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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하나님의 지혜로 풀어보기 (고전3-6)
2026년 7월 10일 (금요일)
찬양 :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본문 : 고전6:1-20절
☞ https://youtu.be/Bqt_-r0_8yU?si=MqYwPe1kl0sOLrCZ
어제는 목회의 선배되시는 부부와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모든 면에서 앞서신 두 분과의 만남은 늘 감동과 행복을 전해주어 우리 부부가 힘을 얻는 시간이 되곤 했는데 어제는 더욱 그러했다. 이런 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린다.
오늘은 아들의 35번째 생일을 맞는 날이다. 그간 나는 자녀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흘려주지 못하고 살아왔고, 도움이 되는 힘을 주지 못하고 주님께 맡기고 살았다. 주님이 맡기신 기업인데 내가 해야 할 역할을 하나님께 맡긴 채 방치해 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는 날이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고린도전서 6장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의 정체성이 무엇이며, 그것이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서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이렇게 선포한다. 19-20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기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온전히 하나님의 성전이 된 백성,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 법정의 논리와 육체의 본능을 거스르며 살아야 하는 유일한 이유이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이런 정체성을 가진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문제는 고발사건에 대한 방법이다. 1절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여기서 우리는 고린도전서가 1장부터 계속해서 지속하고 있는 세상의 지혜를 따르려는 욕망을 보게 된다. 왜 사람들은 세상 법정에 고발하고 있는가? 이들은 교회의 중재 즉 하나님의 지혜보다 세상의 법률과 판결이 더 정의롭고 실리에 유익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지혜보다 세상의 지혜가 더 낫다는 무서운 불신앙이 숨겨져 있다는 말이다.
이런 하나님께 대한 교만이 죄악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묵인하는 사건이 5장의 사건이라면, 6장은 이런 교만이 자신의 재산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형제를 세상 법정으로 끌고가서 망신을 주는 비정함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고린도는 상업 도시였고, 돈과 재산은 곧 권력이었다. 교회 내 형제간의 송사가 잦았다는 것은, 그들 내면에 '하나님 나라의 유업'보다 '세상 재물의 소유권'이 더 중요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이들은 교회 안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길을 버리고 내가 왜 내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가? 라는 세상적 태도로 십자가 지혜를 버렸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외친다. 7절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오늘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돌아보게 된다.
본문은 두 번째 문제를 제시한다. 15-16절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당시 그리스도인들 중에 성적 타락을 자연스러운 본능이라 주장하며 세상적 가치관을 고집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세상적 가치관으로 교묘히 위장하는 삶이었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매우 중요한 원칙을 제시한다. 13절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인간적 교만이 만든 인간의 지혜 즉 세상적 가치관은 물질적이고 본능적인 것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음식은 배를 위하여,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다는 논리로 말이다. 즉 음식을 먹고 배를 채우는 행위는 일시적인 생명 유지의 수단일 뿐 특별한 가치가 없다는 논리다. 이런 관점에서 성적 욕망을 채우는 것도 같은 논리로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이 폐하셨다고 선언한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카타르게오(καταργέω)’인데 <무력화하다, 기능을 정지시키다, 효력을 없애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의 삶에는 이런 기능이 정지되고 새로운 기능을 담게 되었다는 것이다.
<몸은 주를 위하여 존재하고, 주는 몸을 위하여 존재한다>
즉, 인간의 몸은 본능을 분출하기 위한 '배(belly)'와 같은 기능적 도구가 아니란 말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짐승처럼 본능을 분출하며 사는 삶에서 벗어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영원히 연합하는 '주님의 성전(Temple)'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배를 채우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전된 정체성을 묵상하게 되는 아침이다. 나는 배, 즉 욕망을 채우는 본능을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성령이 감당하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의 아름다움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임을 말이다.
삶을 산다는 것은 다양한 만남의 자리에서 다툼과 갈등이 존재하는 삶이며, 다양한 욕구의 요청을 채워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의 성전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분명한 사실은 내겐 세상의 지혜로 만들 수 없는 오직 성령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지혜는 평화와 기쁨과 영광과 하나됨을 통해 나를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한다는 사실이다.
내 몸은 본능의 분출구가 아니다. 나는 내게 당면한 문제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상이 만들 수 없는 평화를 세워가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다. 이 정체성을 가지고 이 하루를 살아보자. 그러기 위해 배를 채우는 분주함보다 주님을 채우는 평안이, 나의 권리를 주장하는 다툼보다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낮아짐이 우리 삶의 실질적인 증거가 되길 기도한다.
특히 아들의 생일인 오늘 하나님의 기업으로 맡겨주신 소중한 아들을 하나님의 소유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랑을 줄 수 있는 날 되기를 기도한다.
주님, 이 하루 다양한 문제 앞에 세상의 가치관이 올라오고, 욕망이 올라오는 삶이 바로 저의 삶임을 자백합니다. 땅을 밟고 사는 삶에서 이것을 피하고 살 수 없습니다. 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오늘도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로 또 하나님의 영광을 구현하는 자로 살아낼 수 있도록 성령으로 충만함을 주소서.
한줄 묵상 :
<우리의 몸은 본능을 채우는 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성전이며, 우리의 삶은 내 권리를 주장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현하는 현장입니다.>
적용질문 :
1. 오늘 만난 내 삶의 구체적인 문제는 무엇이며 어떻게 맞이하겠습니까?
2. 오늘 내가 마주할 갈등 속에서 '나의 자존심'을 세우는 대신, '하나님의 지혜'를 선택하기 위해 내가 지금 즉시 내려놓아야 할 권리는 무엇입니까?
3.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람과 일들을 '내 것'처럼 통제하려 했습니까, 아니면 '성전 된 자'로서 하나님의 지혜로 사랑하고 섬기려 했습니까? 오늘 그들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실천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