숨을 구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도 침묵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도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을 구원하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나가는 ‘부활’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 중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 중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침묵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도 좋지만 배고픈 사람이 언제든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은 어쩌면 우리가 시련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똑같이 감옥에 갇혔지만 어떤 이는 불평과 원망으로 시간을 보내지만, 어떤 사람은 밤하늘의 별을 세며 꿈을 키우기도 합니다.
감옥이라는 환경을 바꾸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런 감옥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용기가 더욱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난 과거의 실패와 잘못을 붙잡고 아직 오지 않는 걱정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 약속의 말씀을 간직하고 희망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비록 유배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처지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하신다는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시련과 고통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디딤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머물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힘든 사람들은 모두 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주님의 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인은 삶의 먼지를 헤아리며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 빛나는 한 줄기 빛을 찾아 나서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신경외과 의사가 쥐를 가지고 행복 중추에 관한 연구 실험을 했습니다.
먼저 쥐의 행복 중추에 전극봉을 삽입했습니다.
그리고 쥐들이 앞의 레바를 누르면 자기의 행복 중추를 자극할 수 있게 했습니다.
즉, 자기 행복(쾌락)을 스스로 선택하게 한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기 조절을 하면서 레바를 눌렀을까요?
쥐는 계속해서 레바를 눌렀습니다.
그런데 조금도 쉬지 않고 계속 누르는 것입니다.
결국 정신 없이 누르느라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쾌락에 사로잡혀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인간은 다를까요?
쾌락에 빠져서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합니다.
쾌락이 주는 기쁨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 역시 계속 쾌락 레바를 누르고 있습니다.
계속 행복감을 느낄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지독한 우울감에 빠지게 됩니다.
행복 중추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우울 중추가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 중추의 자극이 계속 강하게 주어지면, 바로 옆의 우울 중추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100% 행복으로 보이는 쾌락을 목표로 삼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쾌락에서 벗어나는 삶이 중요했습니다.
순간의 만족뿐인 것을 계속 가지기 위해 행복 중추 레바를 계속 누르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참 행복을 가르쳐주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의 뜻인 사랑에 집중하며 부작용 없는 진짜 행복을 만들어야 합니다.
임금이 종들을 보내서 왕자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초대장은 미리 보내는 것이 당시 풍속이었고, 임금의 손님이니 그 지위는 전혀 낮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잔치에 오지 않습니다.
임금이 다른 종을 보내서 다시 초대했지만, 이 초대에도 응답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 종들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임금의 권위를 부정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왜 그들은 있을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된 것일까요?
임금의 뜻이 아닌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살아야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임금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는 하느님과 사람들이 맺는 새로운 계약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초대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계약을 맺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임금이 군대를 보내서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리게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것이 더 좋다면서 이 초대를 무시하고, 하느님의 권위를 무시했던 것이 아닐까요?
또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은 예복을 입고 와야 하듯이, 하느님 나라의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고자 성실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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