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에서는 영류태왕이 천리장성을 쌓은 것을 근거로 팽창하는 당나라에게 위기의식을 느끼고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았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천리장성 축성 기록을 기준으로 이 기록 전후에는 중요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우선 천리장성 쌓기 직전에 영류태왕은 당의 요청에 의해 아무런 조건 없이 고수전쟁의 전공탑인 경관을 허뭅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대당강경파들을 자극하는 것은 물론 고수 전쟁 때 백성들의 노고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처사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로 인해 고수전쟁 직후 고구려 국력 과시의 일환으로 새로운 역사서인 신집을 편찬하는 것을 맡은 국가 교육기관인 태학에서도 반발도 있었을 것이고, 대외적으로도 국가 위신을 낮추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 자명한데, 애초에 대당강경책의 일환으로 천리장성을 쌓을 예정이었다면 그 전에 경관은 왜 허물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외교란 양국간의 실익을 추구하는 행위로도 볼 수 있는데, 영류태왕이 경관을 허물었다고 해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당태종의 침략 야욕을 꺼뜨린 것도 아니고 스스로 얕보이 게 끔 만들음으로써 되려 침략야욕을 부추긴 꼴로 손해만 봤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영류태왕은 천리장성 축조명령 이후 당에 태자 환권까지 입조시키는데, 일부에서는 이를 태자를 통해 당의 허실을 엿보게 하려고 한 것이라고 하지만, 태자 입조시켜 첩보활동을 벌이게 될 경우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큰 패입니다. 고구려의 태자 입조는 한 나라의 군주가 입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제적으로도 매우 큰 문제입니다. 고구려는 고국원태왕 때 어쩔 수 없이 전연에 태자 입조를 한 번 있지만, 영류태왕 때하고는 상황이 다릅니다.
태자 입조는 국내에서 당의 변화된 조공책봉책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고려 조정내부의 반발세력이 일어나게 되니까요. 진대덕의 경우는 고려에 대해 고자세로서 고려의 주요 거점지역을 탐사하고 돌아가는데 당시 대대로인 이리거세사까지 수 차례 만나는 등 어려움이 없었던 반면 고려의 경우는 진대덕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따라서 태자 환권의 첩보는 실질적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며 시도조차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당시 당은 어떻게든 고려에게서 꼬투리를 잡아 전쟁을 일으키려 했는데, 그런 분위기에서 당태종이나 장손무기, 이적 등은 태자 환권을 철저히 감시했을 것이 자명합니다. 그저 당과의 전쟁 억제를 위해 태자를 보낸 것에 불과합니다.
태자 입조에 대한 당태종의 답례로 직방낭중 진대덕을 보내는데, 영류태왕은 자신이 쌓으라고 지시한 천리장성을 온 천하의 지리와 각국의 원근을 재는 관직인 직방낭중 진대덕에게 그대로 노출시키고, 진대덕이 방문한 성의 관리들은 진대덕의 후한 예물들을 받고 기쁘게 골고루 인도하고 진대덕은 고구려의 허실을 엿보았으나, 영류태왕 정권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영류태왕과 그의 정권 아래 있던 신하들이 바보라서 그리했다기 보다는 당태종이 상당히 치밀하게 나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군요.
영류태왕의 정권은 당과 당태종에 대한 위기의식은 찾기 힘들며 뇌물을 받는 변방 관리들의 태도로 볼 때 국경의 기강 또한 흐트러질대로 흐트러졌습니다. 정말 영류태왕이 전쟁 대비를 하는 군주라면 진대덕에게 이곳저곳을 구경시킬 게 아니라 이복형인 영양태왕처럼 수의 사신들을 감금하고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하고 무기 기술자들을 빼돌리거나 했어야 했습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영류태왕 정권이 대당경경책은 커녕 국방정책에 소홀히 하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영류태왕이 천리장성을 대당강경책의 일환으로 축성한 것이 아니라 경관파괴로 불만이 급커진 대당강경파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류태왕의 행보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경관파괴-> 천리장성 축조 시작->태자 입조->답례로 진대덕 정탐-> 연개소문 천리장성 축조 감독으로 좌천 후 암살 계획-> 연개소문의 정변
입니다.
일부에서는 당의 고려에 관한 정보는 진대덕의 첩보행각 보다는 4번에 걸친 고수 전쟁에서 축적된 정보로 알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하지만, 1차 고수전쟁시 수는 고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지 않은 채 무작정 대군을 내어 침공했다가 고려의 본토도 밟아보지 못하고 육군은 요서에서 패하여 회군하고 수군은 임유관 앞바다에서 전멸당했습니다.
2차~4차 고수전쟁 또한 수양제는 고려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수집하지 않은 채 고려를 침공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기록만으로 봤을 때 수문제와 수양제는 당태종처럼 적극적으로 고려의 정보를 캐내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수의 4번의 침공으로 인해 공성 노하우는 쌓였겠지만, 고려에 관한 지리적 정보는 매우 단편적이고 제한적일 수 밖에 없고, 더군다나 비록 형식상이기는 하지만, 고구려는 천리장성을 장기간 축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를 성공적으로 정벌하기 위해서는 보다 새로운 정보가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때문에 당태종은 직방낭중 진대덕을 답사로 둔갑시켜 첩보행각을 한 것이고, 진대덕의 첩보행각은 매우 만족스러워서 진대덕의 첩보행각은 당태종 본인도 크게 기뻐하여 즉석해서 전략을 수립할 정도였습니다. 나중에는 장검과 이도종을 요하 주변까지 파견하여 요하 주변의 지리 정보를 수집하게끔 하고, 이 과정에서 이도종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합니다.
당태종은 고려와의 전쟁에 앞서 수문제나 수양제와 달리 정보전을 중요시 여긴 군주로 그 방면에 최선을 다 하였고, 이후 당은 수와는 달리 초전부터 진격로로 고려의 허를 찌르는 예를 들어 1차 방어선 역할을 해야 할 요하가 무용지물이 되고, 현도성과 신성이 먼저 공격당하는 등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의도치 않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이 영류태왕 정권입니다.
이렇듯 천리장성 축조 기록은 경관파괴, 태자입조, 진대덕 정탐 등 전후 기록으로 볼 때 이는 경관파괴건으로 더욱 커진 대당 강경파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어차피 본전이니 축성해서 나쁠 것은 없지.' 라는 영류태왕의 안일한 생각에서 비롯된 형식적인 수단에 불과합니다.
영류태왕의 대당온건책은 온건했던 당고조가 당의 정권을 잡고 있을 때는 상당한 효과를 가져왔지만, 현무문의 변이 일어났을 때부터 아니 늦어도 당태종이 황제에 즉위했을 때부터는 대당강경책으로 바꿨어야 했습니다.
첫댓글 고건무 = 대당 강경파............. 영류왕 = 권좌에 집착 잔꾀를 부리다 결국 연개소문에 죽임을 당한 비참한 왕....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습니다. 영류태왕이 비록 당태종의 성향을 파악하는 데는 실패해서 정변을 초래했지만, 그는 고수전쟁이라는 엄청난 대전을 수 차례씩이나 겪은 바 있기 때문에 중원의 통일왕조와 전쟁 벌이는 것 자체에 염증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참 답답한 군주 입니다 수말당초때는 그렇다 쳐도 돌궐이 망하는것을 그렇게 쳐다보고만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