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國
함명춘
비행기는 아주 낮게 날고 있었다
그때 하늘의 문빗장이 풀린 듯 눈이 쏟아지고
기체가 몇 번 기울더니 굉음이 이어졌다
난 그만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보니
한 마리 사슴이 되어 사냥꾼에게 쫓기고 있었다
한쪽 발목은 부러지고 화살도 한 두어 방 맞은.
얼마큼 쫓겼을까 깊은 산속 누군가가 나를 구해주었다
파가 나오는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었다
하루 세끼 식사가 꼬박꼬박 나왔고
간식으로 지천에 깔린 적막을 꺾어 먹으면 되었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았다 질리지 않았다
나를 쫓던 사냥꾼은 나를 찾지 못하고 떠났다
내가 있는 줄 까맣게 모르고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세상으로 놓인 길을 다 지우고 있었다
책임도 기억도 내가 있는 줄 모르고 지나가고 있었다
온천에 앉아 찻잎처럼 오그라들었던 몸이
하나둘 풀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아갈 것만 같았다 난간을 꽉 잡았다
천천히 상처에 새살이 돋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 며칠, 나를 구해준 사람이 집을 비운 사이
눈에 파묻혔던 길들이 팔뚝에 힘줄을 새기며 떠올랐다
그 길로 사냥꾼이 풀어놓은 사냥개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나를 잊었던 시간도 컹컹 짖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나를 쫓던 사냥꾼이 나를 찾아낸 것이다
사냥꾼에게 포획된 난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칠수록 꼼짝할 수 없었고
아물었던 상처엔 다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때 난 그만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보니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비행기는 아주 낮게 날고 있었다
천천히 한점 눈조차 발 디딜 틈이 없는
철근 콘크리트 기둥들로 빼곡한 도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내 눈이 젖고 있었다
—《창작과비평》201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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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명춘 / 1966년 강원도 춘천 출생.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1991년 〈서울신문〉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빛을 찾아 나선 나뭇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