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상
정태익
처서가 지난지도 벌써 수 주일이 지났다. 단풍 든 감나무 잎이 한잎 두잎 떨어
지면서 귀뚜라미 소리도 잠잠해지는 새벽이다. 소슬바람이 잠을 깨운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다. 마치 청 보석 같이 아름답다. 동쪽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
면서 주위는 더욱 밝아온다.. 초생달이 빌딩 위에 외롭게 달려있다. 아! 이 맑은
느낌의 가을은 이렇게 내 곁에 와있다.
창밖에 펼쳐 진 가을을 만끽하면서, 내 마음은 어느새 초등학교 등교 길에 가
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우리 집에서 십리나 떨어져 있는 작은 읍에 있었
다. 오솔길 같은 통학로에는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 향기를 날리고, 청조
한 모습은 마음속 그 여인을 닮은 것 같다. 양옆에 펼쳐저 있는 들판은 황금물결
로 가득 차고 밭에는 메밀꽃이 구름같이 피어 있다. 그 위로 고추잠자리가 춤을
추면서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은 동화속 그림같다. 군데 군데 자리잡고 있는 과
수원에는 감과 배, 능금이 익어가고, 대추, 밤, 호두․ 석류, 산중의 달레, 으름이
풍성하다. 들판을 지나 강 언덕에 서니 실바람이 불어온다. 가을 강물은 금구슬
은구슬 같은 물결이 일면서 황홀한 광채를 발한다. 잔잔히 흘러가고 있는 강물
얕은 곳에서는 여위어 가는 가을 햇빛을 받으면서 낚시하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
보인다. 이 강은 형제 산이라고 부르는 두산에 협곡을 끼고 흐르는 형산강이다.
청정수의 강물이 흐르는 가을이면 이 강에서만 낚이는 고시내기(학명. 문절망등
이}라는 기수성어 가 많이 잡힌다.
강가에는 아낙네들의 빨래하는 모습도 보인다. 큰 돌 위나 풀 위에 널어놓은
빨래는 마치 모자이크를 한 그림같다. 건너편 언덕 위에서 보기 드문 승용차 한
대가 모래바람을 날리면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멀리서 좁은 궤도에 기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산허리를 돌아 사라지면서 기적에 여운을 남긴다. 주위를 둘러
싼 인근 산에는 단풍들이 각기 각색의 아름다운 옷을 갈아입고 있다. 한 폭에 그
림 같은 모습은 언제나 내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고향의 가을이다.
밭에서 익은 고추를 따는 어머니의 손놀림은 바쁘다. 황홀한 저녁노을 시시각
각으로 다른 모습으로 수를 놓을 때면 지붕 위에 널은 고추는 더욱 붉게 마르면
서 익어가고, 활짝 핀 박꽃은 수줍은 듯이 웃음을 머금으며 깊어 가는 황혼 속에
꽃잎을 움추린다.
이때면 대바구니에 가득 담은 고추를 이고 걸음을 재촉하시든 어머니의 모습
이 생각난다.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기시고 수건을 쓰신 뒷모습에서 험한 세상을
살아오신 강인한 자태를 볼 수 있다. 희고 균형 잡힌 얼굴은 현모양처의 모습이
다. 보통 여자의 평균키보다 크시며 개미허리 같은 허리를 가지시고도 그렇게 많
은 일을 쉬지 않으시며 일하시던 어머니! 40년의 시집살이를 인내와 덕망으로 이
겨내신 어머니, 이 가을엔 어머니가 더욱 그리워집니다. 어머니!
그해도 대풍년이 들어 오곡백화가 풍성했지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거의 매일 같이 신선한 배추를 파랗게 삶아두시고 "야야아! 미꾸라지 잡아오너
라” 하신다. 언제나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두말하지 않고 대바
구니와 대소쿠리를 들고 동생과 함께 집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들로 나가던
때가 엇그제 같다. 미꾸라지를 잡는 곳은 큰들 중간 마을 부근에 있는 방죽과 갈
대가 우거진 적은 연못가나 소류지로 정해져 있었다. 물이 늘 흐르는 작은 냇가
나 소류지의 맑은 물에서는 여러 종류의 고기가 잡힌다. 붕어, 뱀장어, 매기, 가
물치, 등이 잡히고, 잡초가 많고 흙이 검은 곳에서는 미꾸라지가 더 많이 잡힌다.
한 두 시간만 잡으면 어머니께서 만족해하실 만큼 두 사발 정도의 미꾸라지를
잡았었다. 싱글벙글 거리면서 동생과 함께 집에 들어서면 어머니께서는 거칠어진
손으로 등을 두드려 주셨다 “옳다, 됐다. 부지런히 잡았구나”하시면서 늘 크게
웃으셨다. 나는 그 웃음이 좋아 미꾸라지 잡는 일은 항상 즐거웠다.
어머니께서는 잡아온 미꾸라지에 소금을 넣고 호박잎으로 문질러 고기 비늘을
빼고 가마솥에 붓고 푹 삶으셨다. 고기가 다 익으면 채로 뼈를 추린 다음 순 살코기
만을 가지고 푸른 고추와 익은 고추, 마늘과 함께 잘 다져서 양념을 만들고 맛좋
은 된장을 잘 풀어 배추 시레기를 듬뿍 넣어서 오랫동안 푹 끓이셨다. 여기에 찐
쌀과 논두렁 콩을 넣어 밥을 지으시고,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둥그런 상 앞에서
올망졸망 일곱 식구가 앉아 어머니께서 끓여주신 미꾸라지 국과 함께 먹던 그
맛은 그야말로 천하일미였다. 빙그레 미소지으시며 자식들이 먹는 모습을 물끄러
미 보시느라 수저들 생각도 않고 계시던 어머니!
"미꾸라지 잡아오너라”고 하셨던 어머니의 목소리는 지금도 귀에 생생한
데........
창문을 두드리는 밤비가 온다. 후두둑 거리며 감나무 잎이 떨어진다. 가을이
깊어 가는 소리가 들린다. 가을이 인생의 70이 라면 나는 벌써 가을을 지나 겨울
을 앞두고 있다. 추억을 먹고사는 내 나이! 많은 추억이 생각나게 하는 가을이
나는 좋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풍성하다. 많은 사람들의 소망이 없는 어두운 상
념속에서 인생 무상을 생각할 이 나이에 나에게는 미꾸라지 국을 끓여주시던 그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소망이 있기에 이 가을이 나는 행복하다. 끝.
1998.11
첫댓글 가을이 인생의 70이 라면 나는 벌써 가을을 지나 겨울
을 앞두고 있다. 추억을 먹고사는 내 나이! 많은 추억이 생각나게 하는 가을이
나는 좋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풍성하다. 많은 사람들의 소망이 없는 어두운 상
념속에서 인생 무상을 생각할 이 나이에 나에게는 미꾸라지 국을 끓여주시던 그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소망이 있기에 이 가을이 나는 행복하다
가을이 깊어 가는 소리가 들린다. 가을이 인생의 70이 라면 나는 벌써 가을을 지나 겨울을 앞두고 있다. 추억을 먹고사는 내 나이! 많은 추억이 생각나게 하는 가을이 나는 좋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풍성하다. 많은 사람들의 소망이 없는 어두운 상념속에서 인생 무상을 생각할 이 나이에 나에게는 미꾸라지 국을 끓여주시던 그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소망이 있기에 이 가을이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