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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live/Jyv2chcYb0w?si=Q0e7C9hm3onUYN_K
예수님의 완전한 희생 제사 10:11~18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16 주께서 이르시되 그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10:19~25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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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그리스도는 거룩하게 된 사람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기억하지 않으시니, 다시 죄를 위해 제사드릴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에 힘입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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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완전한 희생 제사 10:11~18
속죄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 제사는 완전합니다. 레위 지파 제사장의 희생 제사는 불완전했기에 ‘매일 서서’(11절) 드려야 했습니다. 반면 흠 없는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예수님은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1:13; 8:1). 그리고 원수들이 그분의 발 앞에 굴복할 때를 기다리십니다(시 110:1). 그분은 거룩하게 된 사람들을 한 번의 희생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예레미야 예언의 성취입니다(렘 31:33~34). 예수님의 속죄 제사로 인해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불법을 더는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속죄 제사가 필요 없을 만큼, 예수님이 이루신 속죄는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완전한 속죄의 은혜를 누립니다.
● 더 깊은 묵상
우리에게 예수님 외에 속죄를 위한 다른 제사가 필요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도 기억하지 않으시는 죄를 내가 지적한 경우는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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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10:19~25
온전한 속죄를 행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놀라운 특권을 누립니다.
첫째, 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었습니다(19절).
대제사장을 통하지 않고 예수님의 피를 의지해 직접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 새로운 살길이 열렸습니다(20절). 대속죄일에만 열리던 지성소의 길이 이제 항상 열려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온전한 속죄를 이루신 예수님은 하나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십니다.
그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은 우리는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약속에 대한 소망을 굳게 붙들고, 서로 모여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
대속의 은혜를 아는 성도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삽니다.
● 더 깊은 묵상
완전한 속죄를 이루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누리게 된 특권은 무엇인가요?
속죄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받은 나는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할까요?
한절묵상 :히브리서10장 24~25절
주님 다시 오실 날이 가까울수록 성도는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한 몸 된 교회의 지체기 때문입니다. 죄로 가득한 세상은 불편하고 번거롭다는 이유로 모이기를 거부합니다. 모든 일을 '우리'보다는 '나'를 기준으로 판단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열두 제자와 함께하셨습니다. 함께 모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함께 모여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 격려하며 세상을 섬기는 것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사람의 책임은 그것을 그분 뜻에 최대한 일치하도록 잘 사용하는 것이다. - 올리버 바클리
오늘의 기도
주님, 십자가로 새로운 살길을 열어 주시고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제 마음과 삶에 새기신 순종의 법을 따라 주님과 친밀한 사귐을 나누게 하소서. 온전한 믿음으로 영원한 소망을 품고, 온전한 사랑으로 공동체를 든든히 세워 가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540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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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당신의 피로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시고, 믿음과 소망,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신 예수님이십니다.
대지와 소지:
1. 먼저, 믿음의 길입니다.
a.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함
b.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확고한 믿음의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음
2. 둘째로, 소망의 길입니다.
a.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켜야 함
b. 예수님께서는 소망을 굳게 붙잡고 나아갈 수 있는 소망의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음
3. 마지막으로, 사랑의 길입니다.
a.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해야 함
b. 예수님께서는 서로 마음을 써서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는 사랑의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음
진정 자신의 죄를 깨닫고 시인하는 자는 구원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자로 오신 예수를 통해 구원의 소망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밖에 구원을 주실 다른 어떤 것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참 성도에게 소원은 잠시라도 주님의 곁을 떠나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도 주님을 떠나지 않도록 붙들고자 합니다.
그런 선행과 격려가 늘 함께하는 교회로 살아가기만을 소원합니다.
나 또한 그런 지지와 사랑을 형제와 자매들로부터 받고 있음을 생각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①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주님께서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크고 놀라운 기적과도 같은 일들을 경험하며, 주님을 기쁨으로 찬양하고 예배하도록 하자
②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켜 나가면서, 더욱 더 성장하고, 성숙해져 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자
③ 이 세상 속에서 나눔과 섬김을 실천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써 세상 속에서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가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거룩하고 정결한 삶의 모습을 지켜 나가기 위해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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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기자는 지난 9:7절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제물의 피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허물’이란 ‘고의적이지 않은 실수’, ‘부지 중 저지른 죄’, ‘무의식 중에 행한 잘못’ 등입니다. 그렇다면 고의적인 죄, 알고서 지은 죄, 의도적으로 지은 죄는? 그것의 속죄를 위해 준비된 제사는 없다는 말인가요? 즉, 고 범죄를 위한 제사는 없다는 선언인가요? 불행하게도 사람들이 짓는 죄는 대개 그렇지 않은데도 말입니다. 바로 우리가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대개 모르고 짓는 죄가 별로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하느냐?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여전히 같은 죄를 짓는 이 현실적인 난제를 해결할 방법은 과연 없느냐? 난제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서는 매우 영적인 책입니다. 이 책만큼 죄에 대해서 깊이 다룬 책도 드뭅니다. 친절하게도 본문에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 우리가 이미 마음이 피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이 깨끗해졌고 몸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이제부터는 그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열쇠입니다. 이 말씀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마음에 뿌림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 마음에 뿌려졌다는 말입니다. 옛날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뿌려 정결케 했듯이, 주님의 정결 된 피가 우리 마음에 뿌려져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가 스타트라인입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니, 연약하여 자주 넘어지더라도 설령 죄의 잔재가 남아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보혈을 보시고 그분이 죄 없다고 인정하시기 때문입니다. 고의적인 범죄 이제 그쳐져야 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있기 때문입니다. 뿌려진 그 정결한 피는 영원히 효력이 있습니다. 하늘성소에서 우리 주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보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지을 죄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 피가 당대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그때만 보증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그 보혈을 붙잡고 회개하면 어떤 죄라도 사해질 수 있습니다. 그 피로 깨끗해 질 수 없는 죄가 없습니다. 정결 될 뿐만 아니라 아예 삭제되고 기억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온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로서 우리가 죄에서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시스템을 그분이 만들었습니다.
구 시스템, 구 언약은 폐기되었습니다. 새로운 시스템, 새 언약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살 길로만 가야 합니다. 이상의 진리를 굳게 믿고 그런 마음으로 보좌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 숙제는 비로서 해결할 수 있게 되고 갈등은 해소될 수 있을 것입니다. 뒤돌아보면 안 됩니다. 하늘 보좌를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이 장엄한 행군에 포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면 백전백패이지만 그 분이 하면 백전백승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마5~7장으로 세워가는 길 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다 주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버리는 것만큼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회개하는 것만큼 거룩해질 수 있고, 믿는 것만큼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정화의 디딤돌입니다. 칭의의 입간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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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단번에 영원히 완성하신 십자가 제사는 우리를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10:14)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이 진리를 믿고 영원히 온전하게 하시기 전을 볼 것이 아니라, 후를 보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믿음에 견고하게 되지 못하여서, 영원히 온전하게 하시기 전의 자신을 바라보며, 여전히 정죄감과 패배감과 열등감에 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은 주께서 십자가 제사로 우리를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고, 따라서 우리는 지금도 담대히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10:19)
그렇다면 영원히 온전하게 하신 후를 바라본다는 것은 뭘까요? 두 가지인데,
첫째는 개인적으로 믿는 도리를 굳게 잡고 온전한 믿음으로 항상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22~23)
둘째는 공공적으로 교회 안에서 서로 돌아보아 하나님의 나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서로 돌아보아"(히10:24)
왜냐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의 마음에 개인적으로만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공공적(公共的)으로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구원하셔서 하나님 앞에 성도로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공공적으로 구원하셔서 하나님 앞에 교회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도 개인적으로만 아니라 교회적으로 임하셨고,
사도들도 개인을 구원한 후에는 반드시 교회들을 세웠던 것입니다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행15:41)
참으로 주와 주의 나라가 매우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개인적으로 주와 친밀한 교제를 가질 뿐만 아니라,
모이기를 폐하는 이 세대의 악한 습관을 따르지 않고,
오직 교회적으로 모여 서로 돌아보며 격려하며 권하기 원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25)
그리하면 우리 주께서 개인적 승리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고후2:14)
교회적 승리로 충만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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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 산길…확신에 찬 믿음과 참된 마음’
우리를 향해 신실하게 열어주신 새롭게 하시고 영원히 살게 하는 그 길에 대한 확신과 그로 인한 축복은 우리 안에서만 머무를 수도 또한 감춰질 수도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찾으시는 그 한 영혼을 향해 우리의 입술의 고백으로 선포되며 삶의 증거로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드러나도록 믿음의 성장을 멈추지 않게 합니다.
서로의 연약한 부분을 긍휼히 여기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며 그 열린 문으로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삶은 결국 그리스도께서 이 땅 가운데 행하신 그 놀라운 일들을 이어가는 하늘나라 상속자의 삶이 됩니다.
그 삶은 또한 보이지 않는 소망으로 주어진 고난도 감사하게 이겨내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이 땅을 살아갈 수 있는 성령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그 선하신 인도하심을 받아 날마다 승리하며 복된 소식 외치는 광야의 소리로 쓰임 받는 성령 충만함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9월 18일 인천대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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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
1.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10: 11-18)
여기서도 구약의 제사제도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제도는 많은 제사장들이었지만, 그리스도는 단 한 분의 대제사장이십니다. 또 구약의 제사장은 제사가 계속 되어야 하기 때문에 "서서" 제사를 드렸지만, 그리스도는 제사를 완성하셨기에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구약의 제사는 매일 반복하는 제사지만, 그리스도는 한번에 드리심으로 완성하셨습니다. 구약의 제사제도는 제한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만, 그리스도께서 제사를 완성하심으로 이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제사제도는 죄를 완전히 없게 하지 못하지만, 그리스도는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하셨습니다(14).
이것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역은 예레미야의 새 언약에 대한 예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10:16-17). 이제 우리는 구약의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습니다.
➲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습니다(11~18절).
제사장이 매일 드리는 제사로는 죄를 없게 하지 못하지만(11절),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의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12절). 그리고서 그는 그의 원수들이 그의 발 아래에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고(13절,새번역),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을 단 한 번의 희생제사로 영원히 완전하게 하셧습니다(14절). 성령도 증언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15절).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백성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셔서 그것을 지킬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주님은 백성의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16~17절, 렘 31:33). 또한 주님이 모든 죄를 사하셨기에 다시는 죄를 위하여 새로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18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공급되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삶의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위협과 유혹으로 하여금 현실과 타협할 것을 요구하는 치열한 전투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러한 죄와 싸울 뿐 아니라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고 있으니 이 또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정결함을 입어 정죄함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더욱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용서함을 받은 은혜를 경험하였기에 내 자신에게 죄를 범한 자에 대하여 용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온전한 능력과 마음으로 순종하며 순전한 기쁨을 누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 영광스런 보좌로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19~20절).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19절).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우리들의 죄를 속하사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트시기 위하여 자신을 친히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20절) 즉,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예수 그리스도께 죄인들을 위하여 중보자가 되어 주심으로 이제는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는 누구든지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날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영생을 얻은 자로써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21~22절).
‘...큰 제사장...’(21절)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제사장들이 해결하지 못한 죄의 문제를 단번에, 완전히 해결하셨기에 가장 위대하고 참된 제사장이 되십니다. 아울러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22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삶의 변화를 가져왔으니, 다시는 같은 죄악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고 힘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참마음’ 즉, 진실하고 충성된 마음과 ‘온전한 믿음’ 즉,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현재의 상태에 안주하지 말고 영적 성장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영생을 얻은 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진심어린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해야 합니다(23~25절).
또한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기에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신앙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23절,표준새번역). 무엇보다 서로 마음을 써서 돌아보며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24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모습을 본받지 말고 마지막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모이기를 더욱 힘써야 합니다(25절).
선행은 남을 사랑하는 마음에 나오는 좋은 행위이므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처럼 사랑의 행위를 힘써야 하는 이유는 내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죄사함의 은총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같은 사랑을 입은 자로서 타인에게 다시금 사랑을 베푸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내 자신이 섬기는 믿음의 공동체가 같은 믿음과 같은 소망을 가지고 하늘 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공동체가 되도록 힘쓰는 사역이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는 것을 통해 주님의 제자인 것을 나타낼 수 있다고 말씀(요 13:35)하셨으니, 공동체 지체들의 형편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며 그들의 문제를 위해 기도하고, 위로하고 격려하여 영생을 얻은 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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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20절 :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드리는 완전한 제사로 새 언약의 복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새 언약의 복은 하나님이 말씀을 언약 백성의 마음에 기록하셔서 그들을 말씀에 순종하는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과 하나님이 그들의 죄와 불법을 완전히 용서하셔서 다시는 기억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을 따라 제사 드리던 첫 언약의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면서도 얻지 못한 복이었습니다. 그들은 속죄일이 되면 가축의 피로 제사를 드렸지만, 그것은 죄를 상기시킬 뿐 없애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속죄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첫 언약 아래서 드리던 제사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의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였습니다. 실체는 새 언약과 예수님이 단번에 완성하신 희생제사였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말씀을 어긴 죄를 완전히 용서받을 수 있고, 형벌 받을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을 붙들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기가 힘들고 예수님 아닌 다른 것이 구원을 줄 것처럼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끌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딴생각을 떨쳐 버리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합시다(3:1).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11-14절 : .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제사를 드리고 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는 옛 제사장들이 '매일' '서서' '자주' 드려야 했던 제사와 달리, 예수님의 제사는 추가적인 제사가 필요 없는 '한 영원한 제사'였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원수가 멸망할 때까지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우리가 원수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붙드십니다.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참으로 귀한 말씀이다.
그러나 언뜻 깨닫기는 어려운 말씀이다.
오래 믿었다고 깨달아지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명확하게 기록되었다.
그것을 잘 깨닫기 위해서는 구약의 제사 제도를 이해해야만 한다.
율법이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한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참 어려운 책이다.
사실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전엔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렸다.
죄를 씻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 자체도 죄인이다.
때문에 완전한 죄씻음을 할 수 없었다.
매번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다.
대제사장으로 친히 오셨다.
그리고 자신이 제물이 되셨다.
대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제사를 자기 몸을 제물 삼아 드리신 것이다.
피 흘림이 있는 완전한 제사였다.
결국 단번에 몸을 드리심으로 온전한 제사가 된 것이다.
다시는 짐승을 드릴 필요가 없어졌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완전한 제사를 단번에 드리심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는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필요가 없어졌다.
예수님의 자기를 드리는 순종으로 완성하셨다.
이것을 깨닫게 하심이 은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주님의 뜻이 나를 통해 흘러가도록 살아야 한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크신 은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위대함이다.
감사함으로 오늘도 살자.
19,20절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몸이 찢길 때 지성소를 가로막던 휘장이 찢어졌고(마 27:51; 막 15:38; 눅 23:45), 대제사장이 온 백성을 대신해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출입하여 하나님을 만났던 히브리 예배는 파기되었습니다. 땅의 성소가 아닌 하늘 성소로 인도하는 '새로운' 길, 대제사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직접 하나님을 만나 죄를 씻고 '살' 길이 열렸습니다. 히브리인에게 성소는 두려움과 미지의 영역이었지만,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예수님 덕분에 그리스도인은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습니다. 나의 예배와 묵상의 시간에 이 '담력'이 약동하고 있습니까? 땅의 타성에서 벗어나 하늘의 생기와 생동감에 잇닿고 있습니까?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21절 :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큰(위대한) 제사장이십니다. '하나님의 집'은 다름 아닌 우리입니다(3:6). 예수님이 하늘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10:12) 목적은, 우리를 땅에 속한 하나님의 영토로 거룩하게 일궈 가시기 위함입니다.
출처 : 매일성경 7/8월호
22절 :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씻기 위해 성소에 짐승의 피를 뿌렸지만,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자신의 피를 뿌리셨습니다. 에스겔 36:25-27의 예언대로, 맑은 물로 우리의 더러움이 씻겼고 부드러운 마음이 이식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참 마음으로, 흔들리지 않는 충성(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듯 삶의 모든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출처 : 매일성경 7/8월
23절 :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믿는 도리'(신앙고백)는 과거에 예수님이 주신 약속으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 약속이 미래의 실재가 되리라는 '소망'과 결부되어야 합니다. 현실에 파묻히고 고난에 휩쓸려 '소망'이라는 예언자적 상상력을 잃어버린 건 아닌지 돌아봅시다.
출처 : 매일성경 7/8월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음이 감사하다.
그것이 예수님으로 인함을 깨달음에 감사하다.
예수님의 피로 얻은 담력이다.
휘장을 열어주셨다.
때문에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이 필요하다.
주님의 피로 악한 양심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죄를 씻어주신 것이다.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한다.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앎으로 끝나면 안 된다.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
믿음을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
히브리 기자가 권유하는 바를 살펴보자.
서로 돌아보라고 하였다.
나만의 믿음이 아니다.
같이 가야 한다.
약한 자를 끌어줘야 한다.
믿음 안에서 갑질이 존재하면 안 된다.
서로를 섬겨야 하는 것이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 한다.
격려함은 매우 중요하다.
칭찬이 필요하다.
작은 칭찬 하나의 힘은 엄청나다.
비난은 없애고 칭찬을 늘려야 한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부터 더 칭찬하도록 노력하자.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였다.
그렇다.
모이는 것이 중요하다.
모여서 함께 예배해야 한다.
한 공간에 모여야 한다.
모일 수 있도록 서로 권해야 한다.
믿음은 지식이 아니다.
실천으로 옮겨져야 한다.
머리의 지식이 가슴으로 손발로 내려가야 한다.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자.
소망을 굳게 잡자.
서로를 돌아보자.
믿음으로 늘 살기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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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나가라고 말씀합니다.
1.휘장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을까요? 매우 두럽고 떨리는 일입니다. 도저히 자격이 안 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시도 해보았자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달리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브리서 10:19, NKRV)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나갈 자신감(담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강심장이어서 그럴까요? 그는 매우 대단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까요? 아닙니다. 그는 '예수의 피'로 대속함을 입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속죄함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예수님으로 인하여 거룩한 백성이 되었음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여전히 죄인이라면 하나님 앞에 결코 설 수 없기에 하나님께 나간다는 것이 넌센스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을 알고 예수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삼은 사람은 이제 자신감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성막과 성전에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있었습니다. 휘장은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도록 가로막는 휘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브리서 10:20, NKRV)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휘장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물리적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서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이 거룩한 지성소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내하는 휘장역할을 합니다. 자신을 통과할 때 사람들이 지성소의 하나님께 나갈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물리적 휘장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지 못하지만 예수님이라는 휘장은 예수님을 통과하는 사람을 거룩하게 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께 나가는 길만이 살 길입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막혀 있었습니다.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의 안내자가 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있게 이제 하나님께로 나가야 합니다. 생명의 길을 가야 합니다.
2.가는 방법
우리는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유일한 살 길입니다. 이전에는 막혔지만 이제는 예수님이라는 중보자가 있으셔서 자신감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이제 자신감을 가졌으면 첫단계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10:22, NKRV) 첫째,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가야 하는 당위성을 알면서도 많은 사람이 나가지 않습니다. 가야 할 당위성은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나머지는 모두 가지 말아야 할 이유로 가득합니다. 가보지 않은 길입니다. 우리 안의 죄성은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악한 영은 더 세차게 반대합니다. 그래서 당위성은 어느새 다시 가지 말아야 할 것으로 포위되고 무너집니다.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시작해야 합니다. '참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말씀합니다. 당위성은 많이 생각하여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순전한 마음으로 한 걸음을 걸어가야 합니다. 첫걸음을 떼십시오. 그것이 한 걸음이지만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옳은 길은 일단 한 걸음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나가야 함을 말하면서 두 번쩨 권고합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히브리서 10:23, NKRV) 하나님께 다가가는 길은 매우 옳은 길이지만 여전히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하나님께 가는 것보다 죄에 주저앉아 있는 것에 훨씬 더 익숙합니다.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 오히려 더 문제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는 것'입니다. 소망을 잡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지만 미래에는 그것이 참으로 복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이 우리를 힘들게 할 떄 우리는 소망을 붙잡고 미래를 보면서 오늘을 이겨야 합니다. 세번째 방식은 서로의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히브리서 10:24, NKRV) '격려하며'라고 번역한 단어는 조금 약하게 번역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강한 자극'을 말합니다. '채찍질'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사랑과 선행에 대해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가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인되심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주인되심은 우리 안에 '사랑과 선행'을 낳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천적인 믿음을 서로 강하게 자극하면서 그것을 행동하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해야 합니다. 말은 쉽지만 행동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행동이 본래의 마음을 반영합니다.
마라톤 선수가 혼자 뛰면 결코 기록을 단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서로 자극하면서 함께 뛰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말한 하나님께 나가는 구체적인 3가지 방식을 행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요 기초가 있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10:25, NKRV) 믿음의 공동체가 모이는 것입니다. 모여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꼐 가까이 가는 것이요, 모여야 소망을 말하고 소망을 생각하면서 소망을 갖게 되고, 모여야 서로를 자극하며 사랑하고 선행의 경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오늘날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은 주로 무관심과 게으름 때문인데요. 히브리서의 내용을 보면 이 때는 아마 '핍박'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핍박을 피해 보이는 것을 꺼리는 것입니다. 배교까지는 아니지만 두려움과 용기없음으로 인하여 모이기를 포기하는 일들이 벌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주님이 오셨을 때 무엇을 말씀하실지를 압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핍박을 극복하고 모여야 했습니다. 이때 신앙생활을 하던 모습을 잠시 생각하니 오늘날이 더욱더 부끄러워집니다. 우리는 핍박이 없는데도 모이는 것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하다 진정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 나갈 수 없었으나 이제는 우리의 중보자 예수님 때문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이 활짝 열린 그 생명의 길, 주님이 성육신하시고 십자가 지고 가셔서 열어 놓은 그 길에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가는 것을 시도해야 합니다. 소망으로 인내하면서 가야 합니다. 성도로 함께 신앙생활하면서 서로 선한 (강력한)자극이 되어주며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시작점은 성도가 서로 함께 자주 모이는 것입니다. 함께 그 길을 가고 있고(함께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 나를 보며 자극이 되고(그것이 진정 전도의 모습입니다), 나도 누군가를 보면서 자극이 되어 더욱더 그 길을 열심히 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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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기억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후 그 백성들은 이제 죄의 문제에 있어 다시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제사는 그것이 매우 유익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자라는 한계 때문에 성소에서는 매일, 그리도 지성소에서는 해마다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사를 드릴 때마다 그들의 죄에 대해 죄책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다시 또 박히지 않으십니다. 그것처럼 이제 우리의 죄에 대한 자체도 바뀌어야 합니다. 그 죄에 대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이상 과거의 죄가 죄책감이 되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17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과거의 죄를 지은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결한 사람으로 보십니다. 그런데 나 스스로 과거의 죄에 대한 기억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다시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 심판날에 심판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최소한 하나님은 이제 오늘날 우리들을 보실 때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볼 때 그의 과거가 씻겨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돈을 가지고 아버지를 배신했던 아들이 아니라 단지 사랑스러운 아들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졌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입니다. 이제는 과거의 죄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도 과거의 죄에 매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단번에 드려진 것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을 향해서도 타인을 향해서도 과거의 죄로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에 대해서는 심판 때에 공정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죄사함을 받은 정결한 백성임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아직도 과거타령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특히 과거에 배우자가 잘못한 것을 아직도 우려먹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남을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 이후 많은 것이 변하였습니다. 율법의 의식적 부분도 변하여 그림자가 실체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림자 보다 더 어두운 실체로 변한 사람도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림자 보다 더 못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림자 때보다 더 못하여 과거의 죄에 대해 매여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빨리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야 합니다. 그 깊이로 인하여 과거의 그림자보다 더 경외스럽고 영광스러운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더이상 과거에 매이지 말고 이제는 힘있게 앞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라보며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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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그 선하신 손길로 우리를 붙드시고
믿음의 반석 위에 증인으로 설 수 있는 은혜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입술을 열어 주님의 증거하고 허락하신
그 놀라운 사랑과 섭리를 노래하는 거룩한 자녀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지진과 홍수,
온갖 재해로부터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을 위로하시고
그 치유의 손길을 덮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높이고 사람을 사랑하여
그 은혜를 알고 나누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