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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인은 시간 날 때마다 꽃밭에 나가 꽃씨를 딴다. 더 이상 꽃 심을 자리도 없는데, 지성으로 꽃씨를 받는다. 플락스 꽃씨도 받고, 애스터 꽃씨도 받고, 클레오미 꽃씨도 받는다. 충분한 꽃씨가 일렬횡대로 늘어선 종이컵들 속에 가득가득 담겨 있고, 심지어 두부 갑이나 순두부 사 왔던 대형 통에까지 그들먹하게 담겨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꾸자꾸 꽃씨를 받는다. 더위 먹기 전에 그만 하라고 남편이 고함을 질러도, 거의 다 됐다며 계속해서 꽃씨를 딴다.
꽃씨 따는 내 아내의 모습은 아름답다. 항상 “허리 아파,” “손목 아파,” “오늘 너무너무 피곤해,” 하면서도, 땡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억척스럽게 꽃씨를 딴다. 나는 꽃씨 따는 그녀의 아픈 손목을 사랑한다. 빠글빠글 내밀어 그녀의 코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들을 사랑한다. 잘 익은 홍옥사과처럼 햇볕에 빨개진 그녀의 양쪽 볼때기를 깨물고 싶다.
그녀는 지금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다. 날씨 좋은 날이면 영락없이, 아름다운 꿈을 꾸러 햇볕으로 나간다. 꽃씨를 따면서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는 여인이 사랑스럽지 않을 리가 없다. 그녀는 더 조직적이어서 한층 조화롭고, 색깔과 철을 잘 섞어 화려함이 꼬리를 물고 계절마다 이어지는 내년의 꽃밭을 꿈꾸고 있다. 미래의 꽃밭을 새로 짜서 색다르게 디자인하지 않는다면, 올해의 꽃밭보다 더 개선된 꽃밭을 기대할 수 없다. 컵에 담아 놓은 이 꽃씨들은 영숙이네 뒤뜰에도 심어지고 수잔네 입구 양쪽 길가에도 뿌려질 것이다. 아내는 교회 옆의 풀숲을 개간하여 대형 꽃동산으로 만들고, 교회 동쪽주차장 기나긴 둑을 플락스로 뒤덮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그녀의 꿈은 그녀가 가꿔놓은 꽃들만큼이나 아름답다.
꿈을 꾸며 꽃씨를 따는 동안은, 그녀에게 따가운 햇볕이 문제될 리가 없다. 손가락 마디가 부어도 아픈 줄 모르고, 손바닥에 가시 박힌 사실도 알아차릴 턱이 없다. 그 꿈을 접고 남편 옆의 현실로 되돌아옴과 동시에, “여긴 왜 따갑지?” “어머, 여기도 찢겼네.” “오늘 정말, 농담 아니고 진짜진짜 피곤해,” 라고 말할 것이다. 그녀가 사지사방 아프다고 자지러져도 그것이 엄살이 아님을 내가 안다.
눈에 보이는 꽃씨들을 모두 따 없애야 아내는 집안으로 들어올 모양이다. 나 혼자 집안에서 빈둥대며, 에어컨 돌리기가 부담스럽다. 그만 좀 하고 들어오라고 소리 지르며 아내에게 짜증을 부려 본다. 참다못해 에어컨을 끄고, 나도 쫓아 나가서 꽃씨를 부지런히 따 담는다. 일삼아 꽃씨를 따니, 더욱 덥고 등허리는 땀범벅이 된다.
어렸을 때 할머니 따라 나가서 동부 따던 뜨거운 밭둑이 생각난다. 호박벌 한 마리가 참깨 꽃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나는 인지와 엄지로 꽃 입구를 꼭 집어, 참깨 꽃 속으로 호박벌을 가두었다. 강낭콩만큼이나 큼직하고, 호랑이처럼 노란 줄과 시커먼 털로 중무장한 공포의 호박벌이었다. 그 무서운 놈이 좁은 공간 속으로 기어들어가 나에게 잡히다니? 호박벌을 생포한 나는 ‘세상에는 엉뚱한 성공도 있을 수 있구나’ 하며 흥분했다.
“잡았다 할머니~. 내가 호박벌을 맨손가락으로 잡았다. 이만한 왕팅이 호박벌이 바로 요 참깨 꽃 안에 갇혔다~. 진짜 잡았어 할머니. 아니면 내 목 쳐.”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할머니가 닛본도로 내 목을 치라는 것인지, 당수로 내 목을 쳐도 좋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맨손가락으로 호박벌 잡았다는 사실을 동네방네 떠벌이고 싶었지만, 주위에 사람이라고는 할머니밖에 없다. 너무 자랑스러워서 내가 허풍을 떨던 그때였다. 꽃 속에 구속당하여 웡웡대던 호박벌이 침을 내밀어, 참깨 꽃잎을 뚫고 통과하면서, 내 손가락을 힘껏 쏘았다. 너무 힘껏 쏘아서 호박벌의 꽁댕이 살점까지 침에 딸려 나와 내 손가락에 박혔다. 벌이 침을 이렇게 깊이 찔렀으니, 나는 죽을 수도 있다. 눈물도 좀 나오긴 했었겠지만, 나는 목욕을 해도 될 만큼 온몸에 땀을 철철 흘리며, 들판이 떠나가도록 소리 높여 울었다. 논에서 일하시던 아버지가 큰일 난 줄 알고 쫓아 나와, 침을 빼고 된장을 뭉쳐 발라서 치료는 됐지만, 배꼽을 움켜잡고 웃으시던 할머니는 그리움으로 남는다.
땀 흐르는 여름날 할머니와 동부 따듯, 오늘은 땀 흘리며 아내와 꽃씨를 딴다. 오늘 따고 있는, 땀에 젖은 이 꽃씨는 내일의 추억으로 심겨질 것이다. 오늘 거두는 이 꽃씨 이야기가 온전히 성장하고 곰삭아, 좋은 술로 발효하고 숙성되면, 나는 락스퍼 꽃 같이 청초한 시 한 줄을 쓰리라. 지금 내 옆에서 꽃씨를 따 담는 아내는, 그 무렵이면, 내가 그 추억을 확인하는 거울로 남으리라.
1). 순수문학 소설 당선으로 등단(2006년)
2).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 공모 소설당선(2007년)
3). 한국산문 수필공모 당선(2010년)
4). 경희 해외동포 소설 우수상(2010년)
5). 서울 문예창작 소설 금상(2013년)
6). 재외동포 소설 우수상(2014년)
7). Chicago Writers Series에 초청되어 소설 발표 Event 개최(2016년)
8). 국제 PEN 한국 해외작가상(2016년)
9). 해외 한국소설 작가상(2023년)
10). 제 4회 독서대전 독후감 공모 선정 소설(2023)
11). 한국문협 회원, 국제 PEN회원, 한국 소설가 중앙위원
12). 시카고 문인회장 역임.
13). 시카고 문화회관 문창교실 Instructor
14). 현 미주문협 이사
저서: 단편소설집---“발목 잡힌 새는 하늘을 본다” “소자들의 병신춤” “달 속에 박힌 아방궁”
중편소설집---“나비는 단풍잎 밑에서 봄을 부른다”
수필집---“여름 겨울 없이 추운 사나이”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 “눈물 타임스 눈물”