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럴드 드 바리. 1185년 당시 존이 워터피드에 상륙했을 당시에 대한 기록.
일단 존이 첫 목표로 점찍은 곳은 가장 '만만해 보였던' 웨일스 일대였다. 존은 이미 선조들이 기름지고 전략상 중요한 일대를 이미 선점해놓은 상태에서 평화적으로 이 일대를 흡수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영국의 군주들 중에서 가장 웨일스 문제에 대해 폭압적으로 대처함으로써 그 기회를 알아서 발로 차버리고 말았다. 흉포한 기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존의 강력한 지배정책에 충실히 따르며 현지인들을 핍박하자, 이전부터 현지인들과 절충하여 대체적으로 유지되던 영국의 '헐거운 지배' 의 틀이 깨져버리고 말았다. 13세기 초반의 웨일스는 마치 오늘날의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처럼, 언제라도 폭동이나 전쟁이 터져도 전혀 의아스럽지 않을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 13세기의 웨일스(Wales) ≫
특히 불만이 많은 세력을 고르자면 포위즈의 세력이었다. 당시 왕이 난립하던 웨일스는 단일 세력이 존재하지 못했고 그나마 강력한 세력이 등장할라치면 잉글랜드 측의 방해가 뒤이어서 그나마 '대표자' 격인 나라조차 없었다. 존은 영국제도에서 잉글랜드의 영향력을 팽창시키려고 하기 전에도 이미 디휴바스의 맬귄 압 리스 집안에서 분쟁이 일어나자 편파적인 행동으로 웨일스의 민심을 악화시키는 대신 카디건을 얻어냈었고, 이제 존이 이 일대에 관심을 쏟게 된 이상은 무력도 서슴지 않을 것이란 것이 뻔한 것이었다.
이런 폭풍전야의 상황은 1208년 포위즈의 왕자인 그웬윈윈이 사로잡히면서 '물리적 충돌' 로 전환되었다. 존은 고위층 인질 20명을 넘겨받아 특히 불만이 많았던 포위즈 세력을 손봐주고는, 뒤늦게 왕자를 풀어주어서 그들의 충성을 이끌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차피 같은 잉글랜드 사람들도 안 믿는 존을 '이방인' 들이 믿어줄리가 없었다. 여전히 민심은 악화되어가는 가운데, 어느 정도 웨일스에 경고 조치를 통해서 위압감을 전했다고 생각한 존은 아버지 때부터 잉글랜드 북쪽 경계의 화근이나 다름없었던 스코틀랜드의 왕에게 그 칼끝을 향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왕은 여전히 사자왕 윌리엄이었다. 그는 1142년 또는 1143년 출생으로 추정되는고로, 그의 나이는 이즈음 이미 일흔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늙은 왕은 병석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였고, 이 기회를 틈탄 존이 스코틀랜드를 침략하겠다는 위협을 행하자 헨리 2세의 강력한 무력(武力)에 무력(無力)해졌던 옛 악몽이 되살아난 왕국이 발칵 뒤집혔다. 그야말로 '아무 이유도 없이' 스코틀랜드는 귀족 열 세 명을 인질로 보내고 10,000 파운드의 거금을 지불해야만 했을 뿐 아니라 공주 두 명을 영국 왕실로 보내어 '존의 처분에 맡겼다'. 이 치욕스러운 노엄 조약이 체결되는 꼴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던 '사자왕' 은, 이후로도 5년이나 더 살다 숨을 거두었다.
≪ 스코틀랜드의 윌리엄 1세(William I of Scotland) ≫
하지만 이것은 스코틀랜드의 굴욕이기에 앞서 존이 매우 위험한 씨앗을 뿌린 결과가 되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결정적으로 패한 뒤 존이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왕에게 반발했던 '북부파' 의 뒤에는 새로이 즉위한 젊은 왕 알렉산더 2세(Alexander II)가 있었던 것이다. 반란 귀족들을 지지한 댓가로, 알렉산더는 마그나카르타에서 그 보상을 받아낼 수 있었다.
59.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에 대하여서는 그 자매와 인질의 반환 그리고 그 특권 및 권리에 관하여
짐이 그의 부왕인 前 스코틀랜드 국왕 윌리엄으로부터 취득한 증서에 따라서,
특별한 방식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짐은 잉글랜드의 봉신에 대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써 처리한다.
또, 그리고 그 처리는 짐의 재판소에서 그의 동료에 의한 재판에 기하여 행한다.
1209년 노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스코틀랜드까지 손을 본 존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당한 수모를 같은 섬의 이웃들에게 그대로 되갚아주는 듯 했다(말 그대로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하다;;). 본토를 정리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아일랜드 뿐이었는데, 이 문제는 여타 문제들과는 다소 별개였다. 문제의 발단은 치세 초기 존의 측근이었떤 윌리엄 드 브리오즈가 아일랜드의 리머릭 영주권의 댓가로 5천 마르크를 지불하기로 해놓고 7년 동안이나 미적미적 미룬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왕의 신임을 잃자 즉시 재정법원에서 그를 협박해왔고, 돈이 즉시 지불되지 않자 군대 사령관 지라르 다테가 윌리엄의 영지를 일부 몰수했다. 그 일대는 웨일스 남부의 토지로써, 이 몰수령에 두려움을 느낀 윌리엄이 아일랜드까지 도망침으로써 아일랜드까지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더욱 존을 격분시킨 것은 아일랜드의 사법관이었던 노리치 주교 존 드 그레이가 왕의 명령을 거부한 것으로, 결국 존은 반항아 무리들이 아일랜드에 집결하는 것을 염려하여 친정(親征)까지 단행하게 되고 말았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당시 브리오즈 가문의 뒤를 봐주던 사람들 역시 존의 강력한 위세에 대부분이 숨을 죽였으니, 다만 얼스터 백작 휴 드 레이시, 미스의 영주 월터 드 레이시 두 명의 형제만이 레이시 형제를 돕겠다고 나서서 왕의 분노를 샀다. 하지만 당시 레인스터의 영주였던 윌리엄 마샬 등이 모두 바다 건너 펌브로크에서 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원정을 따랐으며, 이에 자신을 얻은 존의 700여척 대함대가 아일랜드의 크룩에 상륙하자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9주 간이나 회오리바람 속에서 치열하게 싸운 끝에 마침내 반란을 평정할 수 있었다.
정작 반란의 주동자였던 윌리엄 드 브리오즈는 도망쳤지만 부인인 마틸다 드 브리오즈와 그 아들은 붙잡혀서 아마도 감옥에서 굶어죽고 말았다. 존은 이 모든 것이 '단지 왕실과 재정법원 법의 관행에 따라 빚을 갚지 않은' 윌리엄의 죄라고 말했으나 이렇게 치자면 어떤 꼬투리라도 잡아서 고관대작들을 잡아 족칠 핑계거리는 널려있었다. 결과적으로 존은 이 반란을 토벌함으로써 반대 세력들을 정리한게 아니라 새로운 적수들을 더욱 양산했고 자신의 위엄을 실추시키고 말았다. 존과 윌리엄 드 브리오즈는 '결국엔 의심과 공포, 참혹한 죽음이 두 사람의 관계를 장식' 했을 뿐이었다.
문제는 그 뿐이 아니었다. 존은 이 원정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잔혹함을 아일랜드에 널리 떨쳤다. 이미 1185년 아일랜드를 찾아온 적이 있던 존은 그 때에도 위에서 밝힌대로 심히 오만한 태도로 민심을 잃었지만 이번에는 그 때와 비교해서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아일랜드 인들은 '목숨을 걸고 저항하여 오랫동안 이어져온 자유를 지키기로 뜻을 모았다'. 곳곳에서 산발적인 반영(反英)투쟁이 벌어지고 치안의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특히 케이설 크로브더그 오코너(코너트의 왕), 케널 이오게인의 왕 휴 오닐(얼스터의 군주) 이 두 사람은 존 왕과 긴장관계를 유지했는데, 특히 휴 오닐은 인질까지 넘기기 거부해서 아일랜드의 연대작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이니스폴른의 한 연대작가는 '영국의 왕이 아일랜드에 왔지만 성과는 크지 않았다' 고 기록했다. 존의 의중은 브리오즈 가문의 토벌 뿐만이 아니라 아일랜드 지배를 공고히하는데 있었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이다. 존의 1210년 원정 이후, 리처드 2세가 바다 건너 침략해왔던 1395년까지 그 어느 영국의 군주도 아일랜드를 찾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바로 이런 경향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제 다시 카메라를 웨일스로 돌려보자. 1200년 이래 존의 정책(당시 존은 윌리엄 드 브리오즈에게, '적' 웨일스 군대의 모든 것을 다 정복해도 좋다고 말했다)은 1210년을 넘어가면서 이제 겉잡을 수 없는 혼란을 양산해내고 있었다. 대규모 군대의 출동이 또 다시 필요한 시점이었다. 존은 적절하게도 1211년 귀네드(Gwynedd)를 침략했다. 1165년 이래 잉글랜드의 왕이 또 다시 웨일스에 출현한 것이다. 당시 귀네드의 실력자였던 홀르웰린 압 요스웨르스(Llywelyn ab Iorwerth)의 세력 팽창을 두려워한 존은 이 일대를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하지만 첫 번째 정벌은 실패였다. 홀르웰린에게 남부 포위즈와 케레디기온을 합병할 기회를 만들어 포위즈의 그웬윈윈에게 굴욕과 엄청난 피해를 안겼던 사람이 바로 존 자신이었는데도 지레 겁 먹고 별 다른 준비 없이 군대만 몰고 갔으니 게릴라 전법을 사용하는 웨일스 인들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포위즈 문제처럼 쉽게 귀네드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자 존은 일시적으로 군을 물렸다가, 바로 그 해에 다시 철저한 준비 끝에 귀네드를 재침공했다. 전번처럼 스노도니아(Snowdonia)로 도망치려다 실패한 홀르웰린은 결국 콘위 이동(以東)의 귀네드 지방을 잉글랜드에 바치고 공물로 2만 마리의 소를 바치며, 자신이 후사 없이 죽으면 모든 영지가 영국의 왕에게 귀속된다는 약정에 서명했다. 이 약정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의 서자를 포함해 30여명의 인질을 바치라는 조항도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마그나카르타에서 파기당했다.
58. 짐은 평화의 보장으로써 짐에게 인도된 홀르웰린의 자식과 그 외의 모든 웨일스인의 인질 및 증서를 '즉시' 반환한다.
≪ 홀르웰린 압 요스웨르스(Llywelyn ab Iorwerth)의 치세 당시의 웨일스 ≫
이 대규모 정벌로 사실상 웨일스에서 가장 강력했던 포위즈와 귀네드의 양대 세력이 붕괴되었다. 바로 그 틈을 타서, 1211년 존의 부하 폭스 드 브리오테(그 또한 용병대장이었다)는 북부 케레디기온을 점령하고 에버리스트위스(Aberystwyth)에 성을 구축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잉글랜드의 웨일스 지배를 확고히 했다기보다는, 사실상 절멸의 수순을 밟던 귀네드의 홀르웰린을 도와준 꼴이 되었다. 순식간에 잉글랜드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홀르웰린 아래로 운집했다. 이들의 대부분이 이전에 홀르웰린에게 반대하던 사람들이었으니 존에 대한 웨일스인들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대략 짐작이 간다.
이들이 모여 일으킨 1212년 여름의 웨일스의 대규모 반란은 프랑스에게 다시금 반격을 가하려던 존의 계획을 좌절시켰고, 존은 8월 14일을 기해 28명 이상을 처형함으로써 이에 답했다. 물론 이것으로 저항이 끝나지는 않았다. 결국 존은 치세 내내 웨일스 문제 때문에 매번 발목이 잡히고 군대를 나눌 수 밖에 없었다. 끝내 웨일스는 존보다 더 정치적, 군사적으로 성숙된 군주인 에드워드 1세에 의해 13세기 말에나 완전히 정복될 수 있었다(그나마도 15세기 초반에 다시 '오와인 글린 두르 폭동' 이라는 대규모 저항이 일어난다).
완전히 지쳐버린 존이 1214년 이후 웨일스 문제에 대해 전혀 신경을 못 쓰는 사이에, 홀르웰린은 잽싸게 웨일스 내부에 세워졌던 잉글랜드 왕실의 거점들을 점령함으로써 존에게 커다란 굴욕을 줌과 동시에 잉글랜드 왕실에 대한 형식적인 충성조차 거부했다. 1240년 홀르웰린이 사망하자, 웨일스 인들은 아무도 그를 '홀르웰린 압 요스웨르스' 라고 부르지 않았다. 대신에, 사람들은 그를 '홀르웰린 대왕' 이라고 불렀다. 생전에는 존과 홀르웰린의 관계가 '대왕' 과 '반란자' 의 사이였지만, 죽고 나서는 그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역사의 심판' 인가보다.
≪ 홀르웰린 대왕(Llywelyn the Great) ≫
첫댓글 이번에도 똑같다는 ㅡ.ㅡ;
여기도 안 보이는 사진이 많네요. 저만 그런가요? 어쨌든 존이 뒤처리는 못했지만 꽤 여러번에 걸쳐 승리를 거두네요.
네이버에서 썼던 글을 막 퍼오니 안습한 결과가.. 역시 수정;; 존은 '군사적 승리 직후 정치적 실수' 의 연속을 보여주죠. 프랑스에서 몇 번 곤욕을 치뤘으면 좀 성격 고칠만도 한데 끝내 안 고치다가 저런 결과를 맞으니.. ㅋㅋ;
결국은 통치자로서 역량의 한계인 듯... 차라리 사자슴가왕이 정치적으로 더 유능해 보이지 말입니다;;
근데 웨일즈는 그들의 군주 칭호가 대공(prince)로 알고 있는데 왜 홀르웰린은 대왕이라고 불렸죠?
워낙 홀르웰린의 업적이 뛰어난 때문인 듯 합니다. 보통 그를 '웨일스의 홀르웰린 1세(Llywelyn I of Wales)' 라고 부르기도 합죠;; 사실상 홀르웰린은 웨일스의 세력들을 거의 집결시켰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