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산동 고분군을 찾아
광복절을 맞은 팔월 중순 토요일이다. 자연학교는 열차로 이동한 고적 답사에 나서려는 길이다. 미명에 퇴촌교 삼거리로 나가 창원천 천변 운동 기구에 한동안 몸을 단련했다. 이어 창원천 상류에서 창원대학 캠퍼스를 거쳐 창원중앙역에서 동대구행 열차를 탔다. 객차에서는 최근 받은 두 문학 동인이 펴낸 시집을 펼쳤다. 중년 두 시인의 삶이 여과지를 통과한 순수로 와 닿았다.
동대구역 역사를 빠져나가니 우리나라 현대사 큰 획을 그은 정치인 이름으로 광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해방 전후 군문에 몸담았다 혁명을 일으켜 대한민국호를 오늘날 이만큼 국제적 위상을 높인 굴곡진 정치인이다. 후세에 과보다 공이 더 많게 평가받는 박정희 대통령이 밀짚모자에 볏단 안은 모습을 동상으로 세워 놓았다. 동대구역에서 도시철도 1호선을 타고 서부터미널로 갔다.
50년 전 청년 시절 고향에서 버스로 대구에 닿는 관문이 거기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버스 터미널은 큰 변화가 없었다. 해인사로 가는 시외버스에서 중간 경유지 고령까지 승차권을 구해 탑승했다. 대구에서 그리 멀지 않아 동서고속도로 일부 구간에서 국도로 내려간 소읍에 닿았다. 내가 가려는 답사지는 대가야 고분군으로 고령을 지날 때면 으레 차창 밖 산언덕 보이던 무덤이다.
고령을 찾기는 초행이라 무작정 지산리 산마루 무덤 방향으로 걸었다. 읍내 거리가 가로수가 없이 밋밋해 아직 남은 여름볕이 따가워 비가 올까 봐 챙겨간 우산을 펼쳐 그늘로 삼았다. 대가야 박물관으로 가던 길에서 조금이나마 그늘을 택해 찾으니 지산리 마을에서 산언덕을 오르는 개척 산행을 하듯 고분군 북쪽 능선으로 올랐다. 웬만한 골프장 코스만큼 될 넓은 고분군이었다.
연전 유네스코에서 가야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주목받는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함안 말이산 고분군은 생활권에서 가까워 여러 차례 둘러봤다. 창녕읍 교동과 송현리도 불교 유적과 함께 고분이 덩그렇더랬다. 올여름 고성 송학동과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도 찾았다. 이번에 고령을 답사하면 이제 합천 옥전 고분군이 남는데 후일 틈을 내서 찾아갈까 한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함안 말이산 고분군처럼 산등선에다 조성된 봉분이었는데, 면적과 무덤 개수가 아라가야와 비교 안 될 정도 규모가 컸다. 전기 가야는 김해 금관가야가 주축이었다가 신라에 합병되어 고령의 대가야가 후기 가야 맹주로 백제와 신라의 완충지 역할을 했다. 남원의 고대사 유적도 백제권이 아닌 고령의 대가야가 서쪽으로 뻗쳐 남긴 가야사 문화권의 확장이었다.
산등선 따라 조성된 700여 기 봉분에는 각기 번호가 붙여져 있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발굴을 빙자 도굴된 봉분이 부지기수였고 근년까지 관련 학계는 발굴 유물들은 온전히 보존하려 애썼다. 산마루 5호분은 경주문화유산연구소에서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라 천막으로 가림막이 쳐져 있었다. 산등선을 내려가니 대가야왕릉 전시관으로 발굴 당시를 재현해 놓았는데 순장이 특이했다.
대가야왕릉전시관에서 대가야박물관으로 옮겨 고령에 터 잡은 이들이 남긴 고대문화 진수를 확인했다. 금제 장신구와 철제 무기가 전시되고 다수 토기를 모아 두었더랬다. 가야 여섯 연맹체 가운데 대가야는 독자적인 건국 신화로 구지봉 난생설화 형제국에서 하나 더 있는 셈이이다. 가야산신 정견모주와 하늘신 아비가지가 만나 두 아들을 두어 맏이가 대가야 왕이 된 이야기다.
우륵박물관 견학을 안내받았으나 날씨가 더워 후일로 미뤄뒀다. 읍내 장터에서 수구레국밥으로 점심을 요기하고 귀로에 ‘지산동 고분군에서’를 남겼다. “솥발이 떠받힌 듯 고대사 삼국시대 / 여기다 가야사도 엄연한 왕국이라 / 고령에 터 잡은 부족 고분군을 남겼다 // 지산동 산마루에 덩그런 족장 무덤 / 봉분 속 돌덧널에 혼백은 흩어져도 사서에 미흡한 기록 토기로써 밝힌다” 26.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