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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50년 된 ‘6.3운동’은 이제
Noblesse Oblige 실천운동으로 계승돼야!
민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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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학도 입장에서 본 6.3 운동
1. ‘6.3운동’의 의미 재조명
‘4.19 혁명’에 비하여 ‘6.3운동’은 상대적으로 저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흔히들 ‘6.3운동’을 ‘4,19혁명’의 여진(餘震)으로 생각하고는 ‘4,19혁명’의 아류(蛾類)
또는 성공하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끝나버린 학생운동으로 평가절하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는 ‘6.3운동’을 ‘4.19 혁명’과 마찬가지로 국내의 민주화 운동이라는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어 해석했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두 운동은 그 목적에서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그간 간과해 왔던 것입니다. 물론 ‘6.3운동’ 참여자들도 민주화에 대한 열정이 결코
‘4.19 혁명’ 참여자들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분들 모두가 바로 그 증인들인 것입니다.
우선, ‘4.19 혁명’은 기본적으로 내치(內治)의 민주화를 위한 운동이었습니다.
국민의 참정권을 박탈한 자유당 집권층에 대한 반발이었고 이를 쟁취하여 민주주의 질서를 바로잡자는 민주화 운동이었습니다.
그 발단부터가 그해인 1960년 3월15일에 있었던 정부통령 선거의 부정 투개표 문제였었고
데모의 주 구호도 ‘부정선거 다시하자’였습니다.
즉 국민이 선거를 통해 표시한 국민의 정치적 선택을 정부가 조작을 통해 결과를 뒤바꾼 것에 대한 반발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부의 범죄적 조작은 정부 자신도 알고 있었고 국민도 다 알고 있었던 것이어서
민주주의에 대한 계몽적 성격의 운동이 아니라 민주주의 실천을 위한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너무나 당연한 요구였기 때문에 ‘4.19혁명’은 비록 희생은 컸지만 정부는 수세적일 수밖에 없었고
국민들은 공세적이어서 참여자들에게는 결코 외로운 투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6.3운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6.3운동’은 내치문제가 아니라 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한 시정요구였던 것입니다.
즉 당시 진행되고 있었던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에서 우리정부의 자세와 회담내용이 굴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그 발단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매일의 생활 속에서 직접 경험하고 피부로 느끼게 되는 국내문제가 아니라
당시에는 국민들이 직접 경험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대외분야 문제가 ‘6.3운동’의 직접적 동기였다는 점에서
‘4.19혁명’과 달랐던 것입니다.
‘6.3운동’의 주 구호도 ‘굴욕적 한일수교 교섭 반대’였고 부 주제는 ‘매판자본(買辦資本) 물러가라’였습니다.
주 주제와 부 주제 모두가 국내문제가 아니라 대외문제와 관련된 것들이었습니다.
이어 ‘6.3세대’에 의해 제기된 또 하나의 중요 문제 역시 한-미 행정협정(SOFA)이라는 외국과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일반국민들에게는 일상생활과 직결된 문제들이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차이점은 정부가 ‘4.19혁명’때와는 달리 정부의 정책이 반드시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또 많은 국민들도 정부의 진압 방법에는 이의가 있었지만 사안 자체에 대한 태도는 양분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6,3운동’ 참여자들은 ‘4,19혁명’ 참여자들보다는 훨씬 더 험난한 역경을 겪으면서 이 운동을 전개했던 것입니다.
‘6,3운동’은 이렇게 국내 민주화 문제를 넘어서 외교문제에도 이제는 국민의 의사가 존중되고
반영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정부에게 그리고 우리 국민들에게 일깨워준 계몽적 성격이 강하게 있었던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정부는 대외문제에 있어서도 당당하게, 그리고 자주적인 외교를 하고,
국민들이 수용할 수 있는 대외관계를 수립하라는 운동이었기 때문에 민족주의 성격도 강하게 있었던 민족운동이었습니다.
즉 계몽운동이었고 민족주의 운동이었던 것이 ‘6,3운동’이었지 단순히 국내민주화만을 목적으로 한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4,19혁명’과 ‘6,3운동’은 그 성격과 목적에 있어서 크게 달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두 운동의 발생 시기가 매우 근접해 있었고 또 모두 학생들이 주동적으로 나섰다는 유사성 때문에
학생들이 주동이 된 광의의 민주화 운동이란 잣대로 그 의미를 해석했던 것이
오늘날까지도 ‘6.3운동’에 대한 저평가 또는 잘못된 해석이 발생하게 된 연유라고 생각이 됩니다.
6.3운동’은 국내 민주화 운동이었던 ‘4,19혁명’ 시에는 보지 못했던 국제정치적 측면을 새롭게 포착하고
전개된 운동이었다는 측면에서 근대국가형성 운동인 측면도 또한 있는 역사적인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6,3운동’은 ‘4,19혁명’과는 별도로 다른 의미를 부여 받아야하며
또 우리 역사발전에 있어서도 적절한 자리매김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역사발전의 관점에서 본 ‘6.3운동’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들은 국민이 중심이 된 정부를 체험 한 바가 거의 없고
또한 근대국가 형성과정도 제대로 거치지 못한 상태에서 나라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1948년 독립을 얻었을 때, 민주주의 실천 경험과 근대국가 운영 경험이 모두 많이 부족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근대국가 또는 민주정부라는 Hardware는 형식적으로 갖추었지만
그 운영에 대한 Software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4,19혁명’은 이렇게 민주공화국이라는 Hardware를 갖춘 대한민국의 내치가
민주적으로 통치되지 않고 있는 데에 대한 저항이었고 ‘6.3운동’은 이를 외치로까지 연장시킨
즉 근대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위상을 국제적으로 확립하려는 한 차원 더 높은 Software를 위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3운동’ 이전까지의 우리 일반국민들은 국제정치문제에 있어서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습니다.
또 이렇게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사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우물 밖 세계’의 문제에 대하여는 일반 국민이 아니고 소수의 전문가들이 담당해야 하는 성역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우물 안 개구리’들인 우리를 우물 밖 성역으로 뛰어오르게 한 것이 바로 ‘6.3운동’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4.19혁명은 우물 안 내부를 민주화하자는 정치운동이었다면
‘6.3운동’은 우물 밖의 국제정치문제에도 일반 국민들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국제적 규범에 맞는
근대화 운동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4.19혁명’ 시에는 못 보던 우물 밖의 세계를 ‘6,3운동’의 주동자들은 우물 밖의 세계까지도 본 선각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민주화의 폭을 4.19혁명으로 내치 분야를, ‘6,3운동’으로 외치 분야를 넓혀
근대화를 안팎으로 넓혔고 부족했던 근대화된 국가 모습을 갖추는 역사적 계기를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만약 ‘6.3운동이 이때에 없었다면 우리는 한참 더 ’우물 안 개구리‘로서 살았을 것이며
우물 밖의 세계인 해외로 활발히 뻗어나가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아직도 외국의 원조나 받고 외국 사람을 만나면 주눅이 들어 눈치나 보는 한국인으로 남아있을 가능성은 없었을까요.
가능했더라도, 더 늦게, 더 완만하게 진전되었을 것이고
대한민국이 오늘날처럼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 이러한 얘기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는 아주 생소한 얘기로 들릴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6.3운동‘을 경험한 세대들은 쉽게 이해가 되실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6.3운동‘을 계기로 우리국민들은 바깥세계에 대한 개안(開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며
’은둔의 나라‘였던 우리나라 대한민국 국민들이 우물 밖 세계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계기를 만들어 내는 사고(思考)의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일어난 것이지요.
그 후 사막의 나라 중동으로까지 우리 일반 노무자들이 두려움 없이 경쟁적으로 나갔고,
독일의 광산으로, 병원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해외로 나가서
외국인들과 치열한 경쟁을 마다하지 않는 민족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는 더 이상 은둔의 나라 조선의 백성이 아닙니다.
두려움 없이 해외로 진출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 그 전환점을 만든 것이 바로 ‘6,3운동’이었고
그 덕에 우리나라가 주변국가들 보다 빨리 근대국가로 변신한 나라로 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3. ‘6.3운동’을 이을 ‘제3단계 운동’의 필요성
유럽 선진지역에서 시발된 근대국가는 대체로 다음 세 가지 상황이 조성되었을 때,
비로써 국가로서의 기능이 제대로 효과적 작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 학계의 다수설입니다.
즉 국민국가 의식의 형성(Nation Building)이 이뤄지고 국민의 정치참여(Participation)가 가능해지고
국민이 적절한 경제적 이익 분배(Distribution)를 받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작동하는 정치체제라는 것이 정치학자들의 주장입니다.
1) Sidney Verba, "'The Meaning of Political Development: The Concept of Political Development",
Jason L. Finkle and Richard W. Gable, eds. Political Development & Social Change
(John Wileyt & Sons, Inc. New York, N.Y. 1971), pp. 40-51.
근대국가 성격의 특성에 관하여는 이용희, 미래의 세계정치(서울, 민음사, 1994) 참조
2)그러나 일부에서는 우리민족이 남북한으로 분리 통치되고 있어
아직은 Nation Building의 미완성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음.
선진 국가들은 대부분 이러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을 얻은 많은 신생국가들은 그러한 상황의 조성과 경험 없이 바로 근대국가라는 껍데기를 갑자기 썼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로 아직도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불안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모두는 조선사람(Korean)이라는 민족의식은 있어 왔기 때문에 Nation Building에는 큰 문제는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조선조 500년간의 왕과 사대부에 의한 통치로 일반서민들의 정치참여가 제도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의 정치참여 즉 Participation의 경험을 쌓을 기회가 없었으며
또한 부(富)도 이들에 의해 독점되었었기 때문에 분배 즉 Distribution의 혜택도 없었던 것이
대한민국 건설 직후까지의 우리나라 상황이었습니다.
즉 근대국가 형성에 필요한 세 가지 요건 중에 겨우 한 가지만 갖추고 나라라는 틀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의 우리의 정치적 굴곡과 사회적 불안은 미처 갖추지 못했던 이 나머지 두 가지를 갖추기 위한 투쟁이었고
혼란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중 ‘4.19 혁명’과 ‘6.3운동’이 담당했던 것이 바로 국민의 정치에 대한 참여 즉 Participation 문제였습니다.
이를 저는 ‘4.19 혁명’과 6.3운동’을 합쳐서 근대국가를 이루기 위한 ‘제2단계 운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제2단계 운동’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면 이제는 ‘제3단계 운동’이 전개되어야 할 시기입니다.
이것이 ‘4.19 혁명’과 6.3운동’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이 학설에 따르면 이제 우리는 Distribution 즉 분배문제에 당면할 차례인 것입니다.
이미 우리사회는 분배문제를 당면하고 있고 이를 둘러싼 진통을 오늘날 우리가 격고 있는 현안 문제라는 것은 여러분 모두가 다 느끼시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우리민족이 남북한으로 분리 통치되고 있어
아직은 Nation Building의 미완성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음.
이 문제 해결 없이는 우리나라는 근대국가를 완성하지 못한 나라로 남게 되어
사회적, 정치적 불안이 지속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당분간 우리는 이 문제로 홍역을 치르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따라서 이제는 ‘6.3세대’같은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들이 나서서 적절한 분배를 실현하기 위한
‘제3단계 운동’을 전개해야 할 시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Distribution 문제는 Participation 문제처럼 단일 잣대로 적정성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특히 오늘날 와해되어가고 있는 기존 국제정치의 틀과 그 구성원들인 국가들의 행위 규범이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상황 하에서는
단위로서의 국가 능력이 더욱 더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분배는 국가 전체의 능력 축소를 야기하지 않으면서 적절한 분배가 이뤄져야 합니다.
이를 실패하는 경우 라틴(Latin)계의 국가들에서 이미 발생하고 있는 국가부도의 위험성이
우리에게도 도래할 수 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나 이 문제도 꼭 학생이 주도해야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정부가 나서고 부유층이 나서고 정치권이 나서는 사회 상층부의 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큰 후유증 없이 이뤄질 수 있는 것이며 만약 사회 하층부 운동으로만 전개된다면
엄청난 고통과 후유증이 불가피하게 초래될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사회지도층이 이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헌신적 노력을 기우리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입니다.
최근의 대기업 임원들의 연봉 공개 조치와 이를 공기업 및 공공기업으로도 확산시키는 운동의 전개 등을 ‘제3단계 운동’의 방향으로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우리사회의 지도층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노블리제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실천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도록 하는 운동으로 ‘6.3운동’이 계승될 때,
‘6.3운동’은 우리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운동으로 남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민병석/명지대 교수, 문화일보 논설위원 역임/전 駐체코 대사/국제정치학 박사(신시내티 대학원)/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