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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1,16-25
형제 여러분,
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17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18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19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21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22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23 그리고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24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망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25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37-41
그때에
37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38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39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에 일어난 일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당혹스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루카 11,38)
왜 그렇게 놀랐을까요?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의식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위생상의 관습이나 예의였을 뿐 아니라, 나아가 세상과 접촉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정결례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기셨기 때문에 그들은 놀랐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는 바리사이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루카 11,39)
이는 진정한 ‘정결례’는 겉을 씻는 일이 아니라 속을 씻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음식에는 “팜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 11,39)고 하십니다.
이는 단지 속을 씻는 일이 겉을 씻는 일보다 낫다는 것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속에 담고 있는 것을 정당하게 취득한 것인지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곧 불의와 착취, 부정과 탐욕, 이기와 사악함을 동시에 질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속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 또 그것들을 어떻게 채웠는지, 왜 채웠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단지 이러한 사실을 깨우쳐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깨끗해지는 방법도 말씀해 주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루카 11,41)
이처럼 더러움을 비워내는 길, 깨끗해지는 길은 형제와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임을 말씀하십니다.
착취와 사악으로 가득 채운 속을 비우는 방법은 바로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정결법이라는 율법의 본래의 정신이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곧 ‘정결법의 정신’은 깨끗하게 씻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습니다.
그러니 속에 있는 것을 비워낸다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 비워지고 깨끗해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 마음 안에 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2코린 4,7) 으로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 5,5)
그러니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놀랍고 신비로운 것은 그 사랑을 베풀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를 명심해 새겨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루카 11,41)
<오늘의 말·샘 기도>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루카 11,41)
주님!
제 속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탐욕으로 채운 것을 사랑으로 나누게 하소서!
제가 온전히 깨끗해지고, 당신 얼굴 뵙게 하소서!
제 속에 당신의 뜻을 품고, 당신의 향기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더럽히는 것과 깨끗하게 하는 것>
더럽히는 것과 깨끗하게 하는 것.
공교롭게도 오늘 독서와 복음 모두 더럽히는 것과 깨끗하게 하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가?
그전에 무엇이 더러운 것인가?
제 생각에 더러움이란 죄의 더러움일 것입니다.
이력서로 치면 이력서에 범죄의 이력으로 이력서가 깨끗하지 않고 지저분한 거지요.
그러므로 인간을 죄짓게 하는 것이나 인간을 더럽히는 것은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을 더럽히는 것입니까?
음식과 관련한 조상들의 전통과 관련하여 주님께서는 복음의 다른 곳에서 이미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지요.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사람 밖의 먼지나 오물이 우리의 손이나 발을 더럽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안까지 더럽게 하거나 마음이나 존재를 더럽힐 수는 없지요.
그래서 오늘 주님이나 바오로 사도 모두 욕망 또는 탐욕을, 사람을 더럽히고 죄짓게 하는 것의 하나로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망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제 생각에 욕망은 욕구와 욕심 사이의 징검다리입니다.
욕구는 인간의 본능과 같아서 욕구 자체를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식욕이 있는 것이 어찌 죄이겠습니까?
성욕이 있는 것을 어찌 죄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욕구 자체는 죄가 아니고 먹고살도록 또는 후손을 잇도록 하느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도 악이 아닙니다.
돼지와 돼지고기가 무슨 악이고 죄짓게 하는 것입니까?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다 선이 아닙니까?
좋은 것들이기에 그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죄의 씨앗이고,
욕망이 욕심과 탐욕으로 발전하여 그것을 자기 소유로 한 것이 죄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참으로 개탄할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문화가 이 욕망을 정당화하고 부추긴다는 것이고, 우리 마음 안에서 사랑 대신 욕망이 자리하게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교황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기쁨>에서 지적하시며, 오늘 바오로 사도와 주님 말씀처럼 복음이 그리고 사랑이 이 욕망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라고 하시고, 그러면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속에 담긴 것, 그것이 뭡니까?
욕망입니까?
사랑입니까?
사랑이 욕망을 정화하게 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천국의 곳간이 채워질 것이다>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예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사랑을 실천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겉모양을 깨끗이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즉 자선을 베풀게 됨으로써 깨끗해집니다.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
(성 요한 비안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선을 되도록 많이 해야 합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성베드로 솔로그)
올바른 지향으로 하느님을 위해서 자선을 실천함으로써 마음을 거룩하게 하시길 바랍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외적인 더러움을 씻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거나 마시는 그릇을 깨끗이 씻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겉모양의 깨끗함보다는 내면의 정결이 더 중요합니다.
모든 불의와 부도덕한 행위에서 정화될 때 그 사람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깨끗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외적 정결함을 강조하고 중요시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은 잘 가꾸지 못했습니다.
거짓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들, 안 보이는 속은 내버려 두고 겉꾸미는 사람들, 말과 행실이 다른 사람은 그릇을 닦는 일보다 마음을 닦는 일이 우선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외적인 규정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혼자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주 하느님은 속마음을 들여 다 보시니 여러분의 마음이 하늘을 향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선을 숨겨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마태 6,4)
얼굴도 이쁘고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 둘 중의 하나가 부족하면 천만다행, 둘 다 부족하면 설상가상이랍니다.
그러나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마음을 잘 가꾸는 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위선으로는 지속할 수 없는 행위가 하나 있다 >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안 좋은 생각을 품습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율법이라기보다는 관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꼬집습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나쁜 욕망으로부터 깨끗해지는 방법도 제시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세 범주로 나뉩니다.
모든 행위는 ‘욕구’에 의해 발동됩니다.
인간의 기본 욕구는 ‘생존 욕구’입니다.
곧 더 가지고 더 먹고 더 세지려는 욕망입니다.
아기들의 모든 행동은 이 생존 욕구에 기인합니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행위가 첫 번째 범주입니다.
두 번째 범주는 그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오는 방어기제입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이 하는 행동들입니다.
곧 손과 접시를 깨끗이 씻는 행위입니다.
이것으로써 그들은 자기들이 깨끗함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이는 속이 더러움을 감추기 위한 위선입니다.
두 번째 범주의 행동은 첫 번째보다 더 안 좋습니다.
본인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남을 속이는 것은 물론이요 본인들도 속기 때문입니다.
본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본인들은 남들보다 깨끗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스스로 나아질 기회를 잃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행동은 첫 번째에 속했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었으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위선적 행동으로 깨끗해질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구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범주는 생존 욕구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동입니다.
이러한 목적이 그 사람을 깨끗하게 만듭니다.
교회에서는 그 방법으로 기도와 단식과 자선을 하라고 권합니다.
생존 욕구에서 벗어나려는 목적으로 하는 기도와 단식과 자선은 모두 그 사람을 깨끗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어떻게 인간이 깨끗해질 수 있는지를 몸소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단식을 제외하고 ‘자선’만을 강조하실까요?
사실 기도와 단식은 위선적인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행위로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기도는 오래 하고 단식하며 힘든 얼굴을 하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자선만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망은 욕망의 가장 근저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도 십일조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자선을 베풀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것에서 재산에 줄어드는 모습을 보고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 중 어떤 누구도 매일 기도할 수 있고 매일 단식할 수 있는 사람은 있어도 매일 자선을 베풀어 성인들처럼 가난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재물이 욕망의 근저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선악과를 바치는 것, 곧 십일조를 바치는 것, 제때 소출의 일부를 주님께 드리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영화 ‘황시의 아이들’(The Children of Huang Shi)은 1930년대 중국의 진실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1937년 중국에서 일어난 일본군의 침략 중에 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합니다.
중심인물인 영국 기자 조지 호그는 특종을 잡을 욕심에 일본군의 무자비한 난징 학살 현장을 취재하던 종군기자입니다.
그는 일본군에 붙잡혀 사형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잭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지만 부상으로 돌아갈 처지가 못 된 그는 안전한 ‘황시’로 몸을 피합니다.
황시에는 고아원이 하나 있었는데 60명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조지는 처음에는 고아들을 위해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아이들과 가족 같은 관계를 맺게 됩니다.
또한 그는 아이들을 안전한 장소로 이동시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700마일을 걸어가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 여정 중에 그는 아이들을 위험에서 보호하려는 노력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교육도 제공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를 통해 조지는 단순히 기자에서 아이들의 보호자, 교사, 그리고 친구로 변모하게 됩니다.
이 여정을 통해 조지는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며, 고아들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진정한 사랑, 희망, 헌신에 대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사람의 내면의 변화와 성장,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인간의 강인함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욕심은 사랑할 때 사라집니다.
자선이 그만큼 강력한 힘을 얻는 이유는 바로 ‘사랑’에 가장 근접해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도와 단식도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 악한 욕망의 반대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선은 사랑에 근접합니다.
그래서 저절로 악한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쉰들러는 돈만 아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유태인들을 돕기 위해 자기 재산을 쓰다가 결국 재산을 다 잃고 맙니다.
그런데도 마지막에 자기 차를 팔지 못한 것, 금 배치를 팔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그것을 팔았더라면 몇 명은 더 구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욕망은 재물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재물로 얻은 기쁨이 재물에 대한 욕심을 사라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선은 그만큼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데 강력한 무기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손을 잘 씻고 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름 위생 관념이 철저했습니다.
손이건 발이건, 그릇이건 제구건, 틈나는 대로 씻고 또 씻었습니다.
아마도 전염병이나 피부병 앞에 취약하던 당시, 걸리면 죽음이었으니 나름 최선의 예방책으로 그렇게 씻어댄 것 같습니다.
제 어린 시절 돌아보면 씻는 것과 관련해서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제대로 씻는 것은 일 년에 두 번 추석과 설날, 동네 목욕탕 가서 빡빡 씻는 것뿐이었고, 여름이 오면 동네 개울가에서 물장구치며 겨우 몸에 물을 대는 정도였습니다.
팬데믹 이후 전국민적인 손 씻기 열풍이 불어 저도 이제 수시로 손을 씻는 편입니다.
그런데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몸에 밴 습관처럼 뽀드득뽀드득 손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저와 같이 볼일을 보신 영감님들 칠팔 명이 단 한 명도 손을 안 씻고 우르르 나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 제 입에서는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처럼, ‘세상에 어떻게 저럴 수가!’ 하는 탄식이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사실 손을 자주 씻는다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특히 다양한 종류의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이 시대 손 씻기는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식사 전후, 외출 전후, 작업 전후 손 씻기는 이제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질타하시는 것은 오로지 손 씻기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옆에 사람이 숨이 넘어가든 말든, 손 씻는 관습에만 혈안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틀과 형식 율법에만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우리 각자에게 자유 의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억압이나 부자연스러운 제도나 관습, 대상들로부터 초월할 수 있는 역량을 부여해주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 공동의 유익과 선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른바 규정이요 메뉴얼, 더 나아가서 법규요 헌법입니다.
그러나 그런 제도적이고 법적인 요소들은 다른 무엇에 앞서 인간의 유익과 선익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법적인 요소들이 강조되면서 웃기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보다 인간다운 삶, 사람을 살리기 위해 제정된 법이나 규정들이 점점 강화되고 경직되면서, 나중에는 마치 부메랑처럼 인간을 힘들게 하고 고통 속으로 몰아가는 대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율법 규정들, 특히 안식일 규정, 정결례 규정이 더욱 그러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혹시라도 내 안에, 우리 가정 안에, 우리 본당 공동체 안에, 직장 공동체 안에서 그런 위험 요소들은 없는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구성원 서로 간의 우애를 돈독하게 해주기 위해 제정된 룰이 오히려 관계를 파괴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안겨주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곰곰이 살펴봐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겉과 속이 모두 똑같이 거룩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라는 말은 “정결예식을 행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라는 뜻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정결예식은 많이 복잡한 예식이었는데(마르 7,3-4), 율법이 아니라 바리사이들만의 규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규정은 레위기에 있는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레위 11,44) 라는 계명에 근거를 둔 것이었습니다.
즉 정결예식은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깨끗하다’는 ‘거룩하다’와 뜻이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의 정결예식을 행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가 놀랐다는 말은 그가 예수님을 자기들과 같은 부류의 랍비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우리와 같은 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라고 생각한 것.
정결예식과 관련해서 바리사이들이 잘못 생각한 것은 두 가지인데, 몸만(겉만) 깨끗하게 씻으면 거룩해진다고 생각한 것도 잘못이고, 자기들은 이미 ‘거룩함’에 도달한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것도 잘못입니다.
몸만 씻으면 거룩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음’이고, 자기들은 이미 ‘거룩함’에 도달한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마음대로 자처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리고 겉만 거룩하고 속은 그렇지 않은 것은 ‘위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잔과 접시’는 눈에 보이는 몸,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생활 모습과 말과 행동 등을 뜻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이라는 말씀은 “너희는 겉으로는 ‘거룩한 사람들’로 보이지만”이라는 뜻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님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마태 23,5-7)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거룩하게 보이는 옷차림을 했고, 말과 행동도 그렇게 품위 있고 경건하게, 즉 거룩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 겉모습만 보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거룩한 분들이라고 생각했고, 항상 윗자리에 모셨고, 장터나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공손하게 인사했습니다.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라는 말씀은 “겉으로 거룩하게 보이는 것은 겉모습일 뿐이고, 너희의 내면은 ‘거룩함’의 반대쪽에 있는 ‘부정함’과 ‘악함’으로 가득 차 있다.” 라는 뜻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있다고 해서 거룩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말과 행동을 점잖고 품위 있고 경건하게 한다고 해서 거룩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영혼과 정신과 삶 전체가 거룩해야 거룩한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라는 말씀은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은 속일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바리사이들의 겉모습만 보고 바리사이들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속도 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들이 거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속에 담긴 것”은 “탐욕과 사악으로 모은 재물”입니다.
“자선을 베풀어라.” 라는 말씀은 단순히 불우이웃 돕기를 잘하라는 뜻이 아니라, 예리코의 자캐오가 했던 것과 같은
실천을 하라는 뜻입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루카 19,8)
이 말은 사실상 전 재산을 내놓겠다는 뜻입니다.
재산의 반은 사랑 실천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반은 보속으로 사용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자캐오가 정말로 다른 사람 것을 횡령했는지, 했다면 얼마나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떻든 그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재물을 모두 포기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자선은 탐욕과 사악을 씻어내서 속을 깨끗하게 한다.” 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진심으로 회개하고 보속하면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사랑을 실천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참으로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라는 뜻입니다.
한 가지 더, “속이 거룩하면(깨끗하면) 겉은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겉과 속이 모두 똑같이 거룩해야(깨끗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나의 속은 깨끗하고 거룩하다.” 라고 큰소리치면서 아무렇게나 말하고 행동하고, 아무렇게나 옷을 입는 것은, 대단히 예의 없는 짓이고, 그것도 또한 어리석은 교만이고 위선입니다.
사실 속이(영혼과 정신이) 정말로 깨끗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도 않고, 함부로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 - 예수님이 궁극의 답이다>
"우러러 당신 손가락이 만드신 저 하늘이며
굳건히 이룩하신 별들을 보나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시편 8,4-5)
오랜만에 가을밤 하늘에 선명한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보니 기분이 좋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 지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과 지혜의 사람이 하느님의 관상가입니다.
그동안 강론에서 참 많이 다뤘던 주제가 무지입니다.
참 어리석은 무지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부정적 정의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말씀이 인간의 본질이기도 하지만 무지의 힘도 참 막강합니다.
평화를 추구하지만 역설적으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잔인하고 어리석은 전쟁입니다.
문명시대라 하지만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문명의 야만시대입니다.
그리하여 죄도 많고 병도 많고 사람들도 날로 사악해지는듯 합니다.
지혜로운 듯 하지만 참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입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인간의 탐욕, 분노, 잔인함, 폭력, 보복, 질투, 교만, 허영, 어리석음 등 그 뿌리에는 무지가 있습니다.
모두가 궁극엔 무지에서 기인하는 병이요 죄요 악입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지혜, 하느님의 사랑뿐입니다.
그동안 무수히 반복하여 나눴던 “행복하여라”로 시작된 참행복 선언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의로운 사람들!”
“행복하여라, 지혜로운 사람들!”
“행복하여라,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
생각나는 대로 열거해 봤습니다.
바로 하느님이 참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찾는 간절함이 무지에 대한 답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참행복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뿐임을 깨닫습니다.
결론하여 하느님의 지혜이자 하느님의 사랑인 예수님뿐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충실함이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이겠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예수님이 무지에 대한 답임을 입증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을 꾸짖으시는 예수님입니다.
똑똑한 듯 하나 실로 어리석은, 헛똑똑한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입니다.
지식은 많았을지 몰라도 지혜는 없었습니다.
무지에 눈이 가렸습니다.
무지의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 그리고 하느님의 지혜이자 사랑인 예수님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특징은 본말전도, 주객전도, 표리부동의 위선적 사람들입니다.
안팎이 같은 진실함이 없습니다.
모두가 지혜와 사랑이 결핍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식사전에 손을 씻지 않자 깜짝 놀라는 어느 바리사이입니다.
손을 씻으면 좋겠지만 때로는 잊을 수도 있습니다.
관행이라 하지만 결벽증 환자가 아니라면 그리 놀랄일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답이 정곡을 찌릅니다.
이들의 무지와 위선을 폭로합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지혜의 빛같습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지요?
말씀을 통해 찬연히 빛나는 주님의 지혜와 사랑입니다.
지혜와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뿌리를 둔 한 실재의 양면입니다.
탐욕과 사악의 무지한 인간들, 또한 부정적 인간현실입니다.
만인의 참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의 지혜로운 처방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혜이자 하느님의 사랑이심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이심을 입증합니다.
아무리 위장해도 속은 저절로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자선을 통해 속을 비워내면 저절로 속은 깨끗해지기 마련입니다.
속이 깨끗하면 겉은 저절로 깨끗해지기 마련입니다.
속이 깨끗하면 겉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선이야말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이요, 하늘에 보물을 쌓을수록 속은 비워지고 깨끗해지기 마련이요, 겉 역시 저절로 깨끗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런 이들이 정말 지혜와 사랑의 사람들이요 하느님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비단 자선뿐 아니라 모든 선행과 사랑의 수행 역시 속을 비워 겉과 속을 깨끗이 하는 일이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참 아름답고 지혜로운 삶입니다.
이런 안팎이 같은 진실한 사람들이 참으로 겸손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숨긴 것이 없는 투명한 삶이니 하늘을 우러러 두려울 것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고, 불안할 것도 없고, 또 세상 어느 것들에도 소유되어 노예된 삶이 아니니 참으로 자유롭고 넉넉하고 평화롭고 기쁘고 행복한 삶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무지로 인해 자초한 대부분 불행이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면 저절로 따라 오는 행복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로마서는 ‘복음의 힘’과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진노’라는 두 소주제로 이뤄졌습니다.
복음의 힘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의 힘이요 지혜의 힘, 사랑의 힘입니다.
이를 하나로 종합한 분, 예수님 자체가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를 참으로 진실하고 겸손하게, 자유롭고 행복하고 부요하게 하는 복음이신 예수님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의 열화와 같은 강론은 인간 무지에 대한 지탄입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지만 바보입니다.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 달린 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꿨습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입니다.
아멘.”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지혜와 사랑의 하느님 자리에 우상들을 둔 참 어처구니 없는, 어리석은 무지한 사람들의 현실은 여전히 오늘도 계속됩니다.
무지의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 지혜와 사랑의 결정체인 예수님뿐입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을 사랑하여 일치의 삶을 살았던 성인들이 참 사랑과 지혜의 증인들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도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107년경 순교한 사도교부로 성 요한 사도의 제자이자 성 뽈리카르보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주교를 중심으로 교회의 일치를 강조한 “일치의 박사”인 성인입니다.
그가 로마로 압송될 때 보낸 7통의 주옥같은 편지중 감동적인 한 대목만 소개합니다.
“나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나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두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갈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이 맹수라는 도구를 통해서 내가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제물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순교에 대한 갈망은 그대로 주님께 대한 사랑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성인은 같은 편지에서 순교의 고통을 영원한 생명을 위한 출산으로 표현합니다.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새생명이 태어나듯이 순교의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 안에서 새로 태어난 부활의 기쁨을 얻게 된다 해서 순교한 날을 “천상탄일”의 축일로 지내는 전통도 성 이냐시오로부터 기인합니다.
참으로 무지에 답은 궁극의 답은 하느님의 지혜이자 사랑인 예수님이자 예수님과 일치를 이뤘던 성인들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읽은 성녀 소화 데레사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사랑의 행위로서 마지막 숨까지 성녀의 입술위에 늘 있었다.
성녀는 그의 방앞에 써붙였다.
‘예수님은 내 단 하나의 사랑이시다(Jesus is my one love)’.
그것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4;8.16)에 대한 탁월한 해석이었다.”
무지의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일치의 예닮의 여정중인 우리에게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의 일치를 통해 우리 모두 무지의 어둠과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날로 자유롭고 행복한 참나의 하느님의 자녀로, 빛의 자녀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저자 혜민 스님의 ‘완벽하 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책의 내용 중 일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뭔가를 이 야기할 때, 상대로부터 옳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내 말을 잘 들어주길 바랄 때가 많아요.
누군가 나에 게 이야기할 땐 섣불리 조언하려 하지 말고, 상대의 이야기 연료가 다 떨어질 때까지 들어주세요.
상대를 내 마음에 맞게 바꾸려 하지 않고 따뜻한 관심으로 바라보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사랑의 가장 순수한 표현입니다.
바꾸고 싶어하면 상대의 모습은 사라지고 내 기준으로 만들어낸 상대의 문제만 보여요.
진정한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 같아요.
내 마음에 맞는 부분 이외에 내 마음에 맞지 않는 부분이 좀 있더라도 그것들을 모두 품어줄 수 있을 때, 좋아하는 감정이 사랑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잘 안다 하고 보면 더 이상 상대를 보려고 하지 않아요.
‘내가 잘 모른다’하고 볼 때 상대를 자세히 보려고 해요.
그래서 사랑은 ‘잘 모른다’하고 보는 상태예요.
혹시 주변 사람들을 내가 이미 잘 안다고 여기는 건 아닌지 다시 한 번 살펴보세요.
‘잘 안다’ 하고 보는 것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고 내 과거의 생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가끔씩 ‘저를 잘 안다’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 제 마음은 저도 잘 모르는데 그분들은 어찌 저의 마음을 잘 아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제가 4년 만에 한국으로 휴가를 가는 것은 미국이 좋아서일 수도 있지만 코로나 팬데믹도 있었고 신문사의 일이 바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가 해산물을 좋아하는 것은 해산물 자체가 좋은 것도 있지만 질긴 고기를 잘 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머니를 닮아 치아가 튼튼하였다면 고기를 더 좋아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주어진 과제를 미리 하는 것은 부지런해서일 수도 있지만 미리 해야만 편안하게 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남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사실 혼자 있는 것이 편할 때가 많습니다.
새벽에 기도하고, 아침에 산보하고, 좋아하는 책 읽고, 혼자 식사하는 것도 좋습니다.
돌아보면 저도 저의 좁은 판단으로 쉽게 남을 평가하고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저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와 다른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맞습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복음서를 읽으면 예수님을 ‘잘 안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모님을 알았고,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것은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것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과 표징으로 ‘복음’을 전한 것도 몰랐습니다.
빙산의 일각처럼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족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걱정이 되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나의 어머니이고, 나의 형제이며 자매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모두 나의 어머니이고, 나의 형제이며 자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라고 하셨을 때입니다.
베드로는 펄쩍 뛰면서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율법과 계명에 대해서는 전문가라고 자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잣대와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판단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형식을 문제 삼으려는 바리사이에게 율법의 정신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겉으로는 친절한 척하고, 웃으면서 뒤로는 남을 험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남을 돕는 데 인색한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욕심 때문에 형제와 다투는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참된 신앙생활을 이야기 합니다.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위로와 기쁨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칭찬과 격려의 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따뜻한 말, 친절한 말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갑곶성지에 처음 소임을 받아 갔을 때, 큰 나무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몇 그루의 큰 나무가 있기는 했지만, 그 숫자가 너무 적어서 휑하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데, 어느 신부님께서 작은 벚나무 15그루를 심으라면서 성지에 놓고 가셨습니다.
이 15그루 만으로 이 횅함을 없앨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래도 신부님께서 특별히 신경 써서 보내주신 것이라서 정성껏 심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다시 성지에 가게 되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심었던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벚나무가 너무 크게 잘 자라 있는 것입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미래에 큰 결실을 볼 수 있습니다.
씨앗을 심어야 나무 한 그루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별것 아니라는 생각보다는 지금 당장 작은 씨앗 하나 심는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작은 습관도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어떤 과자 광고 문구 중에 ‘손이 가요, 손이 가, ***에 손이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딱 하나 먹고 나면, 이를 멈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스마트폰도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메시지 확인을 위해 무의식적으로 스마트폰을 보면,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뉴스도 보고, 인기 영상도 보고, SNS 등도 확인하면서 오랜 시간을 스마트폰 만지작거리는 데 시간을 쓰게 됩니다.
작은 악습도 멀리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별것 아니어도 이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이라면, 미래를 위한 과감한 시작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해 놓고, 유다인의 관습대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그분의 모습을 불편하게 쳐다보는 바리사이의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찬 모습이 아닌, 자선을 통해 더러워진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주일 미사 참석 한 번 한 것으로 신자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생각한다면, 또 교회 안에서는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가정이나 사회 안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사는 것이 바로 겉과 속이 다른 모습입니다.
따라서 가장 기본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선, 바로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십니다.
이 사랑이 나의 마음 전체를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주님의 뜻이기에 아주 자그마한 것이어도 가장 큰 결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교우가 제게 말씀하십니다.
성당에서 반갑게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에 더 성당에 오고 싶다고 하십니다.
성당 의자에 편안히 앉을 수 있도록 배려하시는 모습에 ‘역시 신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십니다.
자기 아이가 성당에서 시끄럽게 떠드는데도 웃으면서 “아이가 참 밝네요.”라고 받아주시는 모습에 편안한 마음으로 성당에 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자그마한 사랑 실천이지만, 그 결실은 어떤 전교 활동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그마한 사랑은 적극적으로, 하지만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악은 철저히 피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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