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라벨의 음악공부와 초기작품
철도 기술자였던 라벨의 아버지는 한 때 음악가가 될 뜻을 품을 정도로 대단한 음악 애호가였으며, 라벨은 그런 아버지의 음악적 소질과 예술적 감성을 물려받았다. 일찍이 아들의 음악성을 발견한 아버지의 영향 아래에서 라벨은 이미 1882년, 6세 때부터 귀(Henri Guys)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는 1887년 르네의 문하에서 화성학과 대위법 그리고 작곡을 공부했으며, 2년 후인 1889년, 그의 나이 14세때 파리국립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와 화성학을 각각 베리오와 쁘사르에게서 배웠다.
입학한 해에 라벨은 드콩브의 제자들과 가진 연주회에서 피아노 협주곡으로 첫 공개연주를 했는데, 이때 이미 유능한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학기말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서 화성학 강의에서 제적당하고 피아노 시험도 통과하지 못해서 1895년에 음악원을 떠났다가, 2년 후인 23세에 재등록했다. 결국 파리국립음악원에서 라벨이 보낸 기간은 총 16년이나 되며, 그것은 다른 작곡가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긴 견습기간이었다.
음악원에 입학한 해인 1889년에는 라벨에게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파리만국박람회로, 여기서 라벨은 자바의 가믈란음악을 접하게 된다. 이 음악의 이국적인 음계와 음색은 라벨뿐 아니라 드뷔시를 비롯한 다른 프랑스 작곡가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또한 드뷔시, 샤브리에, 사티 그리고 림스키-코르사코프와 같은 당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들은 것도 잊을 수 없는 중요한 경험이었다. 이 시절의 라벨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음악가로는 스페인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비녜스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작곡가로서의 라벨을 완성시키는 데 기여했던 사람들이다. 라벨은 비녜스를 통해 탐구정신을 경험했고, 샤브리에에게서는 프랑스의 전통에 추가되는 스페인의 정서를 전수받았으며, 사티에게서는 새로운 화성법의 가능성을 배웠고, 림스키-코르사코프를 통해서는 관현악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드뷔시에게서는 철저한 애국주의를 본받았다.
1893년, 라벨이 샤브리에 그리고 사티와 가진 개인적인 만남은 그의 초기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며, 이는 1895년 이전의 작품 즉, 라벨이 파리국립음악원을 떠나기 전까지의 작품들에서 드러난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샤브리에로부터 영감을 받은 피아노곡 <그로테스크한 세레나데>(1893년)와 사티의 영향 아래서 마레의 시에 곡을 붙인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곡<죽은 사랑스런 여왕의 발라드>(1894년)가 있다.
1895년, 그의 초기 작품들에서는 이미 작곡가의 스타일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 해에 작곡한 작품으로는 뒤파르끄의 <애가>를 연상시키는 베를렌느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어둡고 거대한 잠>과 피아노곡 <고풍스런 미뉴에트>, 그리고 라벨의 양식과 독특한 개성이 잘 드러나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인 <하바네라>가 있다. 이들 중 마지막 곡인 <하바네라>는 드뷔시보다 앞서서 독특한 스페인 춤곡의 리듬을 사용한 작품으로, 후에 그의 관현악곡 <스페인 광시곡>(1907~08)의 3악장으로 편곡되어 1930년에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기도 했다. 특히 음악적인 내용으로 볼 때에, 이 작품의 여러 요소들은 그가 1918년에 러시아의 발레를 위해 관현악으로 편곡(1937년 출판)한 샤브리에의 <화려한 미뉴에트>를 본받은 것이며, 화성적으로는 라벨 고유의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음해인 1896년에 라벨은 두 개의 가곡-말라르메의 시에 곡을 붙인 <성녀>와 미로의 시에 곡을 붙인 <에스피넷뜨를 연주하는 안느>-을 계속해서 작곡했다. 이들 중 <에스피넷뜨를 연주하는 안느>는 작곡가들이 16세기 후반 르네상스의 7인의 시인들의 작품을 음악으로 사용한 출발점이 된 곡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작품은 상징주의에 심취된 심정이 잘 드러나는 작품인 <마로의 두 편의 경구>(1899년)의 두 번째 곡에 속하게 된다.
1897년, 다시 음악원으로 돌아간 라벨은 포레에게서 작곡을, 그리고 제달쥬에게서는 대위법과 푸가 그리고 관현악법을 배웠다. 이들 스승은 라벨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격려와 예술적인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들로부터 받은 영향은-라벨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그의 음악세계를 완성하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기간은 작곡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도전의 시기로 평가되는데, 특히 대담성과 불확실성이 혼합된 양상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이러한 성격의 그의 학구적인 작품들의 특징으로 남아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1897년),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종소리 사이에서>(1897년), 르꽁뜨 드 릴의 시에 곡을 붙인 성악곡 <물레의 노래>(1897년)와 베르아에렁의 시에 곡을 붙인 성악곡 <서글픔이여!>(1898년), 그리고 관현악곡 <세헤라자드, 환상적 서곡>(1898)이 있다. 이들 중 <세헤라자드, 환상적 서곡>은 23세의 라벨이 갖고 있던 관현악법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으로, 젊은 작곡가가 신봉하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그리고 <종소리 사이에서>는 이미 1895년에 작곡된 <하바네라>와 함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작품 <귀로 듣는 풍경>으로 완성된다. 또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는 작곡가가 이듬해에 작곡할 첫번째 관현악곡인 < 세헤라자드,환상적 서곡>을 예견하고 있으며, 특히 라벨이 1914년 그의 스승 제달쥬에게 헌정한 피아노 삼중주를 예시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1899년에 이르자 라벨의 음악에서는 종종 고풍스런 소재의 처리가 자신감 있게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 결과 마로의 시에 곡을 붙인 <나를 눈 속에 던진 안느>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등이 세상에 소개되었다. 나중 곡은 그 당시 라벨이 드나들던 살롱의 여주인 폴리냑 대공부인을 위해 만든 작품으로, 작곡가는 젊은 공주가 한 때 스페인의 궁전에서 추었을 파반느를 회상하면서 이를 자곡ㄱ했다. 또한 이 작품은 1910년에 작은 관현악곡(플루트2, 클라리넷2, 파곳2, 호른2, 오보에1,하프1,현악기)으로 편곡되어, 1911년에 카젤라에 의해 초연되었다. 라벨 자신은 이 작품을 가혹하게 비판하면서, 샤브리에로부터 지나친 영햐을 받은 작품이라고 평했다.
1897년 이후는 그가 작곡가로서 경력을 쌓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로, 그의 음악들은 이때부터 연주회장에서 연주되기 시작했다. 작곡가로서 그가 청중과 처음 만난 것은 1898년 3월 5일에 연주된 <귀로 듣는 풍경>을 통해서였으며, 이 곡은 청중에게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같은 해 4월에 <고풍스런 미뉴에트>가 비녜스에 의해 초연되었으며, 1899년 5월에는 라벨 자신의 지휘로 <세헤라자드, 환상적 서곡>이 초연되었다. 이들 연주회는 비평가와 대중으로부터 좋은 평을 얻지 못했으며, 마지막 곡인 관현악곡에는 '어설픈 표절'이라는 평이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드뷔시는 <하바네라>에 대해 흥미를 보였고, 라벨 역시 자신의 음악에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특히 작곡가로서의 경력이 출판 목록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고풍스런 미뉴에트>는 1898년 에노흐에 의해서, 그리고 <마로의 두 편의 경구>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1900년 드메에 의해서 각각 출판되었다.
그가 음악원에서 보낸 16년은 그에게 깊은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으며, 이 ㅣㅅ기의 영향은 그의 작품에 폭넓게 반영되어 있다. 특히 스승 포레의 가르침과 독려가 그에게 준 영향은 그가 이어서 작곡한 피아노곡 <물의 장난>(1901년)과 <현악4중주 F장조>(1902~03년)가 헌정된 스승의 이름을 통해서도 충분히 감지된다.
1901년에 라벨은-비록 1900년에는 예선에서도 실패를 했지만-로마 대상에서 칸타타<Myrrha>로 2위에 입상했다.
이 칸타타는 오페라적인 감성이 담겨있는 작품으로, 그 드라마틱한 요소가 이런 종류의 음악의 대가였던 마스네에게 상당한 호감을 갖게 했다. 또한 이 해에 작곡한 피아노 곡 <물의 장난>은 이듬해에 비녜스에 의해 초연되었는데, 20세기의 피아노 연주법에 새로운 장을 연 이 작품은 "피아노의 고음에서 독창적인 음향을 구사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랑하는 선생님 가브리엘 포레에게' 헌정된 이 곡에 대해 작곡가 자신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작품 안에는 내 미래의 작품에서 발견될 피아노곡을 위한 작곡법의 모든 아이디어가 담겨있다."
특히 코르토는 "라벨은 피아니스트의 환희와 다채롭게 반짝이는 피아노연주법의 비밀 그리고 인상주의의 투영과 리스트가 표현하고자 했던 광채 등을 다시 찾게 해주었다"라고 평한 바 있다. 라벨은 이 곡의 영감을 온갖 물소리(폭포, 분수 그리고 시냇물 등)에서 얻었다고 고백했는데, 실제로 물소리를 묘사한 피아노 음악에서 라벨의 경지를 넘어서는 작곡가는 별로 없다.
계속해서 라벨은 1902년과 1903년에 각각 칸타타 <알씨온>과 <알리싸>를 가지고 로마대상에 도전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더욱이 1905년의 콩쿠르에서는 지정곡인 합창곡과 푸가 부문에서 학구적인 자세를 무시하고 규칙을 이탈하는 작곡으로 예선에도 통과되지 못했다. 이미 진보적인 음악계에서는 그의 작품이 높이 평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심사 대상에서 제외된 이 사건은 상당기간 많은 화제를 낳았고, 이로 인해 결국 음악원장이 사퇴하게 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라벨의 스승인 포레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런 불명예가 오히려 라벨에게는 30세의 명성을 몇 년 앞당겨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20세기 작곡가 연구I(음악세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