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아버지를 몰아내다
세자 경쟁에서 패배한 정안군, 경복궁을 포위하는데…
조선 태조 이성계가 64세이던 1398년(태조 7년) 8월26일 밤.
정안군 이방원은 군대를 동원해 부왕 태조가 머물던 경복궁을 기습해 포위했다.
세자 경쟁에서 패배한 정안군이 세자 방석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이었다.
경복궁 안에서 와병 중이던 태조는 속수무책이었다.
경복궁을 장악한 정안군은 세자 방석을 궁 밖으로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태조는 “나가더라도 뭐가 해롭겠느냐?”라며 막내아들 방석을 나가게 했다.
그때 방석은 울면서 하직했고 방석의 부인 심씨는 남편의 옷자락을 당기면서 통곡했다.
나가는 순간 죽으리라는 공포 때문이었다.
태조도 그런 불안이 없지 않았지만 설마 죽이지는 않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방석은 나가자마자 살해됐다.
뒤이어 정안군은 방석의 친형 방번을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태조는 “세자 방석이야 어쩔 수 없었지만 너야 먼 지방에 귀양 보내는 데 불과할 것이다”라며 내보냈다.
그러나 방번 역시 나간 직후 살해되고 말았다.
태조의 사위 이제도 집으로 갔다가 살해됐다.
태조는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상대방의 무력에 이토록 속수무책으로 당한 적이 없었다.
전쟁터에서는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백전백승의 장군이었다.
또한 조선왕조를 개창하고 7년을 군림하며 뜻대로 하지 못한 일이 없었다.
그러던 태조가 일생일대에 처음으로 상대방의 무력에 압도돼 일방적으로 굴복당했다.
그것도 다섯째 아들에게 굴복당했다.
태조는 굴욕감과 상실감에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사흘 동안 태조는 곡기를 끊고 누워만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이대로 죽는다면 정안군은 방석과 방번의 원혼을 더더욱 박대하지 않을까?
그러니 어떻게든 살아남아 비명횡사한 아들들의 명복을 빌어줘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태조는 사흘째 되던 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제1차 왕자의 난이 발발하고 10여일 지난 9월5일,
태조는 둘째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후 상왕 이성계가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는 방석과 방번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상왕 이성계는 방석과 방번에 대한 추모의 정이 깊어질수록 정안군에 대한 증오의 마음도 커져갔다.
그럴수록 상왕 이성계는 경복궁에서 살기도 싫었고 정안군을 보기도 싫었다.
하지만 상왕 이성계는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였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경복궁 북쪽에 쪽문을 내고 몰래 방번의 옛집으로 가 추억에 잠기는 정도였다.
경복궁 북쪽에 난 쪽문은 상왕 이성계의 심정과 처지를 상징했다.
상왕 이성계의 속마음은 쪽문으로 연결되는 방번과 방석의 원혼에게 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일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으로 상왕 이성계의 후계자는 현재의 왕인 정종 그리고 정안군이었다.
상왕 이성계는 경복궁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숨죽이고 살아야만 했다.
명색이 상왕이었지만 실제는 포로였던 셈이다.
왕비 강씨에게 휘둘려 사사로운 마음으로 세자를 세운 업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첫댓글 신덕왕후 소생 방석에게 세자자리를
준것에 원한이 많았지요 ᆢ
공부 진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